구자범 홀딱 깨다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3년 1월 1일 12:00 오전

철학과 음악이 있습니다. 철학은 나를 둘러싼 커다란 편견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게 해주었고, 음악은 언제나 즐거움입니다.
여러 사람들과 함께할 수 있는 음악이 좋아 오랫동안 독일의 오페라극장에서 지휘했는데, 지금 가장 서고 싶은 곳은 이 땅의 음악당입니다. 잘 노는 오케스트라, 함께 술 마시고 노는 오케스트라를 좋아합니다. 이들과, 그리고 더 많은 사람들을 불러 함께 연주하는 것이 기쁩니다. 최근 제가 후기낭만 관현악 레퍼토리를 즐겨 연주하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단 한 번도 무대 위에서 떨어본 적이 없습니다. 음악으로 시험을 보거나 평가 받아본 적이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한여름 ‘해운대 까마귀’라 불린 적이 있을 만큼 항상 검은 옷만 입고 다니고, 건강도 신경 쓰지 않습니다. 음악할 때, 술 마실 때 즐거우면 그걸로 만족입니다. 술을 함께 마시면 곁에 있는 사람들의 위대함을 발견하게 됩니다.
저를 보고 ‘저 친구 너무 쉽게 말하네’라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겠지만, 원래부터 이런 생각으로 살았던 것은 아닙니다. 열심히 고민한 후 대단한 용기를 내어 지금 이 생각에 도달했습니다.
나 구자범은, 현실에 발 딛고 살았고, 처절히 고민했고, 그 결과 용기를 통해 자유로워진 사람입니다.


▲ 인터뷰이 지휘자 구자범
인터뷰어 박용완 편집장


▲ 2012년 12월 17일 오후 8시
월간객석 사옥 갤러리 정미소

안녕하세요. 월간객석 편집장 박용완입니다. 오픈인터뷰 홀딱 세 번째 시간 ‘구자범의 개인교습’에 함께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지휘자 구자범 씨는 지난 12월호 커버 스토리의 주인공이기도 한데요, 이 땅의 젊은 음악학도들에게, 음악을 업으로 삼으려는 이들에게 해줄 말이 있어서 특별히 이번 인터뷰에 응해주셨습니다. 그럼 오늘의 주인공 구자범 씨를 박수로 맞아주십시오.
좌중의 박수 속에 구자범이 등장한다.
먼저 와주신 여러분께 한 말씀 해주십시오.
인터뷰의 질문을 모르는 상황으로 여기 왔습니다. 무슨 얘기가 나올지 모르지만 진솔한 시간이 됐으면 합니다.
그 어느 ‘홀딱’보다 진지한 청중이 모인 듯해서 저는 다소 긴장이 되는데요. 긴장을 푸는 차원에서 먼저 이 질문부터 해보겠습니다. 지휘자 구자범은 카리스마가 넘치다 못해 가까이하기에 좀 무섭다, 쉽게 다가가기 어렵다라는 선입견이 있습니다. 본인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카리스마라는 말이 잘못 쓰이는 것 같군요. 저는 짓궂은 거 좋아하고, 장난 좋아하고, 개구쟁이 같은 남자입니다.
그럼 본격적으로, 관객과의 대화를 시작하겠습니다. 참가신청과 함께 받은 관객들의 질문 위주로 인터뷰를 구성했습니다. 첫 번째 질문은 고3 유환일 군이 보내줬습니다. “연주자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이 어떻게 음악, 혹은 여러 예술활동을 통해 예술로 변모해 우리에게 다가올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음악적 표현을 한다’라는 단계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알고 싶습니다.” ‘음악적 표현’이란 건 굉장히 추상적인 개념인데, 구자범 씨는 이를 어떻게 만들어내는지 궁금하다는 뜻이겠지요.
일단 클래식 음악과 대중음악을 구분해보죠. 대중음악은 클래식 음악에 비해 해석의 여지가 적습니다. 반면 클래식 음악은 해석에 의해 비로소 재탄생합니다. 해석하기 전에는 음악이 아니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클래식 음악은 연주자의 해석을 통해 비로소 재창출되고 그럼으로써 의미를 갖습니다. 예를 들어 지휘자는 악보를 보면서 작곡된 시대와 작곡가의 어법을 생각하며 연주로 표현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그 표현이란 누구에게 맞는, 누구를 위한 표현인가요? 음악을 작곡한 사람의 의도를 충분히 표현한다는 것은 단지 작곡가를 위한 것입니까? 이 땅에 숨 쉬는 사람들을 위해 필요한 일이기도 하죠. 사실 그게 가장 중요하죠. 일례로 빠르기인 프레스토에 대해 생각해보죠. 과거엔 빨라 봤자 말(馬)이었지만, 지금은 KTX, 우주선도 있어요. 피아니시모와 포르티시모도 그렇지요. 수백 년 전 그 고요한 환경 속에서 듣는 소리와 오늘날의 소음 속에서 듣는 소리의 크고 작음은 분명 다릅니다. 이 시간 이 땅에서 숨쉬는 사람들에게 의미있는 표현을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제가 하고 싶은 얘기는 ‘앎’에 대한 겁니다. 지식에 따라 다른 해석이 가능합니다. 존 케이지의 ‘4분 33초’를 예로 들어봅시다. 드라마 ‘베토벤 바이러스’를 보면 지휘자가 관객에게 “맘대로 떠드세요, 그 모든 게 음악입니다”라고 말하고, 또 어릴 때 봤던 백과사전에도 ‘새소리나 기침소리도 음악이 될 수 있다’라고 나와 있죠. 근데 제가 알고 있는 지식으로는 이 곡을 다르게 해석할 수 있어요. 절대온도, 모든 분자가 정지하고, 즉 우주가 죽은 상태의 절대온도 0도를 섭씨로 바꾸면 -273도입니다. 273을 ‘분’으로 나누면 4분 33초가 되죠. 그 지식에 비춰볼 때, 이 작품은 우주가 멈춘 극단적인 고요함을 느껴보라는 의도의 해석이 가능해집니다. 재갈 물리고, 눈 가리고, 가만히… 그렇게 들어보라는 해석을 제시할 수 있죠. 보이는 대로, 들리는 대로 아는 게 아니라 아는 만큼 보이고 아는 만큼 들립니다. 해석을 하기 위해서는 어떤 식으로든 무언가를 알고 있어야 해요. 나아가 음악적 표현에 있어서 ‘앎’이란 어법만 아는 데서 끝나는 게 아닙니다. 이 시대를 사는 모습이 그 음악 속에 어떻게 드러날 수 있는지 고민해야 합니다.
“가령 연주자가 단순히 감정만 가지고 연주한다면 청중에게 음악을 제대로 전달할 수 없는 건가요?”라는 질문도 있습니다. 저도 궁금한 것이, 몇 해 전 당시 중학교이었던 조성진 군의 ‘단테 소나타’를 듣고 충격과 감동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가 지옥과 천국을, 인생의 희로애락을 알까 생각해보면, 여전히 모를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 이런 사람이 천재인가도 싶었습니다.
저는 단테도 잘 모르고, 천국과 지옥도 모릅니다. 천국과 지옥을 아는 사람이 있나요? 단테는 천국과 지옥을 봤을까요? 표제의 내용과 연주의 감동 간에는 큰 상관관계가 없습니다. 물론 그 연주가 듣는 이의 감정을 움직여 감동을 줄 수는 있겠죠. 딸이 피아노를 잘 못쳐도 어머니는 그 연주를 듣고 감동받을 수도 있고요. 그러니 감동을 느꼈다고 해서 그 연주가 어마어마한 것이다, 천재의 것이다 라고 말할 수는 없어요. 화가가 자신의 감정에 빠져 엉엉 울며 성스러운 그림을 그릴 수는 있겠지만, 음악은 다릅니다. 장송곡과 레퀴엠을 엉엉 울면서 부를 수는 없어요. 레퀴엠도 음악이고, 음악은 흥이 나야 된다는 말입니다. 연주자가 연주를 통해 ‘감정’만을 전달하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듣는 이의 자세나 마음가짐에 따라 다르게 들린다는 얘기인가요?
듣는 이도 자기가 아는 만큼 들리겠죠.
다음 방희망 씨 질문입니다. 얘술가는, 음악가는 세상과 꼭 소통해야 하는지 물어보셨습니다.
대단한 이상주의자(혹은 관념론자)라도 땅에 발을 붙이고 살죠. 사람은 혼자 살 수 없고, 같이 살기 때문에 음악도 존재합니다. 게다가 음악은 같은 공간에서 같은 울림을 동시에 듣는다는 점에서 다른 예술과 다릅니다. 미술작품은, 같은 공간에서 동시에 본다 해도 서로 다른 시각이 존재할 수밖에 없잖아요. 바로 옆에서 봐도 보는 사람의 의지에 따라 다른 곳을 볼 수 있죠. 물론 음악회장도 어디에 앉느냐에 따라 차이는 있겠지만, 공기의 울림이라는 물리적인 힘이 직접적으로 귀를 때린다는 점에서 타 예술의 감상과는 다릅니다. 그래서 과거부터 제의에서 인간을 환상의 세계로 끌어들이는 매체로 작용할 수 있었습니다. 음악은 함께 즐기는 것이고, 함께함으로써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혼자서 피아노를 치는 것보다 오케스트라 지휘하는 것이 좋습니다. 여러 명이 함께 하는 뮤지컬ㆍ오페라를 좋아하는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함께 어우러지는 수단으로서의 음악을 좋아합니다. 물론 그것이 악용될 수도 있지만, 음악의 사회성은 무시할 수 없습니다.
많은 분들이 공통적으로 보내주신 질문은 지휘자라는 직업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작곡 혹은 다른 악기를 전공하면서 지휘자를 꿈꾸는 분들이 오늘 많이 오셨습니다. 그 공통질문을 지금부터 이어가겠습니다. 먼저, 지휘자에게 카리스마는 꼭 필요한 건가요? 100명의 단원들 앞에 설 때는 어떤 마음인지 궁금합니다.
제게는 피아노 앞에 앉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지난 12월호 인터뷰에서도 말했지만, 오케스트라는 여러 훌륭한 인격체들이 모여서 한 사람의 음악성을 존중해주겠다고 암묵적으로 동의한 악기입니다. 그들은 제가 원하는 음악을 하기로 약속한 사람들입니다. 원래 오케스트라는 오페라에서 사람의 노래를 반주하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1980년대 컴퓨터 기술이 발전하면서 등장한 것도 ‘가라오케’, 즉 ‘가짜 오케스트라’인데 이 역시 사람들의 노래를 반주하기 위한 기계죠. 이 가라오케가 등장하면서 피아노 치면서 술자리에서 사람들 노래를 반주해주던 저는 직장(?)을 잃게 됐지만요. 제가 오케스트라 앞에 설 때 피아노 앞에 앉는 것과 똑같다는 것은, 피아노로 누군가의 노래를 반주하며 느꼈던, 음악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전에 느꼈던 그 행복했던 기억들… 그 기분으로 선다는 뜻입니다. 행복하게 음악을 만들기 위해 그 앞에 섭니다. 앞서 지휘자의 카리스마에 대한 얘기가 나왔는데, 카리스마 없어도 피아노 연주할 수 있잖아요? 카리스마라는 단어를 함부로 쓰는 경향이 있는데, 카리스마는 성경으로 치면 모세 정도 되어야 가질 수 있는 영도력입니다. 영도는 설득력과 연결됩니다. 지휘자에게 카리스마까지는 필요하지 않을지 몰라도, 설득력은 필요합니다. 내가 하는 음악적 해석이 설득력을 갖느냐의 문제이죠. 보다 많은 사람들을 설득하면 연주가 쉬워지니까요. 악보를 보면서 “여기는 왜 이렇게 해요?’라고 물으면 “좋잖아요, 재미있잖아요”라고 답하는 음악가들을 많이 봤어요. ‘난 그냥 이게 좋아’라면 설득력이 약해지죠. 그래서 앎이 중요한 겁니다. 무턱대고 따라오라 하면 연주하는 게 별로 재미없죠.

100명의 단원들 앞에 서면 이 사람이 내 해석을 좋아하는구나, 저 사람은 오늘 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구나… 다 보이나요?
가족끼리도 다 보이잖아요. 일률적이지 않은 게 오히려 정상인 거죠. 그걸 느낀다 하더라도 해야 할 건 해야 합니다. 사는 게 그렇죠.
단 몇 명의 부하직원을 데리고 있는 사람일지라도, 직원들이 내 뜻과 다르다는 걸 알고 있는 상황에선 무언가를 제안하는 게 어려운 법인데요.
부하라는 표현부터 다른 거죠. 전 악기라고 표현했잖아요. 여기 피아노 전공한 분 계세요?
객석에서 한 젊은이가 용기 있게 손을 들었다.
피아노 줄이 몇 개예요?
“건반이 88개….”
줄, 줄, 줄이 몇 개예요?
“줄이요? 그건 모르겠어요.”
일반적으로 다들 잘 몰라요. 건반 수는 알아도 줄이 몇 개인지는 모르죠. 저도 제 뒤에 있는 이 피아노의 줄 수는 몰라요. 피아노 크기마다, 회사마다 다르거든요. 하지만 건반이 부서지는 것보다 줄이 끊어지는 일이 자주 일어나죠. 오케스트라 단원 한 명 한 명이 피아노 줄이라면, 지휘자는 그 한 줄 한 줄의 상태를 알아야 해요. 어떤 줄은 약간 녹이 슬었고, 어떤 줄은 약하고… 전체적으로 관심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지휘자가 되려면 구체적으로 무엇을 공부해야 합니까?
이런 농담이 있어요. 세계에는 세 종류의 지휘자가 있다. 절대음감이 있는 지휘자, 절대음감이 없는 지휘자, ‘절대’ 음감이 없는 지휘자.
숨소리 죽이며 진지하게 듣던 청중이 까르르 속 시원히 웃는다.
비슷한 이야기 하나 더 할까요. 토끼와 뱀이 길을 가다 부딪혔는데 둘 다 장님이었어요. “넌 복실복실 따뜻하고 귀가 길쭉하네, 토끼구나!” 뱀이 그렇게 말하자 토끼가 “넌 차갑고 징글징글한 게 귀가 없네. 넌 지휘자구나!”
“우어어….” 이번엔 청중이 다소 충격을 받은 모양이다.
그런 농담이 있을 정도로, 실제로 오케스트라 연주자들이 지휘자들에게 실망스러워하는 부분이 없지 않다는 얘기죠. 그런데 다소 오해도 있습니다. 지휘자는 잘못된 소리를 들었다고 해서 곧장 지적하지 않아요. 바로 얘기하면 연주하는 사람이 당황하고, 좋은 일이 생기지 않거든요. 지휘과에 들어가서 2년간 힘들게 배운 것 중에 하나가, 이른바 ‘삑사리’가 났을 때, 즉 연주자가 잘못된 음을 냈을 때 곧바로 그쪽을 보지 않는 겁니다. 쉽지 않아요. 사람은 본능적으로 몸이 먼저 움직이거든요. 그래서 머리를 고정시키고 누가 틀린 음을 내도 그쪽을 보지 않는 연습을 합니다. 진짜예요! 리허설에 지적을 당해도 당황스러운데, 무대 위에서 연주할 때 그런 일이 생기면 연주자는 더 당황하고, 연주는 더 망가져요. 틀린 부분이 신경 쓰이더라도 바로 대놓고 내색하지 않는 것. 지휘자가 지녀야 할 테크닉이자 덕목 중 하나입니다. 그러한 이유로 지휘자가 틀린 음에 반응하지 않고 그냥 넘어갈 때, 막상 틀린 사람은 지휘자와 교감을 하지만 주변 사람들은 ‘저 지휘자는 틀려도 못 알아듣는구나’ 오해할 수 있습니다. 지휘자가 되려면 무엇을 공부해야 하느냐라는 질문에 이런 얘기를 길게 하게 된 이유는, 선천적으로 귀가 나쁘면 지휘를 공부할 수 없다는 걸 말하고자 합니다.
지휘자가 될 수 있는 음감이란 어느 정도인가요?
앞서의 농담이, 절대음감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내가 듣는 음악이 ‘좋다, 나쁘다’를 넘어서 ‘이래서 좋다, 저래서 좋다’ 분석적으로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보통은 그렇게 듣지 않고, 그렇게 듣기 힘들죠. 음악평론가가 미식가라면, 지휘자는 요리사라고 할 수 있어요. 좋은 데 가서 좋은 음식 먹고 이런저런 좋은 것이 들어가서 이렇게 맛이 나는구나 라는 게 미식가의 평가라면, 지휘자는 이 맛이 나려면 진간장 몇 스푼에 국간장 몇 스푼, 해물을 어떤 불에 몇 분이나 데쳤는지 알아차릴 수 있는 분석능력을 지녀야 합니다.
여성 지휘자에 대한 의견을 묻는 질문도 많았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것에 대한 의견 말이죠?
예를 들어, 여성 지휘자에게 한계가 있는지, 설령 있다면 무엇인지, 그런 것들이겠죠.
차별과 구별을 다릅니다. 그것 말고는 드릴 말씀이 없어요. 좀더 구체적으로 물어보시든가요.
그럼, 여성 지휘자의 수는 상대적으로 왜 이렇게 적나요?
그건 여성이 답해야 하는 질문 아닌가요?
그렇다면, 본인이 경험해온 음악환경은 여성이 지휘봉을 잡기에 차별적이지는 않았나요?
적어도 독일에선 차별적이지 않았습니다. 여성 지휘과 학생이 늘 세 명은 있었으니까요.
지휘자에 대한 질문은 여기까지 하고, 김우아와 그의 엄마라고 참여신청해주신 관객의 질문입니다. “음악을 전공하는 아이에게 슬럼프가 왔습니다. 부모로서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몇 학년이죠?
객석의 김우아 양이 답한다. “중1이요.”
중1이 무슨 슬럼프야. 어머니가 슬럼프라고 보면 되겠네요.
김우아의 어머니가 슬럼프에 대해 설명한다. 음악만큼 아름다운 철학은 없다고 생각하여 아이에게 음악을 공부시켰는데, 초등학교 6학년이 고3처럼 예술학교 입시를 준비해야 하는 등, 아이도 어머니도 점점 지쳐간다는 얘기다.
우리나라 입시제도 안에서의 고민이라면 제 대답이 아무 의미가 없을 겁니다. 저는 실질적인 답을 할 수 없어요. 일단, 그렇게 사는 삶은 정말 싫어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리 살지 마세요’라고 말할 수는 없잖아요. 저는 그런 삶을 이해할 수 없고, 이해를 못하니 이 문제는 정말 모르겠습니다. 우리나라 음악계를 크게 공연계와 학계로 나눌 수 있는데, 음악대학 입시제도가 지금과 다르고 또 학위를 주지 않는다면 이렇게나 많은 클래식 음악 연주자 인구가 있었을까 라는 생각을 합니다. 여전히 자기 돈으로 자기 공연을 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실적이 되니까요. 즉 공연이 학교의 연장이란 말입니다. 사실 무대에 서는 게 목적이면 학교에 가지 않아도 돼요. 저는 스물다섯에 한국의 대학원에서 철학을 공부하다가 그만두고 지휘를 공부하러 독일로 건너갔어요. 3년 후, 학교를 졸업하기 직전에 운 좋게 오페라극장의 지휘자가 됐습니다. 그때 저에게 졸업장 보자는 사람은 없었어요. 지휘를 할 줄 알면 지휘자다… 그뿐입니다. 물론 저처럼 살아온 사람이 거의 없기 때문에 제 주장만 내세울 수는 없지만, 제가 학생이라면 일단 부모님이 내 공부에 간섭하시는 게 싫을 것 같아요. 음악을 하면서 자유를 만끽하고, 음악은 그 자유를 표현하는 것인데, 구속을 당하고 경쟁을 하면서 음악을 하면 즐겁지 않겠죠. 저는 음악을 하면 무조건 즐거워야 한다고 생각해요. ‘노래’는 ‘놀이’에서 온 말인 것처럼요. 저는 단 한 번도 무대에서 떨어본 적이 없습니다. 언제나 무대에서 놀았으니까요. 그런데 제가 아는 많은 사람들이 무대에서 떨어요. 왜 떨지? 그 사람들이 이상하다 생각했는데, 그들에게 음악은 공부였고 인생 내내 남에게 평가받는 ‘시험’이었던 겁니다. 물론 음악의 즐거움을 빼앗은 건 부모님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사회 전체의 문제라고 봅니다. 다시 말씀 드리지만, 저 같은 사람이 많지 않다는 걸 압니다. 하지만, 음악이 평가의 기준이 된다면 음악의 본질을 훼손하는 것이라는 점은 꼭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다음으로 최락철 씨의 질문입니다. 작곡을 전공하고, 지금 유학 준비 중이라고 합니다. 게다가 갓 제대를 했다니 요즘 생각이 정말 많으시겠군요. “마에스트로께서는 20세기 중반부터 현재까지 창작되고 있는 현대음악의 향후 발전 가능성이 있다고 보십니까?”
발전이 뭐죠?
더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도 발전이겠죠.
바흐보다 모차르트를 좋아하는 사람이 더 많아지면 그것도 발전인가요?
예를 들어, 진은숙이나 서울시향 ‘아르스 노바’ 시리즈 등장 전과 지금을 비교해보면 현대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늘어났겠죠. 기획력의 힘일 수도 있지만, 한번 가서 들어보니 재미있더라 해서 가는 사람들도 있을 겁니다.
저에게 헤비메탈을 30시간 들려주면 그 음악이 더 좋아질까요? 저는 그렇지 않을 것 같아요. 후대의 음악사조가 더 발전된 것일까요? 모차르트보다 바흐 음악이 오히려 작곡하기 더 어렵습니다. 모차르트는 쉽게 썼죠. 그렇다면 그건 바흐보다 더 쉬운 음악인가요? 그것도 또 다른 형태의 발전인가요? 아닙니다. 그저 새로운 음악이었습니다. 그게 다예요. 저는 연주자나 지휘자에게 천재니 뭐니 붙이는 건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작곡가ㆍ화가ㆍ작가처럼 창조하는 사람들 중에 일부는 천재라고 할 수 있죠. 그걸 해석해서 재창조하는 사람들을 천재라고 부를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이들 새로운 창작은 우리에게 어떠한 의미를 던지기에 중요합니다. 예전에는 실험이 많았죠. 종이를 놓고 계산을 해서 음악을 만들었죠. 이렇게 놓고 뒤집어놓고, 이리저리 뒤집어가면서 작곡가는 ‘100년 후에 내 이론을 학교에서 가르칠 것이고, 사람들은 도레미파솔라시도를 알아듣듯 이 음계를 알아들을 거다’라고 생각했겠죠. 쇤베르크가 그랬어요. 하지만 첫 번째 예상만 적중했죠. 두 번째 예상과 달리 우리는 알아듣지 못합니다. 실험에서 끝난 거죠. 하지만 제안이 될 수는 있었습니다. 보통 자연을 보고 숭고미를 느낀다고 하는데, 저는 에펠 탑을 보면서도 느낍니다. 에펠 탑 전이나 지금이나 건축물은 다 나름의 용도가 있었죠. 사람이 산다, 누군가의 무덤이나, 송신탑이다…. 그런데 그 큰 에펠 탑이 아무런 용도 없는 그저 장식용이란 말입니다. 지구의 반지가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 만큼 그저 장식적이죠. 에펠 탑이 인류에 어마어마한 기여를 한 건 아니지만, 지구에 반짝반짝, 어떤 새로움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새로운 것을 만들었는가 만큼이나 어떤 목적으로 만들었느냐가 중요합니다.
어느덧 한 시간 반이 흘렀습니다. 구자범 씨 혼자 한 시간 이십 분 정도 말씀을 하신 듯합니다. 이제 오픈인터뷰 홀딱의 마지막 순서인 ‘다시 쓰는 바이오그래피’를 시작해볼까 합니다. 틀에 박힌 프로필을 떠나 인물을 새롭게 정의해보는 시간입니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구자범은 철학과 음악을 공부했다, 대신 내가 철학과 음악을 공부하며 얻은 가장 큰 배움은 각각 이것이다.
철학에서는 나를 둘러싼 커다란 편견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었던 것을 배웠습니다. 음악을 통해서 얻은 큰 배움은 아직은 없습니다.
구자범은 만하임ㆍ하겐ㆍ다름슈타트ㆍ하노버 오페라극장에서 지휘했다, 대신 내가 오페라를 지휘해보고 싶은 극장은 이곳이다.
우리나라에 있는 오페라극장이요.
구자범은 광주시향 상임지휘자를 역임했고 현재 경기필을 이끌고 있다, 대신 내가 좋아하는 오케스트라는 이런 오케스트라다.
잘 노는 오케스트라. 저랑 같이 술 마시고 노는 오케스트라. 진심입니다.
구자범은 후기낭만 작품을 즐겨 연주한다, 대신 나는 왜 후기낭만 작품을 즐겨 연주한다.
지금 제가 그 음악들이 좋으니까요. 독일 오페라극장들에 있을 때의 단점은, 한 작품을 너무 오랫동안 올린다는 것, 그리고 오페라 한 편 올리는 데 예산이 너무 많이 들어서 작품을 지휘자가 고를 수 없다는 점이었습니다. 반면에 지금은 제가 관심 있는 곡들을 할 수 있죠. 요즘 좋아하는 곡들은 여려 명이 함께 하는 작품인데, 후기낭만 쪽에 많죠.
구자범은 ‘음악회 관람의 연령제한’이라는 전재미문의 발상을 내놓았다. 대신 나는 언제, 어떻게 그런 획기적인 발상을 떠올린다.
우리 오케스트라 행정감독과 저는 좋은 술친구인데, 함께 술을 마시다 보면 아이디어가 마구 나옵니다. 술을 함께 마시면 옆에 있는 사람의 위대함을 보게 돼요.
구자범은 체계적인 오케스트라 정련 방식과 인문학적 소양으로 한국 음악계에 큰 반향을 일으키며 그가 맡은 단체들의 실질적인 체질 개선을 가져왔다. 대신, 나는 나 자신의 체질 개선을 위해 이런저런 노력을 한다.
전혀 없어요. (안쪽이 너덜너덜 다 해진 옷을 뒤집어 보이며) 저는 옷도 늘 이렇게 똑같이 입고 다니잖아요. 한여름 해운대에 이렇게 입고 갔는데, 사람들이 까마귀라면서 막 사진도 찍고 그랬어요. 저는 체질개선에 관심 없습니다. 음악할 때, 술 마실 때 즐거우면 되죠. 건강에도 관심이 없어요. 저에겐 흥미롭지 않은 질문이네요.
끝으로 ‘구자범은 음악가다’ 이걸 대신할 수 있는 정의가 있을까요?
성인군자든 우리 같이 평범한 사람이든 사람들은 저마다 깨닫습니다. 깨닫는 것은 많은 이들이 할 수 있어요. 그런데 깨달았기 때문에 인생을 바꾼다는 건 정말 어마어마한 용기가 필요합니다. 깨달음이 해방이 아니라, 깨달은 후에 용기를 내서 스스로를 바꾸는 게 진짜 해방입니다. 오늘 저를 보고 ‘저 친구 너무 쉽게 말하네’라고 생각하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저는 원래부터 이런 생각으로 살았던 사람이 아니라 열심히 고민한 후 대단한 용기를 갖고 지금 이 생각에 도달했습니다. 음악가로서의 구자범은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이런 얘기를 ‘똘아이’라서 하는 게 아니라 고민 끝에 할 수 있게 됐다는 사실이 행복합니다. 그게 구자범인 것 같아요. 구자범은, 현실에 발 딛고 살았고, 처절히 고민했고, 그 결과 용기를 통해 자유로워진 사람입니다.

글 박용완 기자(spirate@) 사진 심규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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