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성원의 트리오 오원

서로 다른 존재들이 하나 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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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3년 10월 1일 12:00 오전


▲ ⓒTallWall Media

파리 외곽의 소(Sceaux) 공원. 첼리스트 양성원ㆍ피아니스트 에마뉘엘 스트로세ㆍ바이올리니스트 올리비에 샤를리에로 구성된 트리오 오원은 베토벤 피아노 트리오 ‘대공’, 슈베르트 피아노 트리오 2번으로 청중을 매료시켰다. 숨 막히는 더위가 가시지 않은 여름 오후였으나 혹시라도 그들이 빚어내는 환상적인 앙상블에 방해가 될까, 그 누구도 부채질을 하지 않았다. 모두가 그렇게 숨죽인 채 지적이고 명료한 첼로, 이탈리아의 햇살 같은 바이올린, 단단한 피아노를 따라 베토벤과 슈베르트의 선율 속에서 한참을 머물렀다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이 연주에 앞서 트리오 오원을 만났다.

피아노 트리오와 현악 4중주단이 셀 수 없이 많은 유럽에서 이미 솔리스트로서 세계적인 커리어를 쌓은 세 사람이 모인 건 아주 특별한 일이다.

양성원 5년 전 슈베르트 트리오 프로젝트를 위해 세 사람이 만나게 됐다. 물론 우리 셋 다 솔리스트로서 꽉 찬 일정을 가지고 있지만, 실내악 작업은 우리들의 음악을 더욱 깊게 해준다. 오케스트라와의 협연 혹은 리사이틀에 매달린다면 상당 부분의 레퍼토리를 놓치게 된다. 성향이 전혀 다른 세 사람이 만나 같은 내용이 담긴 악보를 통해 보는 ‘음악의 모양’이 조금씩 다르다는 걸 알게 됐다. 각각 음악을 바라보는 시선 역시 폭넓어졌다.
올리비에 단지 음악만이 아니라 인간적으로도 그렇다. 무대 말고도 준비를 위해 다른 음악가들과 만나고 소통하면서 한 인간을 더 온전히 알게 된다. 시간을 두고 소통을 위해 노력한다면 이해하지 못할 것이 없다. 다만 삶 속에서 모두와 시간을 두고 소통할 수 없는 것이 우리의 비극일 뿐. 타인의 시선을 면밀히 관찰하며 그가 어떻게 형태를 구성하고, 균형을 찾아가고, 음악의 색채를 입혀가는지 따라가다 보면 언제나 깨달음이 온다. 세 사람이 지금까지 쌓아온 각각의 예민함, 경험, 시각을 단 한 곡에 쏟아넣어 같은 지점을 향해 함께 여행을 떠나는 일에 비유할 수 있다.
양성원 우선 구조를 두고 이야기를 나누고, 이어서 화성적 진행, 순환하는 이미지, 음정, 템포와 같은 디테일들을 정한다. 연주란 결국 무대를 통해 완성되기 때문에 벌써 5년간의 경험을 통해 음악가로서 점점 깊이를 더한다고 할까.
올리비에 나무의 가지가 뻗어나가고 잎이 무성해지는 것처럼 우리도 성장한다.
양성원 나무에 비유한다면 가지가 뻗어나갈 뿐만 아니라 뿌리도 역시 깊어지는 작업이다.

담백하고 지적인, 과장 없이 순수한 음색의 첼로에 비해, 바이올린이 유난히 화려하다. 쨍 하게 쏟아지는 햇살을 연상시킬 만큼 강렬하게 분위기를 주도한다. 정반대의 지점에 존재하는 듯하다.

올리비에 베이스와 중간음, 혹은 화려한 고음 등이 악기가 가진 특성이기에 흔히 우리에게 주어지는 역할이 이미 정해진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전형성에 머무르는 데 그치는 게 아니라, 서로의 방향으로 더 멀리 나아가는 것이 실내악의 묘미이다. 연주 도중에 이런 부분들이 꽤 자주 있다. 첼로가 전면에 나서서 멜로디를 이끌 때 내가 속삭이듯 뒷받침을 해주거나 혹은 피아노가 압도적으로 존재하는 순간도 있다. 서로의 역할이 바뀌는 부분에서 우리는 더 많은 음악적 가능성과 마주한다.
에마뉘엘 젊어서 커리어를 시작하자마자, 솔리스트로서 나 스스로는 무대가 주는 긴장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런데 누군가와 함께라면 훨씬 수월했다. 무대에서 혼자가 아니니 두려움도 긴장도 절반 이상으로 줄어든다. 게다가 청중과 음악을 공유하기 이전에 이미 동료 음악가들과 함께 음악을 나눌 수 있다는 점에서, 실내악은 청중에 닿기 전, 연습할 때부터 이미 연주와 향유(app-reciation)가 동시에 이뤄지는 특별한 장르이다. 다른 악기를 가까이에서 지켜보며 이해하게 되고, 동시에 나의 피아니즘 역시 풍성해진다.
양성원 올리비에와 나는 벌써 30년도 더 전에 장 위보(Jean Hubeau)의 실내악 수업에서 조교수와 학생으로 만났다. 그때는 이렇게 같이 연주하는 사이가 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올리비에는 박사과정을 마친 조교수였고 나는 겨우 열다섯 살 소년이었다.
올리비에 그때는 무슈(Monsieur) 대신 메트르(Maitre, 영어로 Master, 프랑스에서 교수ㆍ박사ㆍ의사ㆍ변호사ㆍ판사 등에 쓰는 표현)라는 호칭을 써야 했던 시절이었다(웃음).

페스티벌 오원에서 다도ㆍ한국화ㆍ도자기 등 다양한 한국 전통문화를 서양음악과 같이 소개하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올리비에 만약 인류에게 자유가 주어진다면 무엇을 꿈꿀까. 매일 돈을 벌러 직장으로 나갈 필요가 없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가 아닌 원시의 어느 날을 가정해보자. 맛있는 음식을 먹고, 향기로운 음료와 술을 마시고 자연 속에서 흙, 풀, 내리쬐는 햇살 아래 음악을 들으면서 시간을 보낼 것 같다. 꼭 한국의 전통문화라는 틀에 연연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앞으로 흥미로운 장르가 있다면 그것이 무엇이든 함께 소개하고 싶다. 올해는 부르데지에르 성에서 첫 연주를 하면서, 새로운 장소에서 새로운 시도를 성공적으로 해냈다는 점에 의미를 둔다. 오원 장승업의 그림과 같은 시기에 브람스의 트리오가 작곡되었다. 오원의 예술적 감수성, 천재성을 우리가 다시 환기시킬 수 있다면 연주라는 단순한 행위로 다양한 차원을 창조해내는 우주적인 제스처가 된다. 이 얼마나 의미 있는 일인가.
양성원 이번 페스티벌 오원에서 베토벤 피아노 트리오 전곡 연주를 이틀에 걸쳐 해냈다. 녹음을 앞두고 아주 좋은 경험이었다. 음악가들은 청각과 촉각을 남들보다 훨씬 많이 사용한다. 특히 현악기를 다루다 보면 거의 혹사시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 탓에 음악을 하지 않는 동안에는 나머지 감각들 역시 충족시키려고 애쓴다. 연주를 위해 여행을 많이 가는데 연주가 끝나고 시간이 날 때면 무언가를 보거나 좋은 음식을 찾으러 다닌다. 같은 이유로 사진이나 음식에도 관심이 많다. 양질의 우수한 한국 문화가 덜 알려져 있는 것이 늘 안타까웠는데 이제 음악과 함께 세계에 소개하는 일을 할 수 있어서 뿌듯하다. 물론 어려움이 많지만 앞으로 더 다양하고 풍성하게 페스티벌을 지속적으로 운영해나갈 것이다. 트리오에만 국한하는 것이 아니라 객원 연주자들과 함께 더 폭넓은 레퍼토리를 시도할 수도 있고, 한국 문화 외에 다양한 콘텐츠와의 결합을 시도할 수도 있을 것이다.
에마뉘엘 음악가라면 모름지기 열려 있어야 한다. 무성영화 시절 어두운 극장에서 반주를 맡았던 피아니스트들은 이류 음악가인가? 그렇지 않다. 클래식 음악의 범주를 큰 도시의 공연장과 혹은 화려한 페스티벌이나 한껏 차려 입은 관객들로만 한정 짓는다면 큰 오산이다. 흥미로운 콘텐츠로 관객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며 음악을 들을 수 있는 기회가 된다면 음식, 차, 미술 그게 무엇이든 언제나 대찬성이다.

글 김나희(파리 통신원) 사진 유니버설 뮤직

10월 음반 발매에 앞서 오원 트리오는 베토벤 피아노 트리오 사이클을 선보인다. 10월 17ㆍ18일 예술의전당 IBK챔버홀. 17일 베토벤 피아노 트리오 1번ㆍ3번ㆍ4번ㆍ5번, 18일 베토벤 피아노 트리오 2번ㆍ6번ㆍ7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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