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경화 1998년 도쿄 산토리홀 실황

15년 만에 돌아온 전설의 기록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3년 10월 1일 12:00 오전

지난 6월 정경화는 일본 도쿄 산토리홀에서 오랜만에 리사이틀을 열었다. 2010년부터 그녀의 듀오 파트너십을 굳건히 지켜주고 있는 케빈 커너와 함께였다. ‘바이올린 여제(女帝)’의 귀환은 열광적이었고 2,006석의 객석은 매진되었다. 주최 측은 공연만 하기에는 왠지 허전했다. 음반 이벤트를 하고 싶은데 2001년에 발매된 빈 필과의 브람스 협주곡이 마지막 레코딩이라 늦은 감이 있었다. 그 결과물은 1998년 4월 26일과 28일에 걸쳐 산토리홀에서 라이브로 녹음된 음원을 편집 하나 거치지 않고 그야말로 ‘맨 얼굴’로 내놓은 넉 장의 음반이었다. 데카와 EMI를 통틀어 총 31장의 공식 음반을 제외하면 정경화가 타 레이블로 내놓은 것은 테스터먼트에서 나온 줄리니 지휘, 베를린 필과 함께 한 차이콥스키의 협주곡뿐이다. 희귀성을 떠나 안의 내용물을 들여다보면 어안이 벙벙해진다. 바흐·슈베르트·라벨·스트라빈스키에 이르는, 그동안 정규 음반에서 볼 수 없었던 독주 레퍼토리의 걸작들이 즐비하다. 당연히 일본 공연 당시 반응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그 덕에 정경화의 조국에서도 이번에 기적적으로 15년 전의 소중한 기록을 접할 수 있게 되었다.
얼마 전 정경화는 전화 통화에서 피아노가 좀 도드라진 녹음이긴 하지만 자신은 특히 첫째 날 공연이 마음에 든다고 털어놓았다. 4월 26일 슈베르트와 슈만, 그리고 무려 다섯 곡의 앙코르로 무장한 로맨틱한 여정이다. 특히 슈베르트의 환상곡 C장조는 가장 아끼는 곡이라며 악기로 노래할 수 있음을 행복해 했다. 정경화의 슈베르트라! 슈베르트가 남긴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2중주 중 마지막 작품인 이 곡은 소나타가 아니라 환상곡이다. 낮게 요동하는 피아노의 트레몰로는 슈베르트 후기 소나타의 정수이자 핵심이다. 이타마르 골란의 피아노가 두방망이질하는 불안한 작곡가의 맥박을 두드리며 먼저 시작한다. 곧바로 이어지는 정경화의 바이올린은 의외로 담담하다. 알레그레토 이전, 아찔하게 지속되는 고음의 지속은 현기증을 유발할 만큼 완벽하다. 드디어 안단티노 부분, 먼저 슈베르트가 뤼케르트의 시에 붙인 ‘입맞춤을 보내리라’의 선율이 피아노로 담담하게 들려온다. 이윽고 정경화의 바이올린이 극히 조심스럽게 유리잔처럼 예민했던 슈베르트의 가슴을 다독인다. 하지만 듣는 이는 반대로 가슴이 미어짐을 느낄 것이다. 2변주에 나타나는 피치카토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야성미를 발산한다. 프레스토의 코다가 끝나면 28분 만에 환상에서 현실로 돌아온다. 정경화가 이토록 노래를 잘 부를 줄이야.
슈만의 소나타 2번은 또 어떤가? 19세기 낭만주의 시대를 가장 잘 대변해주는 슈만의 음악은 오히려 슈베르트보다는 가라앉아 있다. 정경화의 트레이드마크인 긴장감은 역시나 탁월하다. 코랄 ‘깊은 괴로움의 연못 안에서 그대를 부른다’의 선율을 더블스토핑으로 읊는 정경화는 지천명에 도달한 인생의 깊이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듣다 보면 어느새 눈시울이 촉촉이 젖어온다. 앙코르 퍼레이드의 문을 여는 바흐의 ‘아리아’는 그 연장선상에 있다. 이쯤 되면 전 세계 콘서트홀에 흩어져 있는 정경화의 공연 실황을 모조리 끄집어내도 되지 않을까? 12년 만의 새 음반은 올가을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음악선물이 될 듯하다.

글 유혁준(음악 칼럼니스트)


▲ 정경화(바이올린)/이타마르 골란(피아노)
King International KKC-4009/10 (2CD, DD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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