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의 창작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3년 4월 1일 12:00 오전

기록의 창작

사람은 과거에서 배우고 전례에 기대기에 ‘기록’은 언제나 중요한 역할을 해왔습니다. 새로움을 창조해내려는 사람일수록, 끝도 없는 기록을 뒤적이며 과거의 자국을 좇는 일에 몰두합니다. 지금의 시도 혹은 발견이 진정한 새로움인지는 오직 과거만이 증명해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니야, 그것은 지금으로부터 37년 전 섬진강에 사는 김 모씨가 내놓았던 아이디어인 걸.” 기록이 이렇게 밝혀주면, 우리는 다른 새로움을 낳기 위해 다시 더 많은 기록 속으로 빠져듭니다.
이달 창간 29주년 특집호를 마련하며 우리는 1984년부터 지금까지의 모든 ‘객석’을 꺼내보았습니다. 유럽판 창간이라는 새로운 날개를 달기에 앞서, 29년간 우리가 이 땅에서 응시해온 ‘세계’를 다시금 찬찬히 바라보고 싶었습니다. 349권의 무게만큼이나 수많은 과거가 지면에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그런 일이 있었군, 이런 일이 있었지 하며 349권의 ‘객석’을 넘기다가, 문득 궁금해졌습니다. 세계의 오늘을 전하기 위해 낯선 골목으로 들어선 해외 통신원. 그 통신원의 소식을 목이 빠져라 기다리다 오히려 목이 짧아졌을, 그러다 어느 날엔 직접 비행기에 오르기도 하는 기자. 과연 누구길래 그 많은 것들을 목격하고, 글과 사진으로 남겼을까.
이 궁금증은 예외적인 것입니다. 세상의 수많은 기록에는 기록자의 이름조차 없는 경우가 아마도 더 많을 것이고, 설령 이름을 남긴다 한들 세상이 궁금해하는 것은 누가 기록했느냐가 아닌 기록이 말해주는 바일 때가 압도적으로 더 많습니다.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을 거라는 슬픈 예감에 사로잡힐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남긴 글과 사진이 기록으로 남을 뿐, 우리는 없는 상황이 너무도 쉽게 그려져서 가끔은 서글픕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아름다운 글, 아름다운 사진, 기록 그 자체로 아름다운 기록을 남기기 위해 머리카락을 쥐어뜯고 한숨을 쉽니다. 48시간 내리 한 잠도 자지 못한 나를 버티게 할 즐거움 혹은 슬픔은 무엇입니까. 사랑하는 사람의 갑작스런 죽음 말고는 떠오르지 않습니다.
여기 ‘객석’에 살았었던 눈과 귀, 손과 발이 기록한 것은 다름아닌 예술 창조의 현장이었습니다. 묻고 싶습니다. 창작을 기록하며 스스로를 ‘창작자’라고 여긴 기록자는 있었습니까. 네. 있어왔고, 앞으로도 있을 것입니다. 아니, 그런 창작자 겸 기록자만이 있기를 바랍니다.
바다와 하늘 건너 저 멀리 베를린에서 우리의 쌍둥이가 갓 태어났습니다. ‘객석’ 유럽판을 이끄는 편집장은 10년 넘게 본지 런던 통신원으로 활약해온 데스먼드 추윈입니다. 기록을 창작과 창조로 여기는 동지를 만나 한없이 기쁜 봄입니다.
이제 저는 통영으로 떠납니다.

기록을 창작하기 위해.

박용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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