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국악관현악단 ‘박범훈의 소리연’

거침없는 그의 행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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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3년 6월 1일 12:00 오전

공연이 시작되기 몇 주 전부터 떠들썩했다. 몇몇 매체는 ‘거장의 귀환’이라 선전했고, 공연장을 가는 차 안 국악FM에서는 “오늘 저녁 ‘박범훈의 소리연’ 공연 생중계로 방송시간을 조정”한다는 안내가 흘러나왔다. 한 달여 장충동 일대 거리에는 그의 얼굴이 걸린 현수막이 줄을 지었다. 이틀의 공연 중 박범훈의 대표 국악관현악곡을 만날 수 있는 첫째날 공연. 거장의 귀한? 그는 정말 거장일까? 4월 19~20일, 국립극장 해오름극장.
글 정우정 기자(wjj@) 사진 국립극장

지난 정권의 청와대 교육문화수석비서관을 지낸 작곡가 겸 지휘자 박범훈이 2년의 임기를 끝내고 다시 무대로 돌아왔다. 그는 원래 피리 연주자로 시작해 작곡과 지휘로 영역을 넓히며 국악계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해온 연주자이자 교육자다. 그가 돌연 정치를 하겠다고 나섰을 때, 국악계에서도 원성이 자자했지만, 그의 성격을 아는 이라면 “그럴 수 있다”라며 걱정할 일은 아니라는 듯 안심한 기억이 있다. 국악을 하는 사람이 정치라. 갸우뚱하겠지만, 이미 음악가가 한 대학의 총장을 지내는 거사까지 일구었으니, 나아가 볼 수 있음 직한 일이다.
국립극장의 작곡가 시리즈의 일환인 이번 무대는 ‘박범훈의 소리연’이다. 국립국악관현악단의 초대 예술감독을 역임했던 그가 이끈 이번 연주는 무엇보다 단원들이 편안해보인다. 그가 학교에서 지도했던 제자들과 악단 초기에 함께 생활했던 연주자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박범훈류 피리산조’ ‘사물놀이 협주곡 신모듬’, 국악관현악 ‘축연무’ ‘춘무’ ‘가야금을 위한 새산조’ 등 그가 작곡한 대부분의 곡을 알고 있다면 비슷한 어법으로 정서를 일축하는 경향에 탐탁지 않아 하는 경우나, 혹은 그 정서에 안정을 누리는 두 부류가 있을 수 있다. 기자는 전자에 속하는 감성으로 주위에서 만들어가는 그의 권위적인 이미지 창출이 마뜩지 않곤 했다. 의무적으로 관현악 수업 시간에 그의 작품을 서너 개씩 배울 때마다 그는 과연 이 곡들을 어떠한 경위로 만들어갔던 걸까 늘 의문이었다.
이날 공연의 첫 곡 ‘춘무’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었다. 아득한 소금 연주로 시작되는 이 곡은 자연의 경계를 음률로 만끽할 수 있는 곡이다. 무대 전면에 펼쳐진 산수의 영상 덕분인지, 가락이 시원하고 선선하게 다가온다. 피리의 선율이 사납지 않고 따뜻한 것은 박범훈 곡의 특징이다. 대나무 악기들이 조합할 수 있는 푸근한 화음과 독특하면서도 재치 있는 음색이 새롭다. 이어지는 무대는 그의 작은 딸 박두리나가 연주하는 얼후 협주곡 ‘향’. 절정의 감성을 하나의 음정도 놓치지 않고 이끌어나간 박두리나의 연주가 끝나자 국립무용단과 경기소리꾼 김영임이 협연한 ‘춤을 위한 나나니’, 김일륜 교수가 협연한 ‘가야금 협주곡 경드름’이 초연됐다. 경제 느낌의 이 곡은 박범훈의 곡 ‘가야금을 위한 새산조’와는 아주 다르다. 남도 감성을 완전하게 배제한 이 곡은 양평 출신인 그의 기질과 경기 무악을 무대 음악으로 전환시킨 그의 스승 지영희를 온전하게 떠올리게 한다. 이어지는 무대 ‘신맞이’는 명불 허전한 타악 연주자 김덕수의 협연, 강신무 서경욱의 공수받이 장면을 음악에 그대로 담았다. 무녀가 복을 주며 돈을 타고, 신을 받는 공수를 마친 후 기다란 천을 찢으며 액을 푸는 장면을 만날 수 있는데, 천 가는 소리마저 음악으로 녹여내는 그의 상상력은 ‘삶’에 대한 지독한 관심이 없다면 힘든 부분이다. 마지막곡 ‘댄스스포츠를 위한 관현악’은 ‘조사’의 개념을 곡에 대입했다고 볼 수 있다. 대개의 작곡가들은 자기 당착적인 의미 부여를 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현대의 자화상을 음악에 녹여낸 박범훈은 과감하다. 음악도 인류학적 기탄을 제공할 수가 있는 걸까.
이날의 관현악 연주가 훌륭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들은 자신들의 몸에 맞는 옷을 입은 익숙한 가락에는 흥분했고, 난해함이 있는 곳에는 감성의 포인트를 각자 연출했다. 그것이 박범훈의 곡에 ‘오래된 이미지’를 제공하고야 말았다. ‘인향(人香)’이 느껴지는 그의 곡을 제대로 이해하고 연주할 수 있는 관현악단은 과연 어디에 있는 것일까. 그러나 곧 들을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는 찾아 나설지도 모르겠다. 결코 가만히 있을 그가 아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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