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쇼이 오페라의 베르크 ‘보체크’

드디어 ‘현대성’을 얻다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3년 2월 1일 12:00 오전


▲ ⓒDamir Yusupov/Большой театр

이 DVD는 1927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의 성공적인 초연 이후 80여년만에 다시 러시아의 무대에 세워진 알반 베르크의 오페라 ‘보체크’ 볼쇼이 극장 공연 실황을 담고 있다. 이 공연의 연출가 드미트리 체르냐코프는 20세기의 오페라를 21세기의 현실로 옮겨 재해석한다는 포스트모던적 연출 과제를 성공적으로 수행해내고 있다. 공연 시작 전 무대 위에서 미리 연출되는 시각적 풍경부터 파격이다. 재킷 사진에서 부분적으로 보이듯 무대의 공간이 12칸(재킷 사진에서는 9칸만 보인다)으로 나뉘어 있고, 그 12칸의 규격화된 공간 속에서 보체크 가족을 포함한 서로 다른 열두 가족들의 일상이 엿보인다. 12음을 알레고리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보이는 이러한 무대 공간 분할은 이후 공연 속에서 독특한 방식으로 활용된다. 장면의 변화에 따라 하나 혹은 여러 칸들을 부분적으로 쓰면서, 술집 장면 등에서는 가로 4칸을 한꺼번에 열어 마치 4대3 비율의 작은 모니터 화면이 16대9 비율의(혹은 더 넓은 파노라마의) 거대한 와이드 화면으로 바뀌는 느낌을 만들어낸다. 장면이 바뀔 때마다 전원이 끊긴 모니터를 연상시키듯 가운데 점을 향해 사방에서 닫히는 막의 시각적 효과도 청중이 텔레비전이나 컴퓨터 화면을 보는 듯한 체험을 안겨준다. 이러한 무대 배치를 배경으로 보체크의 신경증은 매체 속 가상의 현실과 실제의 현실이 뒤엉키는 21세기 자본주의 사회의 하이퍼리얼리티 속으로 접속된다. 18세기의 보이체크와 20세기 초의 보체크가 계급적 차별과 이로 인한 빈곤 속에서 신경증을 겪는다면, 21세기의 보체크는 (12칸으로 규격화되어 나뉜 답답한 무대 공간이 암시하듯) 원자화된 개인의 고립감과 함께 욕망과 소비를 부추기는 자본주의 스펙터클의 환상 속에서 신경증을 앓는다. 여기서 보체크를 괴롭히는 두 등장인물 ‘대위’와 ‘의사’는 실제의 인물이 아니라 무의식적 환상 속에서 보체크 자신이 쓰는 가면으로 설정된다. 연출자 체르냐코프가 말하듯이 현대인들은 인터넷 등의 가상공간 속에서 모두 이러한 가면을 쓰게 되는데, “이러한 가면이 그들로 하여금 궁극의 심리적 욕구들, 즉 잔인성·모욕·길들이기·복종하기·처벌하기·괴롭히기·광기 분출 따위를 충족시켜 주기” 때문이다. 보체크가 마리를 살해하는 장면도 인터넷 동영상 속 사디스트 포르노그래피의 욕망 분출을 연상시킨다. 특히 마지막 장면에서 엄마의 죽음에도 아랑곳 않고 텔레비전 화면의 컴퓨터 게임에 몰두하는 아이의 모습은 섬뜩하리만큼 현실적이다. 요컨대 체르냐코프는 바로 21세기 현재 돌이킬 수 없는 자본주의의 길을 걷고 있는 러시아 청중을 향해 주변의 살아 있는 인물 보체크(와 그의 가족)의 신경증에 대한 원인과 처방을 묻는 것이다. ‘20세기의 음악이 21세기에도 ‘현대’ 음악일 수 있을까’ 하는 물음은 ‘보체크’의 현대적 연출을 통해 하나의 답변을 얻을 수 있을 듯하다. 젊은 지휘자 테오도르 쿠렌치스가 치밀하게 그려내는 베르크의 음풍경은 체르냐코프가 연출해내는 현대화된 시각적 풍경과 완벽하게 조율된다. 노래와 외침, 의식과 무의식 사이를 종횡하는 게오르크 니글(보체크 역)과 마르디 비어스(마리 역)를 비롯한 배우들의 탁월한 음색 표현과 광기 어린 목소리 연기도 그렇다. 21세기에 이르러서야 베르크의 음악이 ‘미래성’을 벗어던지고 비로소 ‘현대성’을 얻은 느낌이랄까.

글 최유준(음악평론가)


▲ 니글(보체크)/비어스(마리)/파스테르(대위)/쿠렌치스(지휘)/볼쇼이 극장 오케스트라/체르냐코프(연출)
Bel Air Classiques BAC 068 (16:9/NTSC/PCM Stereo, DD5.1/135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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