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 프레옐의 청중을 사로잡은 임동혁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3년 12월 1일 12:00 오전

“처음 만난 열다섯 소년이었을 때부터 그는 이미 그런 연주를 했어요.” 임동혁에 대한 아르헤리치의 평가다. ‘그런 연주’는 과연 어떤 연주일까


▲ 사진 크레디아

지난 10월 20일과 22일, ‘아르헤리치와 친구들’의 일환으로 피아니스트 15명이 바흐의 모든 건반악기 협주곡을 연주하는 프로젝트가 파리에서 열렸다. 실황 DVD 제작, 이틀 후 본 공연이 이어졌다. 그곳에 임동혁이 있었다. 공연 이틀 전, 스위스에서 로잔 체임버 오케스트라와의 리허설을 마치고 파리에 도착한 임동혁은 피곤해보였다.
“저는 특히 무대 위 첫 곡에서 준비한 것만큼 실력 발휘를 못할 때가 종종 있어요. 연주를 시작하고 15분이 지나야 손이 좀 풀려서 손 컨트롤이 좀 나아지니까, 사람들이 연주 시작하고 15분 있다가 들어오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도 여러 번이에요. 이 협주곡들은 미처 15분이 되기도 전에 끝나버려요. 무대 리허설 시간이 부족해 불안하네요. 최근 유럽에서 연주 활동이 활발하지 않았던 터라 사람들은 저를 잊었을 수도 있고, 파리에 오랜만에 왔는데 인터넷 생중계에 DVD 제작까지 되는 연주라 부담이 됩니다. 리허설을 더 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독주회도 아니니까 주어진 시간이 짧아요. 다들 더 하고 싶어할 거예요. 워낙 유명한 사람들이라 각자 자신의 연주를 보여주기에도 바쁘겠지만, 솔직히 경쟁이 없을 수 없어요. 묘한 긴장감과 각자의 개성 때문에 빚어지는 불협음이 있죠. 오케스트라와 함께 피아니스트 서넛이서 같이 연주를 한다는 게 생각보다 쉽지 않은 작업이에요. 저도 실내악을 좋아하는데 다른 악기와 만나는 거랑은 달라요.”
10월 20일 일요일, DVD 촬영을 위해 연주회 당일과 같은 머리와 복장을 하고 올 것을 요구 받았다는 임동혁은 긴장된 얼굴이었다. 살 플레옐의 대관 사정으로 이틀간의 공연 내용을 하룻밤에 촬영해야 하는 빡빡한 일정이었다. 무대에 오른 임동혁은 모두 세 곡을 연주했다. 그가 솔로로 나선 건반악기를 위한 협주곡 BWV1058, 세 대의 건반악기를 위한 협주곡 BWV1064, 마르타 아르헤리치와 함께 한 네 대의 건반악기를 위한 BWV 1065를 연주하는 동안 모두 열다섯의 피아니스트들이 쉴새 없이 무대에 올랐다. 저녁 8시에 시작해 자정이 다 되어서야 겨우 끝난 촬영이었다. 그동안 단 한 번의 반복 없이 실제 연주처럼 마친 경우는 임동혁의 솔로 협주곡이 유일했다.
임동혁이 연주하는 동안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던 다른 피아니스트들은 놀란 얼굴로 스마트폰을 꺼내 그의 이름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솔로 연주가 끝나자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물론, 피아니스트들이 앉아있는 객석 곳곳에서 박수가 나왔다. 피아니스트 프랑크 브랄레는 “마르타 아르헤리치·릴리야 질베르시테인·니컬러스 앙겔리치와 함께 한다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는 연주인데, 이렇게 뛰어난 젊은 피아니스트를 새롭게 만나게 되어 기쁘다. 임동혁은 순간적으로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는 음색을 가지고 있다”며 놀라움을 표시했다. 또 다른 프랑스 피아니스트 미셸 달베르토는 “왜 그동안 임동혁의 연주를 들을 기회가 없었는지 모르겠다. 예전에 롱 티보 콩쿠르가 끝나고 ‘모든 것을 다 가진 한국인 소년이 모든 상을 휩쓸어 갔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기억이 이제야 난다. 가장 인상적인 연주였다”라며 소감을 밝혔다.
인터미션에서 만난 로잔 체임버 오케스트라의 악장 쥘라 스튈레는 “재능의 크기와 순간적으로 음악에 반응하는 예민한 영리함으로는 다른 피아니스트들과 비할 수가 없다.”며 필자에게 임동혁의 연주를 자주 들었는지 물어왔다.
임동혁에게 길고 긴 촬영을 마친 소감을 물었다. “리허설이랑 비슷한 정도로 한 것 같아요. 제가 가장 끔찍하게 싫어하는 건, 연주할 때 제가 아니라 제 손이 의지와는 다르게 멋대로 움직이는 거예요. 실황 영상이라고는 하지만 아무래도 상품인 만큼, 덧붙일 장면들을 다 촬영하고 짜깁기를 할 수밖에 없지만 그래도 진짜 연주처럼 하고 싶었어요. 다른 곡들은 저 혼자 하는 게 아니니까 제 맘대로 되는 게 아니지만 솔로 협주곡만큼은, 제가 너무 고지식한 걸지 몰라도 그래야 옳은 것 같아요.”


▲ 파리를 대표하는 콘서트홀 살 플레옐은 1,913명의 관객을 수용한다 ⓒJulien Mignot

동료 피아니스트들과 청중, 모두를 놀라게 한 임동혁의 바흐
10월 22일, 청중으로 발 디딜 틈 없는 살 플레옐, 두 번째로 무대에 등장한 임동혁은 BWV1058을 기세 좋게 펼쳐나갔다. 강렬하지만 균형 잡힌 스타카토에는 고민의 흔적이 엿보였다. 낭만 레퍼토리에 강점을 지닌 연주자로 인식되는 현실을 솔직히 인정하며 바흐가 주요 레퍼토리가 아니라고 했지만, 임동혁의 바흐는 그날 밤 눈부시게 빛났다. 자연스러운 프레이징을 통해 펼쳐지는 반짝이는 음표들에는 듣는 이를 꼼짝 못하게 무장해제 시키는 힘이 있었다. 세기를 뛰어넘는 바흐의 음악에 현대의 피아노로 빚어낼 수 있는 음향적 색채와 들어맞는 부분이 있다는 사실을 영리하게 간파한 임동혁은 느린 패시지에 과장 없는 멜랑콜리를 실었다. 청중은 그의 시적 상상력을 따라가며 안단테로 흘러가는 멜로디에 숨죽인 채 집중했다.
임동혁은 그날 밤 무대에 선 피아니스트들 중 가장 많은 색깔의 팔레트를 가진 화가처럼 보였다. 길지 않은 곡 안에 특유의 재기 발랄함과 눈부신 테크닉은 물론, 깊고 묵직한 소리와 아득한 시적인 서정까지 담아내며 청중을 완전히 사로잡았다. 인터미션 내내 필자의 주위에 앉아있던 사람들은 “피아노 앞에 앉았을 뿐인데 마치 다른 악기로 연주하는 것 같았다”라며 그의 이름을 정확히 어떻게 발음하는지를 물어왔다.
연주가 끝나고 만난 마르타 아르헤리치는 임동혁에 대해 이렇게 평했다. “누군가는 임동혁이 황금 손을 가졌다고도 말하지만, 나는 그 말이 그를 단지 뛰어난 테크닉을 가진 피아니스트로 한정 짓는다고 생각해요. 임동혁은 황금 손은 물론 그 이상을 가졌어요. 순간의 음악에 감정을 담아 전달하는 놀라운 능력을 갖췄으니까요. 청중 모두가 그 감정에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내가 그에게 반한 건 그가 실어 나르는 감정들이 유난히 내 심장을 치기 때문이에요. 그건 그냥 피아노를 잘 치는 것, 콘서트홀을 울리는 것과는 다른 거죠. 어떻게 그게 가능한지 모르겠지만 경이로울 뿐이에요. 처음 만났던 열다섯 소년이었을 때 이미 그런 연주를 했거든요.”
피아니스트 임동혁과 그날의 눈부신 바흐 협주곡을 표현하는 데 이보다 더 적절한 표현이 있을까. 그가 가진 것은 황금 손 이상의 재능이므로, 지금까지 임동혁이 우리에게 보여준 것들은 어쩌면 그 재능에 비해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필자가 만난 모든 사람들의 바람대로 그의 연주를 다시 파리에서 들을 수 있기를 바란다.

글 김나희(파리 통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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