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예/리 인코니티의 비발디 ‘신 사계’

차세대 여성 리더의 등장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3년 1월 1일 12:00 오전

2012년 1월 17일 유명 시대악기 악단 ‘앙상블 415’가 마지막 콘서트를 끝으로 해체했다. 악단의 설립자이자 리더이면서 저명한 여성 바로크 바이올리니스트인 키아라 반키니는 체력이 부치자 “박수칠 때 떠나자”는 심정으로 단원들과 어려운 결단을 했다. 악단은 1981년 창단 이래 30년간 HMF와 지그재그 테리투아르 레이블 등에서 이탈리아와 독일 바로크의 비경을 선사해 왔다. 팬들은 아쉬워했다. 하지만 반키니는 독일 라디오와의 인터뷰에서 그동안 자신이 일궈온 성과에 대해 자부심을 나타내면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길러낸 제자들이 앙상블 415의 명맥을 이어 나아갈 것이다.”
반키니의 자신감은 프랑스 엑상프로방스 출신의 여성 바로크 바이올리니스트 아망딘 베예로 대표된다. 베예는 자세히 소개하기가 새삼스러울 정도로 시대음악 팬들에게 이미 친숙한 존재다. 베예와 반키니는 따로 떼어놓을 수 없다. 1996년 파리 국립음악원을 졸업한 베예는 유럽 일급의 고음악 아카데미인 스위스 바젤 스콜라 칸토룸에서 반키니를 사사했다. 반키니로부터 바로크 레퍼토리와 표현력, 확장된 기술을 익혔고, 자연스럽게 ‘앙상블 415’의 멤버가 됐다. 보논치니와 제미니아니, 발렌티니 등 지그재그에서 나온 이탈리아 합주 협주곡 선집에서 베예는 스승과 함께 바이올린 앙상블의 진수를 보여줬다. 베예는 바이올린 기교뿐 아니라 지휘자나 리더가 아닌 단원의 일부로서 앙상블에 융화하는 법, 즉 시대음악 연주에서 가장 중요한 덕목을 터득했다. 2006년 ‘리 인코니티(Gli Incogniti)’를 창단해 독립할 때 베예가 가장 중시한 것도 이 점이다. 17세기 베니스의 지성인 그룹 ‘익명인들(Incogniti)의 아카데미아’에서 따온 악단 이름처럼 철저히 ‘자기’를 감추고 악단을 전면에 내세우면서 베예는 반키니의 말대로 앙상블 415가 보여줬던 조화의 미덕을 계승했다.
2008년 악단의 첫 녹음인 비발디 ‘사계’는 임팩트가 강한 첫 출발이자 지향점을 보여줬다. 베예는 독주 외에 반주부의 현악 4중주와 바소 콘티누오에 악기당 한 명의 주자로 기용한 파격 편성을 택했다. 투명한 내성부와 화려한 솔로가 하나로 융합했고, 표제성을 해치지 않은 채 엄격한 형식미를 살리며 ‘사계’의 새 기준을 제시했다. 2001년 이탈리아 토리노 비발디 국제 콩쿠르 우승으로 검증된 베예의 ‘비발디다운’ 억양과 수사, 초절 테크닉도 빼놓을 수 없다. 이후 베예는 바흐 무반주 소나타와 파르티타, C.P.E. 바흐의 소나타집으로 솔로 녹음도 신경 쓰는 한편, 니콜라 마테이스와 요한 로젠뮐러의 합주 소나타를 병행하면서 솔로 바이올린이 존재하되 솔리스트가 부각되지 않는 앙상블의 극치를 보여줬다.
베예는 이번 달 4년 만에 자신과 악단의 이름을 알린 비발디로 돌아왔다. 타이틀 ‘신 사계(Nuova Stagione)’는 전작 ‘사계’와 작품 면에선 연관이 없어 ‘낚시성’으로 보일 만하다. 하지만 두 음반을 관통하는 정서적인 흐름, 스타일의 일관성, 혁신적인 비발디의 재현이란 점에서 후속작으로 충분히 이해될 수 있다. 베예는 “감정의 비등, 유머, 서정미, 감정의 폭발, 집중력, 명상, 성마름, 에너지 이 어느 단어로도 비발디가 우리를 매혹시키는 요소를 설명할 수 없다. 이 음반은 아낌없이 주는 유례 없는 작곡가를 향한 특별한 헌정이다. 그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다양하고 인상적인 악기들 위에 손가락을 얹기만 해도 연주자에게 충분히 보람을 주는, 그런 작곡가다”라고 설명한다.
음반엔 바이올린 협주곡 네 편(RV194·808·235·517)과 첼로 협주곡 두 편(403·420), 트라베르소 협주곡 두 편(431·440) 등 총 여덟 편의 협주곡이 수록됐다. 이중 두 편은 세계 초연작이다. 비발디 학자 마이클 탤벗이 복원한 초연작 RV808부터 리 인코니티는 자기 색을 확실히 드러낸다. 베예는 섬세하고 짜릿한 운궁으로 멜로디 라인을 그리며 전작처럼 악기당 1명, 총 8명이 엮는 합주부는 반주라고 생각되지 않을 만큼 독립적이면서 투명한 울림을 자아낸다. 자연스런 녹음 효과 덕분에 볼륨감도 떨어지지 않는다. 마르코 체카토를 내세운 첼로 협주곡 RV420이나 마누엘 그라나티에로의 트라베르소 협주곡 RV431 역시 독주만 바뀌었을 뿐 특징은 그대로 살아있다. 최근 비발디 협주곡의 교과서로 꼽을 수 있는 나이브(Naive) 전집 시리즈의 일 포모 도로(플루트 협주곡)나 일 자르디노 아르모니코(첼로 협주곡), 콘체르토 이탈리아노와 아카데미아 몬티스 레갈리스(이상 바이올린 협주곡)와 견주어 실내악의 묘미를 배가시킨 느낌이다. 물론 협주적인 에너지에서도 빠지는 구석이 없는 호연이다.
베예는 반키니로부터 엘리자베스 월피시ㆍ파블로 베즈노시우크ㆍ캐서린 매킨토시ㆍ모니카 허짓ㆍ잔 라몽ㆍ레이철 포저로 이어져 내려오는 여성 리더 계보의 가장 최근 세대이다. 하지만 그의 스타일은 선구자인 스승 반키니와 직접 맞닿아 있다. 독주자 혹은 지휘자 개념에서 앙상블의 일원으로 리더의 역할이 바뀌어가는 최근 시대음악 트렌드를 볼 때 베예에게 더 많은 기대를 걸게 된다.

글 이재준(음악 칼럼니스트)


▲ 아망딘 베예(리더ㆍ바이올린)/니콜라 마테이스(바이올린)/마르코 체카토(첼로)/마누엘 그라나티에로(트라베르소)/리 인코니티
Zigzag Territoires ZZT3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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