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발레단 신임 예술감독 강수진 연대기

그 유명한 발끝, 고국에 닿기까지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4년 1월 1일 12:00 오전

발레리나 강수진이 2014년 2월부터 국립발레단을 맡는다. 다가올 걸음을 기대하며 바라본, 그녀의 토슈즈가 지금까지 이끌어온 길, 그 시간의 흔적

지난해 12월 18일, 강수진은 국립발레단 예술감독 내정자로서 잠시 귀국해 기자회견을 가졌다. 강수진은 “국립발레단만의 스타일을 갖도록 만드는 것”을 주된 목표로 꼽았다. “무용수들 하나하나가 반짝반짝 빛이 나면 설령 작품이 좋지 않다 하더라도 좋은 무대가 나온다”라는 게 그녀의 생각이었다. 기자들은 “어떤 이유로 이 시점에서 예술감독직을 수락했느냐”라고 물었지만, 강수진은 그저 ‘육감’일 뿐 별다른 이유를 대긴 어렵다고 말했다. 그래도 재차 예술감독직 수락의 계기과 포부에 대한 질문이 들어오자 강수진은 “‘이 사람이 내 남편이다’라는 확신이 생기듯, 인생에 몇 안 되는 확신이 육감으로 들 때가 있다”라고 말하며, “감독을 해야겠다는 느낌이 들어 일사천리로 일을 진행했기에 아무리 물어도 나도 잘 모른다”라고 답했다. 강수진은 국립발레단 예술감독직 수행에 영향을 최소화하는 선에서 2016년까지 현역 무용수로 활동할 예정이다. 국립발레단 신임 예술감독으로 차후 행보가 주목되는 가운데, 30년 넘는 시간 동안 무용수 강수진이 걸어온 발자취를 살펴보았다. 이것은 누구보다도 열정 가득한 몸짓으로 써내려온 그녀의 인생 기록이다.

1979
발레 입문

경희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리틀엔젤스예술단원으로 한국 무용을 한 강수진은 1979년 선화예중에 입학하면서 발레를 시작한다. “원래는 스튜어디스가 되고 싶었어요. 수업 시간에 선생님께서 발레하고 싶은 사람 손들어보라고 했는데, 발레를 좋아했기 때문에 무심코 손을 들었죠. 특별히 신체 조건이 좋은 것도 아니었는데, 아마 시기도 적절했고 선생님도 좋았기 때문인 것 같아요. 무엇보다도 제가 발레에 미칠 수 있었기 때문이고요.”

1982
사춘기 발레 소녀의 유학
모나코 왕립발레학교로 유학을 떠났다. 후에 어머니 구근모 씨는 벽에 걸린 강수진의 커다란 사진을 바라보며 회상에 잠겼던 때를 단행본 ‘모녀지정’을 통해 이야기했다. “난 고등학교 1학년이었던 수진이가 외국 유학 가는 그 순간부터 그 아이를 내 딸이라고 생각해본 적 없어. 이제 수진이는 만인의 딸이잖아.”

1985
로잔 발레 콩쿠르 우승
세계의 주목이 강수진에게로 쏠렸다. 동양인으로는 최초 1위 입상이었다. 마흔다섯이 된 그녀는 당시의 감정을 자서전에 단 한 줄로 적었다. “28년 전 그날, 나는 이상할 만큼 평온했고, 긴장하지 않았다. 내 운명이 걸린 대회였음에도 불구하고.”

1986
슈투트가르트 발레 입단

19세의 강수진. 발레단 역사상 최연소 입단이었다. “이제야말로 저는 진정한 학생이 되었습니다. 아직 코르드 발레를 하고 있기 때문에 우선은 훌륭한 솔리스트가 되어야겠지요. 그때 가서 세계적인 발레리나의 이야기는 다시 하겠습니다.”

1987
‘객석’과의 만남

내한한 강수진을 ‘객석’이 만났다. 유니버설발레단의 주역 무용수이자 선화예중·모나코 왕립발레학교 선배인 문훈숙과 조우했다. 영락없는 꽃처녀들. 대화는 학창 시절의 추억과 즐겨 보는 연속극과 영화 이야기로 흐르다 슬럼프 극복기로 옮겨졌다. “아예 발레를 잊어버리거나 친구들과 이곳저곳을 구경하러 다니기도 하고, 또 혼자서 다시 결심을 하기도 하지요. 그러나 슬럼프를 이겨내는 데는 시간이 꽤 걸리는 것 같아요. 그렇죠 언니?”

1992
이르지 킬리안 ‘구름’
내한해 이르지 킬리안의 ‘구름’을 이반 카발라리와 함께 선보였다. 평론가들의 입이 한데 모아졌다. “동양적 신비감을 물씬 풍기는 수줍음의 화신 같은 서정성.” “뛰어난 감정 처리와 유연성으로 고난도의 테크닉을 산뜻하게 처리했다.”

1993
슈투트가르트 발레 주역 데뷔
존 크랭코가 안무한 ‘로미오와 줄리엣’이 탄생 30주년을 맞아 현지에서 장기간 공연 중이다. 줄리엣 역은 강수진이 맡았다. “줄리엣은 평상시 제가 꼭 해보고 싶었던 역이라서 더욱 기뻐요.” 슈투트가르트 발레 간판 무용수이자 1976년부터 예술감독을 맡고 있는 마르시아 에데는 ‘1대 줄리엣’이었다. 당시 그녀가 입었던 의상을 고스란히 강수진에게 물려줘 강수진이 적통을 이을 것을 암시했다. “줄리엣의 기분으로 생활하고 있어요. 요즘 내 곁에는 늘 줄리엣이 있답니다.”

1994
슈투트가르트 발레 ‘로미오와 줄리엣’

감동적이었다. 그녀의 줄리엣은 완벽했다. 풍부한 감정, 뛰어난 연기력, 유연한 움직임과 선명한 춤, 강수진과 로미오 역 이반 카발라리와의 파드되 또한 최고였다. 1막이 끝나고 관객의 박수가 시작될 때 1층 객석에 앉아있던 막시아 하이디가 부리나케 일어났다. 빠른 걸음으로 무대 뒤로 가 외친다. “브라보!”

1995
슈투트가르트 발레 ‘잠자는 숲 속의 미녀’

슈투트가르트 발레의 시즌 개막 무대에서 오로라 공주가 모습을 드러낸 순간은 강수진이 월드 스타로 태어나는 출발점이기도 했다. 쟁쟁한 선배들을 제치고 무대에 오른 그녀였다. 무대 뒤 그녀가 ‘객석’의 취재진에게 말한다. “공연 3주 전 캐스팅이 확정돼 연습 시간이 짧았어요. 오로라 공주의 등장을 알리는 음악이 울려 퍼질 때 내 마음도 방망이질을 해댔는데 무대에 나서니 오히려 편안해졌어요.” 주역 데뷔 2년. 예술감독 마르시아 에데에게 ‘파격적인 캐스팅’의 이유를 물었다. “강수진은 천부적인 자질을 가진 특별한 발레리나다.”

1996
빈 국립발레 ‘마타 하리’

1년에 150회 이상을 공연하는 일급 발레단의 주역 무용수답게 그녀는 여전히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다. “개인적으로 다른 발레단 작품에 주역 무용수로 초빙된 것은 처음이라 부담이 가긴 하지만 우리 발레단 측에서도 적극 지원하고 있어 이 공연에 기대가 큽니다.”
유니버설발레단 ‘지젤’
지젤 역에 강수진이 캐스팅되었다. 국내 발레단과는 처음 맞춰보는 호흡이다. “복잡하게 생각 안 해요. 1막에서는 자연스러운 시골 처녀 그 자체를 표현할 거예요. 2막에서는 신비스러운 이미지 그 자체입니다.” 관록이 붙었다. 여유가 돋보였다. 리허설을 지켜본 시인이자 평론가인 김영태가 말한다. “강수진의 지젤 역은 수초(水草) 같은 이미지와는 또 다른 ‘광란의 연기’였다.”

1997
국립발레단 ‘노트르담의 꼽추’

국립발레단에 최연소로 입단한 김지영과 강수진이 국립발레단 ‘노트르담의 꼽추’의 에스메랄다 역을 맡았다. “제가 스토리 발레를 좋아하는 이유는 다른 사람의 삶을 그대로 다시 살아볼 수 있다는 사실 때문이에요. 동작 하나하나가 느낌으로 와 닿는 것은 상당히 기분 좋은 일이기도 하지요.” 연습실의 두 에스메랄다는 11년 터울이다. 김지영이 “선생님”이라 말하고는 어색한지 “언니라고 불러도 괜찮겠냐”라고 물으니 강수진이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김지영이 하루 연습량을 묻는다. “오전 10시부터 밤 11시간 반 정도까지입니다.”

1997
휴가차 한국 방문 “만나고 싶었습니다”

휴가차 내한한 그녀가 ‘객석’ 독자들과 만났다. 시골에서 두 딸에게 발레를 시키고 있는 학부형이 유학과 성공에 대해 묻는다. 강수진이 답한다. “‘무엇이 되어 돌아오라’고 강요하지 말고 ‘많은 것 배우고 돌아오라’고 해야 해요. 발레를 삶의 한 부분이라 생각하는 자세가 중요해요. 격려하면서 지켜주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누군가는 은퇴 이후의 삶을 묻는다. “이후에 그만두게 되면 스튜디오를 차리고서 내가 배웠던 것을 내 방식대로 가르치는 날이 올 거예요.”

1998
뉴욕의 강수진과 슈투트가르트 발레

슈투트가르트 발레는 비장한 각오로 세계 공연시장의 메카인 뉴욕을 목표로 화살들을 준비했다. 먼저 발레단의 간판 레퍼토리인 존 크랭코의 ‘오네긴’과 ‘로미오와 줄리엣’을 택했고, 그 첫 번째 화살로 강수진을 택해 활시위에 걸었다. 뉴욕의 밤, 링컨 센터 뉴욕 주립극장 무대 위의 그녀는 세심하게 조각된 타티아나였고, 관객이 환성 대신 넋을 잃고 신음하게 만든 줄리엣이었다. 공연 뒤 강수진이 웃으며 말한다. “저는 굉장히 즐겼어요.” 같은 해 그녀는 한국에서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을 수상했다.

1999
브누아 드 라 당스(최고무용수상) 수상

1991년 모스크바에 있는 국제무용협회가 발족한 상으로 무용수 실비 기옘·안무가 존 노이마이어·이르지 킬리안·롤랑 프티 등이 이 상을 수상한 바 있다. 존 노이마이어의 ‘카멜리아 레이디’에서 마르그리트 역을 맡았던 강수진을 두고 “안무가 훌륭함은 물론이지만 강수진의 사랑스러운 연기가 아니었다면 작품이 제대로 살아나지 못했을 것”라는 평이 쏟아졌다. 그녀의 수상은 독일 무용계 최대의 경사였고 슈투트가르트 전체가 잔치 분위기에 휩싸였다.

“열정이 있는 여자의 춤은 멈추지 않는다. 나의 영혼이 멈추라 하지 않는 이상, 내 춤은 영원하다”

1999~2001
부상과 컴백

‘지젤’ 공연을 1주일 앞두고 다리의 통증이 너무 심해 병원을 찾았다. 정강이뼈에 길게 간 금이 선명히 보였다. “1년 이상을 쉬면서 재충전의 기회로 삼았죠. 못 읽었던 책도 실컷 읽고, 브람스와 베토벤·모차르트 음악에 파묻혀서 지냈어요.” 2001년 슈투트가르트 발레의 중국과 홍콩 순회 공연에서 ‘로미오와 줄리엣’ ‘말괄량이 길들이기’로 공백을 깨고 성공적으로 컴백했다. “가슴이 뛰더군요. 무대에 다시 서니까.”

2002
슈투트가르트 발레 ‘카멜리아 레이디’ 그리고 결혼

세종문화회관 무대 위 그녀는 그 자체로 한 떨기 동백꽃 같았다. 관객은 그 진한 향기에 도취되었다. 3막에서 마르그리트 역의 강수진과 아르망 역의 로버트 튜슬리가 파드되를 선보였다. 객석은 바늘 떨어지는 소리라도 들릴 만큼 숨을 죽였고 이후 우레와 같은 갈채가 쏟아졌다. 그해의 1월은 그녀에게 특별한 시간이었다. 같은 발레단에서 그녀를 본 지 ‘1초’ 만에 반한 남자와 10년 남짓한 사랑 끝에 결혼했다. 남편 툰치 쇼크만은 “근육이 늘어지거나 뼈가 부러지지 않는 이상 발레를 계속하라”라며 엄격하게 강수진을 강하게 몰아세우다가도 자신의 조국 터키와 한국이 2002년 월드컵에서 우정을 나누는 것을 볼 때는 울먹이는 남자였다. 강수진은 같은 해 호암상을 수상했다.

2004
슈투트가르트 발레 ‘오네긴’

타티아나 역의 그녀는 “한 남자를 사랑하지만 그것을 거부해야만 하는 여자”였고, “복수에 대한 만족감보다는 복수를 해야 한다는 의무감에 고통스러워하는 여인”이었다. 같은 해 강수진의 무대인생을 무용평론가 장광열이 집필한 ‘당신의 발에 입맞추고 싶습니다’가 출간됐다. 토슈즈에 가려져 있던 ‘당신의 발’ 사진이 수록되어 있었다. 그녀의 발과 굳은살은 열정과 노력이 세공한 최고의 조각이었다.

2006
슈투트가르트 발레 ‘말괄량이 길들이기’

내한하여 무대에 오른 강수진은 길들일 수 없는 카타리나였다. 무대에서 턱을 빼고 뾰로통하게 입을 내밀고 심술궂은 모습으로 등장한 그녀는 엉덩방아를 찧는다. 1969년 존 크랭코가 안무한 ‘말괄량이 길들이기’로 관객은 새로운 강수진을 ‘발견’했다.

2007
카머탄처린(궁중무용수) 선정

독일 바덴뷔르템베르트 주는 그녀를 카머탄처린(궁중무용수)으로 선정했다. 동양인으로는 처음으로 받은 작위였다.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시상식 다음 날 아침에도 똑같이 연습실에 나갔어요. 하루하루 충실하게 살아가는 게 중요한 거죠. 그저 맡은 역할에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한국을 빛내는 해외 무용스타 초청 공연’에 오른 그녀는 ‘오네긴’과 ‘말괄량이 길들이기’의 하이라이트를 선보였다. 잘 입지 않는 클래식 튀튀를 입고, 검은 테 안경까지 끼고 웃음을 건네는 그녀를 보며 관객은 마냥 즐거웠다.

2008
슈투트가르트 발레 ‘로미오와 줄리엣’

1993년 슈투트가르트 발레의 주역으로 데뷔했을 때도 그녀는 줄리엣이었고, 1994년에 발레단과 첫 내한 시에도 그녀는 줄리엣이었다. 강수진의 춤에 서려 있던 줄리엣의 눈물은 시간이 지났어도 여전히 가슴으로 스며들었다. 15년 전 주역 데뷔 시 곁에 줄리엣을 둔 기분으로 춤췄다던 그녀는 이제 완전한 줄리엣이 되었다. 아름답다, 줄리엣 그리고 강수진.

2010
갈라 ‘더 발레’

평론가 문애령은 “‘더 발레’는 세계 어느 곳에서도 보기 어려운, 발레리나 한 명을 중심으로 한 특별한 무대”라고 말했다. 존 크랭코·존 노이마이어·이르지 킬라안 등 거장 안무가들의 작품. 20년 가까이 주역으로 활동하며 만난 파트너들이 함께하여 강수진과 슈투트가르트 발레의 긴밀한 관계를 드러낸 무대였다.

2012
슈투트가르트 발레 ‘카멜리아 레이디’

강수진에게 브누아 드 라 당스 수상의 영예를 안겨줬던 작품인 ‘카멜리아 레이디’. 2002년에 국내 무대에 마르그리트 역으로 섰으니 그녀에게 10년의 시간이 더 얹어진 셈이다. 모두들 은퇴를 물었다. “40살 전에 은퇴할 줄 알았어요. 그런데 사십이 넘어가니까 발레가 더 재밌더라고요. 가면 갈수록 경험을 쌓을수록 점점 더 여유로워지는 느낌이 들어요.”

2013
자서전
‘나는 내일을 기다리지 않는다’ 국내 출간

발레 바에 기대선 그녀가 책표지에서 환하게 웃고 있다. 목차를 훑는다. “어제 가졌던 열정의 크기가 오늘 인생의 크기를 결정한다”라는 문구가 선명히 다가온다. 페이지마다 발레·발레·발레. 끊임없이 발레라는 단어만 나온다.

인스브루크 발레 ‘나비부인’ 초연
강수진은 ‘나비부인’의 초초상이 되어 오스트리아 인스브루크 발레 무대에 올랐다. 강수진을 염두에 두고 안무한 작품이기에 안무를 맡은 엔리케 가사 발가의 머릿속에는 강수진 생각뿐이었다. 초연을 맡은 그녀는 이제 초초상 역의 전범(典範)이 되었다. 이 작품에 출연하는 프리마 발레리나들은 발가가 그랬던 것처럼 온통 강수진의 몸짓을 생각하며 춤출 것이다.

12월, 국립발레단 예술감독 내정
강수진이 2014년 2월부터 3년간 국립발레단을 맡는다. 그녀의 단장직 내정에 국내 발레계는 한껏 들떴다. 강수진도 마찬가지다. 2014년 7월 인스브루크 발레의 ‘나비 부인’과 2015년 슈투트가르트 발레 ‘오네긴’ 내한 공연에도 출연할 예정이다. 공식 은퇴 무대는 2016년 6월로 예정되어 있다. 하지만 그녀는 자서전의 가장 끝에 이렇게 적어놓았다. “열정이 있는 여자의 춤은 멈추지 않는다. 나의 영혼이 멈추라 하지 않는 이상, 내 춤은 영원하다.”

정리·글 송현민(음악평론가) 사진 월간객석 DB·크레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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