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회 서울국제음악콩쿠르

화려함으로 둔갑한 경쟁과 긴장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3년 6월 1일 12:00 오전


▲ 1위를 수상한 김범진이 열연하고 있다

점수 매기고 누구를 떨어뜨리는 삭막한 경연장이 아니었다. 결선에서 대편성 오케스트라 반주에 맞춰 폼 나게 부르는 것도 아니요, 이제 겨우 예선 2차일 뿐이었다. 이 땅에 성악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았던가.

4월 23일 저녁 ‘LG와 함께하는 제9회 서울국제음악콩쿠르’의 반환점을 돈 예술의전당 리사이틀홀은 거의 만석이었다. 바이올린 부문으로 자웅을 겨룬 지난해만 해도 예선의 경우 빈자리가 더 많아 연주가 끝나도 박수 소리는 공허하기 일쑤였다. 하지만 올해는 1차 예선에서 탈락한 세계 13개국에서 온 도전자들 또한 마음이 움츠러들 법도 하지만 자신의 나라로 돌아갈 기미가 전혀 없어보였다. 대부분 객석에 앉아 경쟁을 같이 했던 동료들의 노래에 일희일비하며 오로지 즐기고 있었다. 콩쿠르라는 경쟁과 긴장은 온데간데없고 축제로 화한 느낌이다. 아예 ‘서울국제음악축제’로 대회명을 바꿔야 할 판이었다.

예선, 같은 상(床)의 다른 이야기
음악에 있어서의 ‘동상이몽(同床異夢)’은 콩쿠르에서 가장 제격이다. 같은 곡을 다른 해석으로 즐길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매일같이 반복되었다. 더구나 성악은 소리 전달 도구가 필요 없는, 인간의 몸이 그대로 악기다. 그런 이유에서일까. 같은 곡이라도 노래하는 가수에 따라 감정의 깊이와 넓이와 높이까지 완전히 다르게 전달되었다. 리릭한 목소리를 가지고 있는 소프라노 윤상아가 드보르자크의 오페라 ‘루살카’에 나오는 ‘달에 부치는 노래’를 부를 때 무대 위로 마치 블타바 강의 새벽안개가 그윽하게 번져오는 듯한 환상에 젖었다. 이에 반해 드라마틱 소프라노의 전형이라 할 만한 터키 출신의 데니즈 예팀은 같은 곡에서 장차 왕자에게 배신당할 운명을 예감하기라도 하듯 처절한 넋두리로 무서운 광기마저 뿜어내고 있었다. 국내 오페라 무대에서는 좀처럼 접하기 어려운 대형 소프라노를 콩쿠르 현장에서는 바로 코앞에서 귀가 멍멍할 정도의 음량으로 만나는 기쁨, 이는 악기와는 다른 성악만의 매력이었다. 전공자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비교하며 자신에게 맞는 목소리의 주인공을 가려낼 수 있을 터. 그 때문일까, 고등학생이나 입시생 등 예비 성악도들도 객석에서 많이 볼 수 있었다. 타고난 천재와 노력 가운데 청중은 역시 최선을 다하는 노력에 더 많은 박수를 보냈다. 진실한 음성이 목소리 자랑보다 우위에 선 것이다.
이번 경연의 주인공은 아마도 한국 남자 성악가들일 것이다. 이미 본고장 유럽의 콩쿠르와 오페라하우스를 평정하고 있는 이들은 결선에 6명이 오르는 기염을 토했고, 당연히 실력으로도 세계 수준에 도달해 있었다. 반면 외국인과 여성 가수들은 상대적으로 빈곤한 성적을 보였다. 준결선 진출자 12명 가운데 외국인은 단 세 명에 그쳤고, 한국 출신 소프라노는 김지은이 홀로 턱걸이했다. 2차 예선에서 객석을 사로잡았던 데니스 예팀은 준결선에서 몸 상태가 좋지 않아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했고, 메조소프라노 르네 미셸 라피에만이 결선에 올랐다. 1차 예선에서 포레의 ‘수레국화’를 맛깔 나게 불러 예술가곡 분야의 전반적인 약세 속에서 강한 인상을 남겼던 레제로 테너 샤오유(중국)는 외국인 남자 가수로는 유일하게 준결선 무대에 섰다. 그러나 한국 남자 가수들과의 실력 차이는 컸다. 세계 각국의 음악원과 음악대학을 중심으로 더 효율적인 홍보를 진행해 뛰어난 외국인 성악가들이 한국 대표 콩쿠르에 도전할 수 있는 묘책을 강구해야 할 것 같다.
예술가곡과 오페라 아리아를 한 곡씩 부르는 1차 예선은 절반의 성공이었다. 연출이 중시되는 비주얼 무대를 추구하는 세계 오페라계의 추세를 반영한 결과일까. 안으로 고민하고 공들여야 감동을 줄 수 있는 예술가곡의 수준은 아리아에 비해 전반적으로 저조했다. 아리아를 위한 예비 동작 같은 뉘앙스마저 풍겼다. 목소리는 타고나지만 발음은 노력으로 인해 완성된다. 대체적으로 발음이 좋지 않으니 노래의 완성도는 떨어졌다. 이탈리아 벨칸토 창법과는 완전히 다른 발성으로 가곡에 접근해야 함을 직시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한국 가곡을 필수로, 예술가곡을 두 곡이나 준결선에도 포함시킨 주최 측의 아이디어는 대단히 바람직하다.
프랑스 ‘멜로디’가 독일 ‘리트’만큼이나 많이 선곡된 점도 주목할 만했다. 아리아에서도 12곡이 프랑스 작곡가로부터 나왔다. 지난해 뮌헨 콩쿠르 2위에 빛나는 바리톤 유한승이 들고 나온 포레의 ‘어부의 노래’는 대단히 격조 높은 음색으로 객석을 촉촉이 적셨다. 유한승은 콩쿠르에서 지향해야 할 목소리 자랑보다는 음악성이 한껏 돋보이는 레퍼토리로 속 깊은 청중의 마음을 움직였다. ‘탄호이저’에 나오는 볼프람의 아리아를 이토록 은은하게 부르는 가수가 또 있을까! 강렬한 태양보다는 처연한 달빛 같은 노래였다. 하지만 그는 결선에서 다소 가볍고 오케스트라에 음성이 묻히는 로시니의 ‘나는 이 거리의 팔방미인’을 골라 제 실력을 검증받지 못했다. 음악과 테크닉이 동시에 드러나는 대곡을 노래했으면 결과는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여성 가수의 약세 속에 소프라노 양재경은 두고두고 여운을 남겼다. 거의 완벽한 콜로라투라 기교와 스케일 처리를 앞세운 그녀는 2차 예선까지 내내 화려함으로 질주했다. 과식하면 체하는 법, 비슷비슷한 느낌의 곡보다는 깊은 음악성이 내재된 노래를 골고루 섞었다면 심사위원들의 귀뿐만 아니라 가슴까지 움직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결선까지 총 열 곡을 불러야 하는 장거리 레이스에서 선곡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한국 여성 도전자 가운데 홀로 준결선까지 올라간 김지은은 다채로운 레퍼토리에 대한 연구를 게을리하지 않은 점을 높이 샀을 것이다.

결선, 치열한 축제
서울국제음악콩쿠르의 마지막 결선이 열린 4월 27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긴장감은 온데간데없고 축제의 피날레로 치닫는 기분이다. 모두가 밝게 떠들고 웃었다. 먼저 바리톤 윤기훈이 부르는 베르디의 ‘운명의 힘’ 가운데 ‘이 속에 내 운명이’로 분위기는 달아올랐다. 마르코 발데리가 지휘하는 수원시립교향악단도 한껏 들떠 있었다. 심사위원이 지정해준 곡을 단 하루 만에 완성해야 하는 전반부, 파이널리스트들은 어떠한 곡도 금세 자신의 것으로 소화해낼 수 있는 능력을 이미 갖추었다. 그러나 아무래도 스스로가 최종 무대를 위해 오래도록 절치부심한 후반부 순서는 그야말로 불꽃 튀는 접전으로 마감되었다. 결선 진출자 가운데 최연소인 테너 김범진이 나왔다. 1차 예선 때 토스티의 ‘새벽은 빛 그림자에 갈라져’를 부르던 앳된 소년 이미지의 그가 진솔하게 고백하는 사랑 노래가 아직도 생생했다. 푸치니의 ‘그대의 찬 손’, 바람둥이 로돌포가 아니라 첫사랑의 두근두근한 감정이 배어나오는 느낌. 김범진의 목소리는 살포시 떨렸지만 미미가 들고 있는 촛불만큼이나 적적하게 타올랐다. 세상의 때가 묻지 않은 고순도의 질감이 오케스트라를 뚫고 드넓은 객석으로 꽉 차게 파고들었다. 성악 테크닉의 꽃 ‘메차보체’는 물론이요, 기막힌 ‘메사디보체’는 감정의 변화를 직설적으로 풀어놓았다. 일찌감치 예술학교로 들어가 기술 연마에만 몰입한 ‘아이돌’이 아니었다. 인문계 고등학교 3학년에서야 성악으로 전공을 튼 그의 내공은 스물세 살의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음악성이 기교를 앞지르며 기어이 청중의 마음을 요동치게 하고야 말았다. 그리고 마침내 1위의 영광을 거머쥐었다.
2위를 차지한 바리톤 김주택은 이제 많이도 무르익은 형국이다. 무대를 휘휘 저으며 압도하는 그의 매너는 콩쿠르 도전자이기보다는 기성 가수의 자연스러운 공연일 뿐이었다. 향후 대형가수로 거듭날 그의 행보가 벌써부터 점쳐졌다. 테너 김정훈이 들려준 마스네의 ‘르 시드’ 3막의 명곡 ‘전능하신 하나님이시여’는 그대로 간절한 기도로 화했다. 옥구슬을 굴리듯 아름답게 구사하는 프랑스어 발음을 바탕으로 그의 이마 정면에서 뿜어져나오는 고품격 목소리는 금실과 은실을 교대로 꼬아놓은 듯 착착 감겼다. 4위를 수상한 테너 이명현의 ‘그대의 찬 손’은 더 성숙한 로돌포의 모습을 보여주며 김범진과 차별화했다.
바이로이트축제 총감독인 에바 바그너 파스키에가 건강상의 문제로 심사위원으로 끝내 오지 못한 것은 그녀의 명성 때문이 아니라 자랑스러운 한국 성악가의 진면목을 보여주지 못한 점으로 아쉬움으로 남았다. 바리톤 최현수, 테너 프란시스코 아라이사 같은 국내외를 대표하는 성악가뿐 아니라, 유럽과 미국을 대표하는 오페라극장 디렉터들을 심사위원으로 위촉한 것은 뜻밖이었다. 향후 이 콩쿠르를 통해 얼굴을 알린 젊은 가수들이 곧바로 최고의 음악 페스티벌과 극장 무대에 설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음을 의미한다. 아홉 돌을 맞은 서울국제음악콩쿠르는 순항 중이다. 그리고 경연은 무엇보다 재미있다.

글 유혁준(음악 칼럼니스트) 사진 서울국제음악콩쿠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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