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켄트리지의 ‘나는 내가 아니고, 그 말은 내 것이 아니다’

역사의 긍정적 진화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3년 1월 1일 12:00 오전

테이트 모던의 오일탱크 안. 화면과 음악에 둘러싸여 있다 보면 1930년대에 짓밟힌 미술사조와 혁명 시기 많은 이들이 꿈꾸던 인간개조에 대한 열망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러시아 혁명에 대한 윌리엄 켄트리지의 엘레지(哀歌)가 표현되는 방식이다.


▲ ⓒ William Kentridge

영국 런던의 테이트 모던 미술관은 영국을 세계 현대미술의 중심부로 견인한 주역이다. 2000년 20세기 초 건립된 발전소를 거대한 현대미술관으로 탈바꿈시켜 장소 자체부터 기념비적인 의미를 지니는 곳이다. 테이트 모던은 개관한 이래 매년 수백만 명의 방문객이 다녀가면서 어느새 현대미술의 순례지가 됐다. 현재의 명성에 안주하기 싫은지 테이트 모던은 최근의 예술계 변화에도 기민하게 대처하고 있다. 2012년, 빠르게 변화하는 현대미술의 흐름을 수용하고자 미디어와 행위예술을 위한 전용공간 ‘탱크’를 설립했다. ‘탱크’는 실제 오일탱크를 그대로 살려서 만들었다. 전시장 내부 벽면은 노출 콘크리트가 지닌 날 것 그대로의 야성이 살아있다. 균일하지 않고 거친 벽면, 엄청난 창고 아래에서 웬만한 작품은 그 아우라에 압도당할 성싶다. 이 특별한 공간이 2012년 11월, 올림픽 기간 특별전시 후 첫 전시자로 택한 이는 윌리엄 켄트리지이다.
2012년 11월 11일부터 2013년 1월 20일까지 열리는 기획전시 ‘나는 내가 아니고, 그 말(馬)은 내 것이 아니다(I Am not Me, the Horse is not Mine)’는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현존 최고의 작가 윌리엄 켄트리지의 미디어설치 전시이다. 그는 2002년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회고전을 연 바 있고, 베니스비엔날레, 도큐멘타 등 최고의 미술축제에 초청받아 호평을 받았다. 윌리엄 켄트리지의 작품은 흑백의 애니매이션과 뇌리에 또렷이 각인되는 강한 메시지가 특징이다.
이번에 탱크에 설치된 윌리엄 켄트리지의 작품 ‘나는 내가 아니고, 그 말은 내 것이 아니다’는 시각적·청각적으로도 불협화음처럼 보인다. 8개의 대형 스크린이 각자 다른 영상을 뿜어내고, 하나의 영상만 제외하곤 다 애니메이션과 콜라주로 한 컷 한 컷 복잡하게 구성돼 있다. 전체적으로 하나로 소화하기엔 다소 무리처럼 보인다. 여기에 화려한 피아노 선율과 신경을 거슬리기까지 하는 관악 소리, 그리고 웅장한 아프리카의 합창 소리가 더하면서 카오스(chaos)를 연출하는 듯하다. 복잡할 수밖에 없는 것이, 이 작품은 몇 번의 진화를 통해 탄생했다.

고골ㆍ쇼스타코비치의 ‘코’와 러시아 혁명
시작은 고골의 소설 ‘코’(1836년 출판)와 이 소설을 바탕으로 한 쇼스타코비치의 오페라 ‘코’(1930년 초연)이다. 켄트리지는 이 두 작품을 기반으로 한 오페라 ‘코’를 직접 총지휘해 제작했다. 이렇게 탄생한 오페라 ‘코’는 2010년 3월 5일, 발레리 게르기예프의 지휘로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극장에서 초연됐다. 이 오페라 ‘코’을 근간으로 ‘탱크’를 위해 다시 준비한 설치미술전이 바로 ‘나는 내가 아니고, 그 말은 내 것이 아니다’이다.
그는 이번 전시에서 오페라에 사용된 영상을 해체해 개별 스크린 위에 무한반복시키는 방법을 택했다. 여기에 오페라 제작 후 그가 느낀 점을 퍼포먼스로 담은 영상과 그의 철학을 한데 녹였다. ‘나는 내가 아니고, 그 말은 내 것이 아니다’는 한 번에 기저에 깔린 주제를 알아채기 힘들다. 다행히도 관객을 미궁으로 빠뜨리는 작품세계에 대해 대해 켄트리지 스스로 설명을 해주는 기회가 있었다. 이 전시회를 계기로 열린 그의 특별강연에서 작가는 트레이드마크인 하얀색 셔츠를 입고, ‘코’의 줄거리를 관객들에게 말했다.
“1836년에 발표된 고골의 소설 ‘코’는 아주 간단한 줄거리를 갖고 있습니다. 어느 날 잠에서 깨 자신의 코가 없어진 것을 발견한 8등 문관 코발레프 소령이 자신의 코를 찾아가는 이야기입니다. 자신의 코를 발견했을 때 그 ‘코’는 소령보다 계급이 높아져 있었고, 코발레프 소령의 얼굴에 붙지도 않았습니다.”
켄트리지의 작품은 오페라 ‘코’가 작곡됐을 무렵 있었던 러시아 혁명 당시의 아카이브 영상과 그 후의 영상들, 스톱모션 애니메이션과 그림자로 만든 연극 영상을 합쳤다. 구소련의 육상선수들과 군중, 러시아어로 된 슬로건, 러시안 아방가르드 아티스트들이 추구한 혁명지향적 유토피아 미술을 보여주는 엘 리시츠키의 도형적 미술 작품과 실현되지 못한 근대미술의 상징 블라디미르 타틀린의 타워까지 아우르는 영상들이다. 이들의 구심점엔 ‘러시아 혁명의 실패’라는 테마가 깔려 있었다. 또한 켄트리지는 이들의 미술을 사용함으로써 작가로서의 사회적 책임을 중요시한 러시안 아방가르드 작가들에 대한 그의 트리뷰트를 보여주는 동시에 오페라의 사회적 배경까지 설명했다.
러시안 아방가르드 작가들은 예술이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신념으로 다양한 예술활동을 전개했다. 혁명 초기에는 낡은 것을 타파하고 새로운 사상을 추구해 환영 받았지만 이후 스탈린이 사회현실주의 그림들만 인정하면서 이들이 운신할 폭은 줄어들었다. 작가들은 작품을 숨기기 시작했고, 결국 그들의 작품들은 러시아 안에서는 종적을 감춘다. 오페라 ‘코’ 역시 쇼스타코비치가 초연 후 스탈린과 사회주의자들의 반대로 공연을 할 수 없었다. 오페라 ‘코’를 관람할 때는 무대 위로 켄트리지가 제작한 영상이 순서대로 상영되며 배경 설명을 해주었다면, 이번 테이트 모던 전시는 관객이 자의에 따라 원의 중심에 서서 작품을 끊임없이 보면서 ‘해석’해야 한다. 어쩌면 필자처럼, 관객들이 이 오일탱크 안에서 화면과 음악에 둘러싸여 있다 보면 1930년대에 짓밟힌 미술사조와 혁명 시기 많은 이들이 꿈꾸던 인간개조에 대한 열망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러시아 혁명에 대한 켄트리지의 엘레지(哀歌)가 표현되는 방식이다.
‘나는 내가 아니고, 이 말은 내 것이 아니다’에는 풍자와 해학도 면면이 흐른다. 그의 유머는 여러 곳에서 보여지는데, 트로스키ㆍ레닌ㆍ스탈린의 사진이 반복해서 나오는 장면에 모두 코가 오려져 있다. 게다가 쇼스타코비치의 역사적인 피아노 연주 장면에서는 이 거대한 코가 그를 마주보고 피아노 위에 앉아있는 영상을 보여준다. 안나 파브로바가 춤추는 장면에는 코가 중첩되어 그녀의 얼굴은 보이지 않다. 실제 혁명 속 아카이브 속에도 거대한 코가 같이 행진한다. 이 장면은 그녀의 영상 위에 한 컷 한 컷 코를 올려놓고 제작한 것이다. 어떻게 보면 이런 코믹한 연출은 관객들을 웃게 만들다가도 결국 그 안에 깔린 주제를 성찰케 하는 다분히 계산된 장치이다. 이 웃기지만 절대 우습지 않은 ‘계산된 희극’이 바로 켄트리지 예술작품의 공통점이다.
이러한 세상의 모순을 작품으로 승화시킨 소설가 고골과 작곡가 쇼스타코비치에 대한 헌사를 켄트리지 작품 속에서 볼 수 있다. 폭압적인 권력과 세상을 비극적으로 받아들여야 할지 코미디처럼 볼지 고민하는 가운데, 그는 이 두 개를 적절히 섞은 끔찍한 블랙 코미디를 세상의 진리에 조금 가까워질 수 있는 길로 해석했다.

과거를 직시함으로써 성숙해지다
이처럼 사회적인 메시지가 강한 그의 작품 특성은 켄트리지 개인사에서 기인한다. 그는 1955년 남아프리카 공화국 요하네스버그에서 아파르타이트(Apartheid, 남아공의 인종차별정책)를 반대하는 백인 시민운동가ㆍ변호사 가정에서 태어났다. 백인으로 인종차별주의 정책 속 지배층이면서도 이 체제를 반대한 극소수의 지식층 가정에서 자랐다. 하지만 유태인이었던 켄트리지의 증조부모는 유태인 혐오사상을 피해 남아공으로 이민을 왔었기에 그의 가족은 남아공에 정착한 여느 백인가족과는 조금 달랐다. 젊은 켄트리지는 요하네스버그 대학에서 정치학과 아프리카학을 공부하고, 미술대학 졸업 후 마임을 공부하러 프랑스 파리로 유학을 떠난다. 이후 다시 조국에 돌아와 극단을 창단하기도 하고 텔레비전 프로듀서로 일하다가 결국 작가로 전향했다.
켄트리지 작품의 미학은 단순한 기법을 통해서 자칫 고리타분해 보이고 잘난 척하는 듯 보일 수 있는 철학적ㆍ인문학적 사색의 깊이를 감춘다는 것이다. 그의 애니메이션은 목탄으로 흑백 처리된 영상이다. 80년대 초부터 지속한 스톱모션 애니메이션 방식은 목탄화를 그리고, 사진을 찍고, 이를 고쳐가며 또 사진을 찍어 한 컷 한 컷 준비하는 애니메이션 초기 방법이다. 컴퓨터 그래픽이 더해진 매끄러운 애니메이션 영상이 아니라 그의 표현대로 ‘원시적’이다. 이렇게 아날로그적으로 만들어진 켄트리지의 작품들은 자신이 경험한 아파르타이트의 상처, 트라우마를 표현하고, 나아가 폭압적인 세계에 저항하는 메시지를 담게 된다.
그의 이러한 작업 방법은 그가 작품을 통해 반영하고자 하는 메시지와 연결된다. 켄트리지는 자신의 애니메이션 제작 자체에 목적을 두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를 창조함으로써 사회 성찰적인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에 의미를 둔다. 이는 그가 가진 작가로서의 사명이다. 켄트리지를 단순한 아파르타이트 제도의 피해자나 수해자, 혹은 이를 소재로 철학적인 작품을 만드는 작가로서만 규정하는 것이 무리인 이유이다.
언젠가 켄트리지는 언론으로부터 “당신은 ‘코’를 통해서 러시아의 상황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것이 당신이 겪은 남아공의 상황보다 더 표현하기 덜 고통스러워서 그런 것이냐?”는 질문을 받았다. 여기에 켄트리지는 ‘코’를 통해 “자신을 하나의 완성되고 균일한 한 구성체, 자아로 인정하는 서양적 논리는 만들어진 환상임을 표현하고 싶었다”고 대답했다. 또 한번 대중을 미궁에 빠뜨리는 듯한 철학적 사색이다. 켄트리지는 작품 속에서 과거의 오류에 대한 참회와 트라우마를 담으면서도, 감성적ㆍ서정적인 감정 개입보다는 과거를 직시함으로써 우리사회가 성숙해 나가야 한다는 메시지를 담는다. 역사라는 거대한 수레바퀴를 긍정으로 진화시키는 작가로서의 사명이 그가 실천하는 방법인 것이다. 물론 그의 모든 작품들을 그 연장선에서 보기에는 켄트리지의 세계관이 너무 넓지만 말이다.

글 김승민(이스카이 컨템퍼러리 아트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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