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달레나 코제나②

어머니와 딸의 노래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3년 11월 1일 12:00 오전

막달레나 코제나는 1973년 5월 26일 브르노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아버지는 수학자였고 어머니는 생물학자였다. 80만 인구를 품고 있는 체코 제2의 도시 브르노는 선사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역사를 간직한 고도다. 수도 프라하와 브르노의 관계는 마치 러시아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보이지 않는 경쟁 구도에 비견된다. 프라하가 위치한 서쪽 보헤미아와는 별개로 성장해온 모라비아 지방의 중심지인 브르노 사람들은 그래서 자존심이 강하다. ‘언덕마을’이란 의미의 켈트족 언어인 ‘브린(brynn)’에서 유래했듯, 브르노 언덕의 최고점인 슈필베르크 성에서 바라다보는 시가지는 프라하 성에서 바라보는 프라하 구시가 ‘말라 스트라나’만큼이나 아름답고 고풍스럽다.
음악적인 면에서도 그렇다. 프라하를 중심으로 살았던 드보르자크의 후배 야나체크는 브르노가 고향이다. 근래 들어 리얼리즘 문학에서 텍스트를 취한 야나체크의 오페라 분야가 높이 평가받고 있는데, “모라비아의 무소륵스키”로 불리는 그는 드보르자크와 더불어 체코를 대표하는 작곡가다. 브르노 시민들은 야나체크를 기리기 위해 1947년 ‘야나체크 음악, 공연예술 아카데미’를 개교했다. 이 학교는 500명의 학생이 다니고 있는, 체코를 대표하는 예술교육 기관이다. 이보다 앞서 야나체크에 의해 1919년에 설립된 브르노 음악원은 프라하 음악원과 쌍벽을 이루며 경쟁한다. 불과 27세에 브르노에 오르간 학교를 열 정도로 고향의 음악교육에 헌신했던 야나체크의 집념과 노력 덕에 브르노는 세계 수준의 음악원을 가질 수 있게 된 것이다. 코제나가 브르노 음악원에서 공부한 것은 필연이었다.
이뿐이 아니었다. 코제나는 브르노의 최고 수준의 공연장을 다니며 어릴 때부터 마음껏 예술의 향기를 흡입했다. 1767년 체코에서 가장 먼저 문을 연 레두타 극장은 그해 모차르트와 누나 나네를이 콘서트를 연 것으로도 유명하다. 오페라·발레·콘서트는 브르노 국립극장이 담당한다. 1882년에 개관한 마헨 극장과 1965년에 추가로 들어선 야나체크 극장이 국립극장의 두 중심축이다. 여기에 브르노 시립극장에서는 매일같이 드라마와 뮤지컬이 막을 올린다. 공연장 외에도 소규모 마을축제에서 매일같이 들려오는, 모라비아와 보헤미아의 전통을 온전히 간직한 민속 선율과 민요는 어린 코제나에게 자연스럽게 음악적 자양분이 되었다.
코제나의 아버지는 그녀가 열한 살 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녀의 어머니는 홀로 억척스럽게 코제나와 여동생을 키웠다. 어머니는 코제나가 유일하게 기댈 수 있는 전부였다.
“아기 때부터 어머니가 들려주던 노래에 익숙했습니다. 어머니는 전공한 성악가는 아니었어요. 하지만 노래를 사랑했고, 아주 많은 노래를 알고 있었죠. 아이들에게 노래를 불러주는 특별한 전통은 아마 우리나라가 서유럽 국가보다 더 강할 거예요. 모라비아의 모든 가정에서 옛날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풍습과도 같은 겁니다.”
코제나의 말처럼 그녀의 음악적인 천재는 어머니로부터 비롯된 것임에 틀림없다. 야나체크는 모라비아 지방의 민요와 동요를 수집해 누구나 따라 부를 수 있도록 아주 쉽게 편곡했다. 그건 바로 코제나의 어머니가 자장가로 들려주던 노래들이었다. 2007년 3월 코제나는 뮌헨에서 ‘어머니가 가르쳐준 노래’라는 타이틀의 음반을 녹음했다. 실제로 100퍼센트 그녀의 어머니가 가르쳐준 노래였다. 무려 34곡의 체코 민요를 담고 있는 이 음반의 첫 곡은 놀랍게도 코제나의 어머니가 자장가를 부르는 듯 무반주로 흘러나오는 ‘내가 딸기밭에 있었다면’으로 시작한다. 코제나의 묵직한 저음은 험한 세상살이를 감내한 어머니의 담담한 삶의 고백이다.
“우리의 작은 벤치가 부서졌네. 거기서 나는 사랑하는 사람과 앉아있었는데….” 이윽고 야나체크가 엮은 모라비아 민요집 가운데 서른일곱 번째 노래 ‘작은 벤치’가 말콤 마르티누의 피아노를 타고 들려온다. 첫 곡에서의 저음은 사라지고 코제나 특유의 ‘샤우팅’ 창법이 아련한 고향의 노스탤지어를 강하게 자극한다. 야나체크의 ‘작은 사과’와 ‘음악가들’이 지나가면 드디어 드보르자크의 ‘어머니가 가르쳐준 노래’가 등장한다. 체코인의 ‘아리랑’ 같은 이 노래는 우리에게도 널리 애창되는 명곡이다. 페트르 에벤의 류트 송은 기타 반주로 진행하는데 극히 이국적이다. 드보르자크의 ‘모라비아 듀엣’은 도로테아 뢰슈만이 함께 참여해 수준을 높여주고, 역시 체코 작곡가 마르티누의 모라비아 민요에 붙인 ‘두 페이지 노래’ 등, 폴란드와 체코, 독일에 걸쳐 있는 실레지아 지방의 민요 두 곡까지 마치면 어느새 우리는 코제나의 고향 브르노로 날아가 있다. DG 477 6665

어머니가 실제 가르쳐준 노래로 채운 대표반
이렇듯 코제나는 태어날 때부터 노래와 만났다. 그리고 노래하면서 어린 시절을 다 보냈다. 6세에 이미 명문 브르노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산하 어린이 합창단 ‘칸틸레나’에 입단해 주말에도 노래 연습에 매진했다. 그러나 어린 코제나는 자신의 노래가 성악가가 되기에는 부족하다고 느꼈다. 그리고 그녀는 피아노가 원래부터 더 좋았다. 철이 들면서 코제나는 피아노에 ‘올인’했다. 1987년 14세의 코제나는 브르노 음악원 입학시험 하루 전날 체육 시간에 손을 다치고 말았다. 운명의 장난이랄까. 손을 쓸 수 없는 그녀는 급히 성악으로 바꿔 실기시험을 봤고 합격했다. 성악과 네바 메고바 교수의 제자로 들어간 코제나는 단연 알토로 두각을 나타냈다. 메고바의 교수법은 벨칸토 창법으로 소리를 아름답게 만드는 것보다는 노래의 가사를 전달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이런 점은 코제나가 향후 바로크 음악을 공부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가사에서 우러나오는 신격과 인격의 조화가 그녀의 노래에서 기막히게 어우러지기 때문이다. 이때 코제나는 류트 연주자를 우연히 만나 돈을 벌기 위해 함께 공연했지만 결과적으로 바로크 음악에 대한 해석을 진일보할 수 있었다.
코제나는 운 좋게도 브르노 음악원에서 이르지 페샤 교수에게 피아노도 배울 수 있었다. 피아노에 대한 애정은 각별하다. 처음 그녀 스스로 돈을 벌었을 때 제일 먼저 침대를 사고 그 다음 피아노를 새로 장만했을 정도다. 자신의 피아노 테크닉은 완전히 사라졌다고 엄살하는 그녀지만 어느 곡이든 스스로 반주하며 노래할 수 있는 실력을 아직도 갖추고 있다.
브르노 음악원에서 기본기를 튼실하게 다진 코제나는 1991년, 공산정권 치하에서 한 나라였던 슬로바키아의 수도 브라티슬라바의 공연예술대학으로 옮긴다. 슬로바키아가 자랑하는 세계적 메조소프라노 에바 블라호바를 사사하기 위함이었다. 코제나는 블라호바에게서 성악의 모든 것을 전수받았다. 그리고 졸업하던 해인 1995년 잘츠부르크에서 열린 제6회 모차르트 국제 콩쿠르에서 우승하며 유럽음악계에 자신을 알리기에 이른다.
브라티슬라바 시절, 코제나는 이념의 갈등을 겪으며 한층 성숙해졌다. 합스부르크 제국 때부터 피지배 국가의 민족으로 아픔을 가지고 있었기에 그 고통은 더했다. “내 조부모는 독일을 싫어했고 부모님은 러시아를 미워했어요. 충분히 이해가 가지만 내가 살고 있는 세대는 이런 두려움을 가지고 있지 않아요”라고 힘들었던 지난날을 회상하지만 코제나는 공산주의가 힘을 잃어가던 1990년, 벨벳혁명을 주도하던 같은 학교 학생 사이에서 엄청난 갈등을 경험했다. 아직 10대였던 그녀에게 체제의 급격한 변화는 공포 그 자체였다. 어머니는 가족이 모두 감옥에 갈지도 모르니 학교에서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주의를 주었다. 하지만 이런 모든 일들이 코제나의 음악에 결국 좋은 영향을 미쳤다. 특히 쇼스타코비치를 그녀의 주 레퍼토리에 추가하는 것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결국 이 ‘철의 장막’이 걷히고 코제나의 앞길은 탄탄대로였던 셈이다.
1996년부터 1997년까지 코제나는 빈 폴크스오퍼의 전속가수로 진출해 모차르트의 오페라 ‘티토 왕의 자비’의 안니오로 데뷔했다. 2년 뒤 벨기에 플랑드르 오페라에서 마르크 민코프스키와 운명적인 조우를 하게 된다. ‘이도메네오’의 이다멘테로 출연하며 기나긴 인연의 시작을 알린 것이다. 음반 작업에서 민코프스키와의 첫 결과물은 1999년 3월 글루크의 오페라 ‘아르미데’였다. 이때 첫 번째 남편 뱅상 르 텍시에가 같이 참여하고 있는 점이 이채롭다. DG Archiv 459 616-2,
2CD
그해 9월에는 헨델의 교회음악 작품집이 역시 민코프스키와 루브르 음악가들의 반주로 출시되었다. 민코프스키 특유의 몰아치는 듯 강렬한 오케스트라와 코제나와의 절묘한 한판 승부가 드라마틱하게 펼쳐진다. DG Archiv 459 627-2
이다멘테는 코제나에게 두 번이나 인생을 바꾸게 한 배역이었다. 음악적으로는 민코프스키라는 바로크 음악의 거장을 만나게 했으며, 개인적으로는 2003년 6월 글라인드본 축제에서 사이먼 래틀과 첫 대면을 한 오페라도 바로 ‘이도메네오’였던 것이다. 2006년 모차르트 탄생 250주년을 기념하는 잘츠부르크 여름축제에서 이다멘테 역은 역시 코제나에게 돌아갔다. 라몬 바르가스가 크레타의 왕 이도메네오를 노래하고 그의 아들 이다멘테를 부르는 코제나는 엄청난 극적 몰입을 선보이며 최고의 열연을 보여주었다. 우르젤과 카를 에른스트 헤르만 형제가 연출한 무대에 자신을 그대로 던져넣어 ‘피가로의 결혼’을 필두로 하는 모차르트의 희극 오페라에 가려진 이 오페라 세리에의 진가를 실력으로 증명하고 있다. 로저 노링턴이 잘츠부르크 카메라타를 지휘한다. Decca 074 3169, 2DVD
뉴 밀레니엄의 해인 2000년은 한층 더 도약한다. 에든버러 페스티벌에 데뷔하고 네덜란드 오페라에서 ‘줄리오 체사레’, 라이프치히에서는 ‘펠레아스와 멜리장드’로 엑상프로방스 페스티벌과 바덴바덴 페스티벌에서는 ‘피가로의 결혼’의 케루비노로 분해 맹활약한다. 모차르트에 천착한 코제나의 진면목은 2001년 9월 프라하 루돌피눔 드보르자크홀에서 녹음한 ‘아름다운 상상’ 앨범에서 찾아볼 수 있다. ‘티토 왕의 자비’에서 세스토가 부르는 ‘내 사랑, 나는 간다’에서 코제나는 나치와 2차 대전의 희생양으로 왜곡돼 희화화된 모차르트가 아니라 혁명가 모차르트의 격정과 분노까지 표출하고 있다. 케루비노의 ‘사랑의 괴로움을 아는가’는 어쩌면 냉정하고 비정하기까지 하다. 모차르트뿐 아니다. 우리에겐 생소하지만 모차르트와 동시대를 살았던 체코 작곡가 므스티베첵의 오페라에도 생명을 불어넣어 모차르트만큼 친근하게 다가오게 하는 마력을 뿜는다. DG 479 0365
2002년 파리에서 민코프스키와 루브르의 음악가들 창단 20주년 공연에서 노래한 코제나는 마침내 아르농쿠르의 지휘봉 아래 잘츠부르크 축제에서 ‘돈 조반니’의 체를리나로 데뷔한다. 이듬해는 래틀과 사랑에 빠지면서 언론의 질타를 받지만 음악적으로는 승승장구했다. 9월 조국 프라하의 프라하 성에서 열린 콘서트에서 코제나는 프랑스 대사로부터 ‘예술 및 문학 기사 훈장’을 수여 받았다. 그 공연에는 코제나의 할아버지가 당시 87세의 고령임에도 객석에 앉아있었다. 그해 3월에 세상을 떠난 할머니는 어머니와 함께 코제나에게 가장 소중한 분이었다. 심장이 좋지 않은 할머니는 한 번도 공연을 볼 수 없었다. 그런 할머니 곁을 지켜야 했던 할아버지는 할머니가 하늘나라로 가고서야 손녀의 콘서트에 처음으로 왔던 것이다. 코제나에게도 할아버지에게도 감동적인 순간이었다. 공연이 끝나고 할아버지는 “막달레나! 너는 악마야”라고 말해 코제나를 한바탕 웃게 만들었다.
2004년 코제나는 그동안의 노력을 인정받아 그라모폰 어워드에서 ‘올해의 아티스트’를 수상하는 기염을 토했다. 2005년 래틀과의 사이에서 첫 아들 요나스를 출산한 그녀는 이듬해 3월 헨델의 오페라 아리아집을 녹음한다. 민코프스키와 작업한 일련의 헨델 녹음으로 이미 실력을 인정받은 터라 거칠 것이 없었다. 특히 마지막 곡 ‘울게 하소서’는 바로크 음악에 관한 한 최정상의 가수로 군림하게 된 코제나 음악의 결정체와도 같다. 멜리스마 처리와 절절히 토해내는 감정선은 소름을 돋게 하는 절창이다. 안드레아 마르콘이 지휘하는 베네치아 바로크 오케스트라의 고고한 울림도 오디오적인 쾌감을 느끼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 DG Archiv 477 8407
수백 년 동안 합스부르크의 지배를 받은 체코인들은 독일어를 유창하게 구사한다. 말러가 태어난 칼리슈테는 보헤미아 지방에 위치한다. 코제나에게 말러는 안성맞춤인 작곡가였다. 여기에 2008년 둘째 아들 밀로스가 태어나고, 그해 8월 래틀과 기나긴 동거를 끝내고 정식으로 결혼까지 해 ‘진짜 퍼스트 레이디’로 등극한 코제나는 정신적인 안정까지 겹쳐져 본격적으로 말러의 세계로 진입했다. 음반으로 듣는 그녀의 첫 말러 연주는 2009년 8월 루체른 페스티벌 실황 영상을 통해서다. 클라우디오 아바도가 지휘하는 루체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와 만난 코제나는 먼저 다섯 곡의 뤼케르트 가곡집으로 포문을 연다. 흰색 드레스를 입은 코제나는 여신과도 같다. 마지막 ‘나는 세상에서 잊히고’가 불릴 때 카메라는 객석의 한 청중이 눈시울을 적시는 장면을 담아낸다. 그리고 남편 래틀은 가장 열정적으로 박수를 보낸다. 이어 교향곡 4번의 4악장을 노래하는 코제나는 순백의 의상처럼 순진무구한 어린이의 세계를 읊는다. 근래 보기 드문 명연이 탄생하는 순간이다. 또한 음질과 음향 모두 100점 만점이다. EuroArts KMBD-006. 블루레이
루체른에서 ‘뿔피리 교향곡’을 먼저 노래했던 코제나는 2010년 2월 미국으로 건너간다. 고색창연한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의 세브란스홀에서 ‘어린이의 이상한 뿔피리’ 가곡 전곡을 바리톤 크리스티안 게르하허와 나눠 불렀다. 루체른과 다르게 짧게 자른 머리에 검은 의상을 두른 그녀에게 또 다른 결연함이 느껴진다. 두 번째 곡 ‘헛수고’에서 렌틀러 리듬을 타고 완벽한 딕션으로 노래하는 코제나에게 어느덧 거장의 여유로움마저 감지된다. ‘누가 이 노래를 지었나?’의 사랑스러움은 금새 ‘속세의 생활’에서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운다. 전곡 중에서 가장 긴 ‘트럼펫이 아름답게 울려 퍼지는 곳’에서 코제나의 호흡은 너무도 안정적이다. 얼마나 음악에 매진했는지 알게 해주는 대목이다. 말러 애호가라면 반드시 소장해야 할 영상물이다. Accentus Music ACC10231, 블루레이 2010년 10월 코제나는 드디어 남편이 지휘하는 베를린 필과 말러의 교향곡 2번 ‘부활’의 독창자로 나섰다. 4악장 ‘원광’에서 은은하게 퍼져가는 그녀의 음성은 천상의 음률과 동급이다. 래틀의 ‘부활’ 교향곡 녹음 가운데 어쩌면 가장 상위권에 포진시켜야 할 명반이다. EMI 50999 6 47363 2 7, 2CD
코제나의 가장 최근 음반은 2012년 5월에 발매된 ‘Love And Longing’이다. 래틀이 지휘하는 베를린 필하모닉과 드보르자크의 ‘성서의 노래’ Op.99와 라벨의 ‘셰에라자드’, 그리고 말러의 뤼케르트 가곡이 담겨 있다. 특히 뤼케르트 가곡집은 루체른 페스티벌 실황과 여러모로 비교된다. 2012년 1월 베를린 필하모니홀에서의 라이브다. 코제나 덕에 드보르자크의 가곡집을 베를린 필의 반주로 듣게 되는 것도 행운이다. DG 479 0065
에디타 그루베로바 이후 체코가 낳은 세계 최정상의 여가수로 자리매김한 코제나. 피아노를 칠 때는 무대에서 두려움이 엄습하지만, 노래를 부를 때면 청중과 자신 사이에 아무런 간극이 없이 하나로 소통한다는 그녀는 타고난 성악가임에 틀림없다. 코제나가 선택한 위험한 사랑은 결국 만개해 그녀의 음악에 더할 나위 없는 지원군이 되고 있다. 가족과 노래를 모두 쟁취한 코제나의 다음 행보는 어떤 것일까?

글 유혁준(음악 칼럼니스트) 사진 Esther Haase/D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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