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셔/부다페스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의 바그너 하이라이트

바그너의 해, 한 장의 CD를 골라야 한다면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3년 6월 1일 12:00 오전

올해 바그너 탄생 200주년을 맞아 바그너 음악에 대한 관심이 어느 해보다 높다. 국내외 오페라 극장에서 바그너의 작품을 앞 다투어 상연하는 것은 매우 당연한 일이다. 이에 반해 콘서트 무대에서는 바그너 열풍을 느끼기가 쉽지 않다. 아쉽지만 바그너가 교향곡이나 협주곡은 단 한 곡도 남기지 않았다는 엄연한 사실 때문이다. 하지만 오페라팬이 아니라고 해서 크게 실망할 필요는 없다. 콘체르탄테 무대를 위해 편곡한 다이제스트판 ‘니벨룽의 반지’가 아니더라도 심포니 콘서트에서도 얼마든지 바그너 특집 프로그램을 꾸밀 수 있다. 이반 피셔가 지휘하는 부다페스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가 상주 무대인 부다페스트 예술궁전 내 버르토크 콘서트홀에서 녹음한 이 음반에 수록된 작품들은 하루 저녁 바그너 콘서트 프로그램으로 손색이 없다. 바그너 200주년을 맞는 해에 ‘반지’ 4부작 DVD를 감상하는 것도 좋겠지만 한 장의 CD를 골라야 한다면, 복잡한 스토리에 함몰되기보다 그냥 바그너의 풍부한 오케스트라 사운드를 즐기고 싶다면 이 음반이 고마운 대안이 될 것 같다. 실황 연주는 아니지만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남부럽지 않은 음향을 자랑하는 무대이니만큼 스튜디오 녹음보다 훨씬 낫다. 설계 당시부터 콘서트홀 내에 음향 조정실을 설치해 쉽게 녹음할 수 있도록 했다. 객석을 비워둔 상태에서 녹음하기 때문에 불필요한 잔향 시간이 문제인데 버르토크 콘서트홀에서는 양쪽 벽면에 잔향실을 설치해 84개의 대형 전동 도어를 여닫으면서 잔향 시간을 최대 4초까지 조절할 수 있다. 레코딩 스튜디오로 사용할 때는 모든 전동 도어를 닫고 흡음 커튼과 흡음 배너까지 사용해 잔향 시간을 최대한 줄인다. 실제로 이 음반을 들어보면 스튜디오 녹음과 실황 녹음의 장점만 모아놓은 것 같다. 특정 악기가 다른 악기를 압도하지 않고 악기군 간의 밸런스도 뛰어나 전체적으로 탄탄하고 안정감 있는 음향 건축물을 빚어낸다.
‘지크프리트의 목가’와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어 서곡’은 평소에도 자주 연주되는 곡이다. 이반 피셔는 두 곡에서 바그너 특유의 과장된 몸짓보다는 말러에 가까운 분위기를 연출한다. 디테일에 충실한 명료도를 최대한 살리는 방향으로 음악을 이끌어간다. ‘니벨룽의 반지’ 4부작 중 마지막 편에 해당하는 ‘신들의 황혼’ 중 하이라이트에서도 윤택하지만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연주를 들려준다.
바그너는 ‘니벨룽의 반지’ 4부작을 바이로이트 축제 극장 무대를 염두에 두고 썼다. 현악기보다 관악기와 타악기가 오케스트라 피트의 더 낮은 곳에 앉도록 해 마음껏 나팔을 불어도 무대나 객석에서는 부드러운 벨벳 사운드처럼 들리도록 했다. 따라서 ‘반지’ 하이라이트를 콘서트 무대에서 연주한다면 긴 잔향 시간도 문제이지만 독창자와 오케스트라 음향 사이의 균형이 깨어지기 쉽다. 바로 이 대목에서 부다페스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가 이 음반에서 실황 녹음을 고집하지 않은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실황 연주 녹음이라면 오케스트라 음향을 최대한 줄이든지 아니면 소프라노가 최대한 목청껏 불러야 해서 연주의 질을 보장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반 피셔가 부다페스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와 호흡을 맞춰온 것도 벌써 30년째다. 첫 곡을 들으면 금세 반 피셔가 지휘한 음반임을 알 수 있을 만큼 그의 꼼꼼하면서도 패기 넘치는 독특한 해석력이 곳곳에서 위력을 발휘한다.

글 이장직 객원전문기자(lully@)


▲ 페트라 랑(소프라노)/이반 피셔(지휘)/부다페스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
Channel Classics CCS SA 32713 (DSD, Hybrid-SAC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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