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스토르 피아솔라(2)

위대한 만남, 투쟁의 역사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3년 3월 1일 12:00 오전

카를로스 가르델을 만나다
아스토르 피아솔라는 1921년 3월 11일, 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남쪽으로 400킬로미터 떨어진 휴양 도시 마르델플라타에서 태어났다. 피아솔라가 세 살 때, 그의 가족은 약속의 땅 미국으로 이주, 이탈리안 마피아들이 운집해 있던 뉴욕 동부의 ‘리틀 이탈리아’ 지역에 자리 잡았다. 그곳에서 피아솔라의 아버지는 건달들이 드나드는 이발소를 운영하였고, 어머니는 재봉사와 미용사로 일하며 가계를 꾸리고 있었다. 다리가 불편한 장애를 지닌 소년 피아솔라는 이탈리아 마피아들을 흉내 내는 어린 꼬마들 속에서 싸움꾼으로 자라났고, 그중에서도 왼손 펀치가 강해 ‘왼손잡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게 되었다. 위대한 복서가 될 꿈을 꾸고 있던 피아솔라는 권투 도장에서 만난 또래의 이탈리아계 소년의 펀치에 쓰러지며 권투 선수의 꿈을 접게 되었다. 피아솔라를 쓰러트린 소년은 마틴 스콜세지의 영화 ‘성난 황소’의 극중 주인공이었던 미들급 세계 챔피언 제이크 라모타였다. 뉴욕 뒷골목의 불량한 청소년으로 성장했던 피아솔라가 속해 있던 패거리의 우두머리는 훗날 무패의 헤비급 챔피언이 되는 록키 마르시아노였다. 피아솔라는 뉴욕의 뒷골목을 헤치며 싸워나갔던 거친 경험들이 자신이 음악계에서 인내하고, 승리할 수 있는 의지의 원동력이었다고 회고한 바 있다.
거리에서 방황하던 아스토르 피아솔라를 음악으로 이끈 이는 그의 부모였다. 탱고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이 남달랐던 아버지는 권투와 재즈 음악에 빠져 있던 피아솔라에게 반도네온을 선물했다. 넉넉지 못한 생활에서도 피아솔라는 부모의 관심 속에 어릴 적부터 음악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피아솔라는 아버지가 사다 주신 반도네온을 연주하며 지역 라디오의 연주회에서 클래식 음악을 연주하곤 했다. 1934년, 피아솔라의 아버지는 탱고의 최고 스타였던 카를로스 가르델의 숙소에 나무로 만든 조각을 선물을 전하며, 아들을 위한 특별한 인연을 맺고자 했다. 가르델과 피아솔라의 가족은 두터운 친분을 쌓게 되었고, 머지않아 피아솔라의 집은 가르델의 소개로 뉴욕에 거주하는 수많은 탱고·라틴 음악가들이 모이는 만남의 장소가 되었다. 이 무렵, 가르델은 피아솔라의 집에서 12세 소년의 범상치 않은 반도네온 연주를 듣고 깊이 매료되었다. “얘야, 너의 탱고는 마치 갈리시아 지방(스페인 서북부 지방) 사람처럼 연주하는구나.” 가르델은 자신이 제작·주연하던 영화 ‘당신이 나를 사랑하게 되는 날’에 에스파냐어를 구사하며, 반도네온을 연주하는 어린 피아솔라를 출연시켰다. 피아솔라는 25달러의 출연료를 받고 신문배달 소년으로 출연하여, 극중에서 갈고 닦은 반도네온 실력을 자랑할 수 있었다. 이후에도 가르델은 자신의 콘서트에 피아솔라를 게스트로 출연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했으며, 동시에 미국 전역을 순회하는 자신의 투어 콘서트에 동행하기를 제안했다. 그러나 어린 아들을 멀리 보낼 수 없다고 생각한 부모의 반대는 피아솔라의 삶을 연장시키는 결과가 되고 말았다. 1935년 6월 24일, 카를로스 가르델은 콘서트 투어 중 콜롬비아 상공에서의 비행기 사고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의 죽음은 나에게 너무나도 치명적인 슬픔이었다. 만일 그때, 내가 가르델의 투어에 동행했다면, 나는 반도네온이 아닌, 구름 위에서 하프를 연주하고 있었을 것이다.” 아르헨티나에서 12월 11일은 국가가 공식적으로 제정한 ‘탱고의 날’이다. 12월 11일은 카를로스 가르델이 생일이다. 카를로스 가르델은 초기 탱고 음악의 가장 위대한 영웅이었으며, 또한 아스토르 피아솔라의 음악에 커다란 그림자를 드리운, 최초의 스승이었다.

히나스테라ㆍ불랑제를 만나다
1937년, 피아솔라의 가족은 고향 마르델플라타로 돌아왔다. 16세의 피아솔라는 회계사가 되기 위해 자격증 시험을 준비했다. 그러나 회계사 시험에 실패한 후, 음악이 자신의 운명임을 깨닫게 되었다. 그는 최고의 반도네온 연주가 아니발 트로일로를 찾아갔고, 이내 부에노스아이레스의 가장 저명한 밴드인 아니발 트로일로의 앙상블에 반도네온 연주자 겸 편곡자로 발탁되었다. 수요에 비해 공급이 턱없이 부족했던 반도네온은 유명한 연주자들이 자신의 후계자들에게 물려주는 것을 전통으로 삼았다. 피아솔라가 생전에 분신처럼 아꼈던 더블 A표의 반도네온은 아니발 트로일로로부터 물려받은, 애정의 증표, 후견의 약속이었다. 그러나 아르헨티나의 동료 뮤지션들이 피아솔라를 바라보는 시선은 차갑고, 배타적이었다. 피아솔라의 말을 빌리면 그는 “반도네온으로 ‘랩소디 인 블루’를 연주하는 외계인” 취급을 당했다고 한다. 피아솔라가 목말랐던 것은 클래식 음악에 대한 체계적인 이해, 작곡과 오케스트레이션을 위한 전문적인 학습이었다. 그는 부에노스아이레스를 방문한 피아니스트 아르투르 루빈스타인에게 자신이 작곡한 피아노 협주곡 악보 한 곡을 들고 무작정 찾아갔다. 루빈스타인은 그의 가능성을 눈여겨보며 본격적으로 작곡 공부를 권했다. 그리고 곧장 아르헨티나를 대표하는 클래식 작곡가 알베르토 히나스테라에 전화를 걸었고, 이튿날 아침, 히나스테라는 피아솔라의 첫 번째 작곡 선생이 되었다. 히나스테라 곁에서 6년을 수학하는 동안 피아솔라는 피아노 협주곡·실내악곡·소나타류 등 미친 듯이 작곡을 하기 시작했다. 1953년, 아르헨티나 정부에서 주관하는 작곡 콩쿠르에서 우승을 하고, 이의 부상으로 프랑스 정부가 제공하는 장학금으로 파리에서 수학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그리고 프랑스의 여성 작곡가 나디아 불랑제를 만나 그녀 곁에서 18년 같은 18개월을 사사하며 혹독한 수련을 했다. 불랑제는 카바레에서 반도네온을 연주했던 이력을 부끄러워하며, 스트라빈스키·버르토크·라벨을 모방하고 있던 피아솔라에게 탱고만이 그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음악임을 일깨워주었다. 피아솔라는 자신의 삶을 바꾼 세 명의 위대한 스승으로, 알베르토 히나스테라·나디아 불랑제, 그리고 탱고의 고향 부에노스아이레스를 언급하곤 했다.

누에보 탱고를 위해 투쟁하다
1955년, 프랑스에서의 유학을 마치고 부에노스아이레스로 돌아온 피아솔라는 다시 아니발 트로일로의 밴드에 복귀했다. 그리고 자신의 밴드를 결성했다. 아르헨티나로 돌아온 이후인 1955년부터 1974년까지의 시간은 피아솔라의 평전 ‘피아솔라, 위대한 탱고’에서 지시하듯 ‘투쟁’이라는 단어로 정의될 수 있다. 그는 ‘성역화된 음악’ 탱고에 혁신의 메스를 가하기 시작했다. 그의 선택은 탱고에 클래식의 화성·오케스트레이션·대위법을 적용했다. 그가 탐닉했던 바흐·스트라빈스키·버르토크·라벨의 유산은 고스란히 그의 새로운 탱고 작곡을 위해 사용되었다. 더불어 그는 어린 시절, 미국에서 들었던 재즈의 편성, 스윙감과 불규칙적인 리듬감, 즉흥연주의 요소를 적극적으로 이식하고자 했다. 비록 아무도 손대지 않았던 탱고의 정형성을 이탈한 피아솔라의 실험을 향해 극단적인 찬반 의견이 대두되었다. 사람들은 피아솔라가 실험한 새로운 탱고의 경향을 위해 ‘누에보 탱고’라 칭하게 되었다. 그의 새로운 음악은 젊은 청중을 사로잡았으나, 전통적인 탱고의 방식을 파괴했다는 이유로 탱고 순혈주의자들에게는 거센 비난도 뒤따랐다. 비평가들은 그를 향해 광대, 편집증 환자라고 공격했고, 아르헨티나의 군사 정부도 그의 음악을 지나치게 진보적이라고 해서 대놓고 비난하고 억압했다. 그러나 이러한 피아솔라를 향한 비난, 이에 완강하게 맞섰던 피아솔라의 저항, 투쟁이 거세질수록 그의 누에보 탱고는 보다 넓은 공간으로 확산되고, 새로운 청중의 열렬한 지지를 약속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아르헨티나 탱고의 역사는 ‘피아솔리스타?친(親)피아솔라’와 ‘안티피아솔리스타?반(反)피아솔라’ 간의 대립, 논쟁으로 발전·진화하게 되었다. 피아솔라는 안티피아솔리스타들로부터 폭력과 살인 협박을 받을 만큼 격렬한 저항에 시달려야만 했다. 그는 “나의 탱고는 발을 위한 것이 아닌 귀를 위한 것이다”라는 신념으로 상업성을 떠난, 아방가르드 탱고 음악을 향하고 있었다. 그는 45장의 음반을 내놓았지만, 댄스홀의 반주 음악을 거부하고 예술가로서의 자존심을 지켰고, 덕분에 수십 년 동안 기초생활비마저 부족한 가난한 예술가로 살아야만 했다.
누에보 탱고의 본격적인 개화의 시점은 1960년이었다. 피아솔라의 혁신은 외형상 탱고 앙상블의 악기 편성을 통해 구체화되었다. 1950년대 솔로에서부터 오케스트라, 그리고 8중주와 9중주를 통해 모색되었던 새로운 탱고를 향한 접근은 1960년 결성되어 1974년까지 유지된 첫 번째 누에보 탱고 퀸텟(Nuevo Tango Quintet)을 통해 발화되었다. 그의 음악은 여전히 소수의 것이었다. 이 시기, 피아솔라는 반도네온을 중심으로 다양한 악기를 편성에 흡수하면서 새로운 탱고 음악의 사운드를 모색했으며, 혁명적인 탱고 작법으로 관성에 빠진 탱고 음악의 틀을 깨부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여전히 그의 음악은 소수의 것이었다. 단 한 번도 상업적인 공연, 춤곡으로서의 탱고, 반주 음악에 참여하지 않았기에 가난은 필연적인 것이었다. 1968년, 피아솔라는 탱고로 연주되는 탱고 오페리타(Tango Operita)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마리아’를 초연했다. 자신의 5중주단을 포함한 보컬이 더해진 10중주 편성으로 연주된 모험적인 시도는 끝내 실패로 돌아갔다. 피아솔라의 첫 번째 누에보 탱고 퀸텟도 잦은 멤버 교체와 수시로 바뀌는 악기 편성으로 안정을 기하지는 못한 채, 1974년 해체되고 말았다. 그러나 피아솔라를 위한 뜨거운 환영은 유럽에서 뜨겁게 일고 있었다. 유럽에서 발매된 피아솔라의 음반은 콜렉터들에 의해 필청 앨범으로 대두되었고, 유럽의 지지자들은 아르헨티나에서 배척되고 소외받은 외로운 영웅 아스토르 피아솔라를 열렬히 원했다.

누에보 탱고, 세계로 번지다
1974년, 피아솔라는 자신의 음악에 발견과 전환을 제공했던 프랑스로 향했다. 결국 피아솔라의 가치를 인정한 것은 아르헨티나가 아닌 유럽, 더 나아가 세계였다. 피아솔라는 10년간 그는 파리에 근거지를 두고, 빈·런던·베를린·암스테르담·뉴욕·도쿄 등지에서 활발하게 공연과 녹음 활동을 전개했다. 1978년에는 피아니스트 파블로 지글러를 위시하여 엑토르 콘솔레(베이스)·페르난도 수아레스 파스(바이올린)·오라시오 말비시노(기타)와 함께 두 번째 누에보 탱고 퀸텟을 결성했다. 1978년부터 1988년까지 멤버의 변동 없이 10년의 시간을 곧게 유지된 그의 2기 탱고 5중주단은 피아솔라 음악의 전성기를 보장했다. 세계의 음악가들은 피아솔라의 악보에 깃든 비애, 격정, 관능, 그리고 희망과 절망의 드라마에 탄복하게 되었다. 이탈리아의 칸초네 보컬리스트 밀바·재즈 비브라폰 주자 게리 버튼·첼리스트 요요 마와 크로노스 쿼텟이 피아솔라와 함께 탱고를 연주하는 의미 있는 확산이 이어졌다. 유럽과 미국에서 피아솔라와 누에보 탱고의 이름은 단순히 탱고의 개혁을 넘어선, 새로운 음악의 발견, 오늘의 음악이 지향해야 할 자세로 상징화되었다. 그의 5중주단의 연주는 세계 각국의 클래식 콘서트 홀에서 격조 높은 감상용 음악을 체험하기 위한 팬들의 발길로 붐볐다. 아르헨티나도 더 이상 피아솔라의 드높아진 위상을 외면할 수 없었다. 1985년, 피아솔라가 아르헨티나로 돌아왔을 때, 그를 힐난했던 조국은 자국의 음악 탱고를 전 세계에 널리 전파한 공로를 치하하며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영광스러운 시민’으로 추대하였다. 1988년 5월, 피아솔라의 누에보 탱고 퀸텟은 뉴욕에서 레코딩된 음반 ‘La Camorra’를 마지막으로 녹음한 후, 6월 공식적으로 해체되었다. 1990년 8월 4일, 피아솔라는 파리에서 뇌출혈로 쓰러진 후, 23개월간의 투병 생활을 했지만 끝내 일어나지 못했다. 1992년 7월 5일, 피아솔라는 자신의 운명과 영원히 함께 했던 탱고의 성지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조용히 눈을 감는다. 피아솔라의 탱고는 종래의 탱고 음악뿐만 아니라 클래식·재즈·팝을 포함한 지상의 모든 음악가들이 머물 수 있는, 불멸의 쉼터가 되었다. 그가 행한 고단한 투쟁과 실험의 결과는 오늘과 내일의 음악이 향해야 할 구체적인 방법론, 해답이 되었다.

글 하종욱(재즈 칼럼니스트)

거슈윈은 재즈의 역사를 바꾸지는 못했다. 그러나 피아솔라는
탱고음악의 역사를 바꾸어 놓았다 카를로스 쿠리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음악은 ‘피아솔라 전과 후’로
구분되어야 한다 에르네스토 사바토
혁명가라는 단어의 엄밀한 의미에서 대단한 혁명가 카를로스 메넴
피아솔라는 탱고를 진정한 음악 예술의 차원으로 올려놓았다 ‘피가로’
반도네온의 카라얀 ‘르 몽드’
새로운 탱고의 핑크 플로이드 ‘에스콰이어’
재즈에서 듀크 엘링턴과 루이 암스트롱이 차지하는 위상과 같다
‘로스엔젤레스 타임스’
피아솔라와의 시간은 마치 바흐와 함께 있었던 것과 같았다 알 디 메올라
한 번 경험하면 절대 잊을 수 없는,
믿을 수 없을 만큼의 힘과 에너지가 있다 기돈 크레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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