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용공연장 입성한 김대진과 수원시향

조조, 유비를 만나다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4년 2월 1일 12:00 오전


▲ 헤어 채수진,
메이크업 최승희,
토니앤가이 청담본점

사전에 부탁한 것은 셋이다. 연미복·총보·지휘봉. 촬영장에 도착한 김대진은 순서대로 ‘준비물’을 꺼내놓았다. 연미복·총보·지휘봉, 그리고 집에서 직접 뽑았다는 커피가 담긴 보온병. 이로써 기자의 마음 속 ‘지휘자의 필수품’에 커피가 추가된다.
누군가가 그의 얼굴에 분을 칠하고 머리를 매만지는 동안, 김대진은 ‘52세 평범한 남자’답게 눈을 꽉 감고 몸 둘 바 몰라 한다. ‘내가 화장이라니! 내가 헤어스프레이라니!’ 현실을 부정하고 싶은 듯 눈을 감은 채 최근 협연한 어느 젊은 피아니스트에 대한 칭찬을 늘어놓을 뿐이다. 어쩌다 눈이 뜨여 거울 속 자신을 보았을 때는 “어이쿠!” 하며 외마디 소리를 지르고는 다시 눈을 감는다. 이 작은 분장실에서 그가 의지할 것이라곤 집에서 가져온 커피뿐인 듯하다.
자! 이제 연미복으로 갈아입고, 옆구리에 커다란 총보를 차고, 손에 지휘봉을 든, 그리고 평소보다 외모가 조금 말쑥해진 ‘수원시향 상임지휘자 김대진’의 모습으로 그는 카메라 앞에 선다. 어색한 표정과 몸짓도 잠시, 그의 가슴팍에 총보를 갖다 놓자 공기는 순식간에 자연스러워진다. 동시에 알싸하다. ‘차이콥스키, 당신 그 속을 내가 다 알아내겠습니다’라고 말하는 듯, 다 꿰뚫어볼 것 같은 눈빛으로 김대진이 악보를 한 장 한 장 넘긴다. “선생님, 그렇게 집중하지 않으셔도 되는데…”라는 말이 절로 나올 만큼의 집중이다.
조금 전 분장실에서 주뼛대던 남자는 사라진 지 오래. 결국 촬영을 시작하고 30분 만에 사진작가는 “다 된 것 같습니다!”라고 말하며 만족스럽게 카메라를 내려놓았다.
선택과 집중. 여기까지가 세상 사람들이 쉽게 아는 ‘성공 비결’이라면 김대진은 이에 슬기로운 ‘추진력’을 더한다. 그가 대상을 선택하고, 거기에 집중하고, 어느 순간 눈빛을 바꿔 추진력을 가할 때… 세상은 변한다.
여기 수원시립교향악단을 보라. 변했다. 그 대찬 변화 속에서도 김대진이 꼭 지켜내고 싶었던 것은 ‘선함’이라는 수원시향의 전통이었다. 2008년 수원시향 상임지휘자로 취임, 최초 2년의 임기를 마친 2010년 5월에 김대진은 ‘4년’ 계약 연장이라는 이례적인 계약서에 서명했다. 그는 당시에도 수원시향을 두고 “우리 오케스트라는 선합니다. 인간적입니다”라고 거듭 강조했다.
유비와 같은 오케스트라의 덕(德)에 조조와 같은 김대진의 지략이 더해진 오늘의 수원시향. 그들은 지금 제2도약대에 섰다.

‘선함’이 전통이 되기까지, 수원시향의 역사
오케스트라에 인격 같은 것이 있다면, 그 인격은 집안 내력을 살펴 가늠할 수 있으리라. 수원시향의 창단과 성장 과정은, 서울 아닌 지역의 오케스트라들이 1980년대를 어떻게 보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지역 오케스트라 중 상당수는 그 태동이 현지 음악교사들에 의해 이뤄졌다. 1982년 창단된 수원시향도 마찬가지로 음악교사들의 관현악 활동이 발전된 수원실내악단(1978년 창단)을 그 전신으로 꼽을 수 있다.

수원시가 교향악단을 갖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인천과 경기도의 분리였다. 이 과정에서 경기도 소속 교향악단이 없는 현실을 안타깝게 여긴 지역 음악인들이 당시 염보현 경기도지사에게 교향악단 창설을 제안했고, 이것이 받아들여져 초대 상임지휘자 송태옥이 이끄는 정단원 18명ㆍ준단원 30명의 수원시향이 탄생했다.
창단음악회는 5월 7일, 수원시민회관에서 열렸다. 1980년대 수원시향은 주로 수원시민회관에서 공연을 가졌는데 그때마다 수원의 중·고등학생들이 ‘동원’ 또는 ‘초대’되어 객석을 메웠다. 수원 출신의 한 공연계 인사는, 연주회에 오지 않은 아이들이 음악시간에 일으켜 세워져 ‘경기도의 노래’를 계이름으로 부르는 고초를 겪기도 했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수원시향의 현실이 그 정도였으니, 타 지역 오케스트라들의 상황은 더욱 어려웠다는 뜻이다.
모두가 어려웠던 1980년대를 지나 수원시향이 수도권에서 손꼽히는 오케스트라로 성장한 데는 두 명의 상임지휘자, 즉 4대 금난새(1992~1999)와 5대 박은성(2001~2008)의 공이 컸다. 금난새의 스타성은 세간의 관심을 받지 못했던 오케스트라에 확실한 ‘이름’을 새겨줬다. 무척이나 아카데믹한 음악을 추구하고 합주 그 자체를 사랑하는 박은성의 성향은 수원시향에 ‘사운드’를 줬다. 이들 두 상임지휘자의 임기는 각각 만 7년, 여기에 6대 상임지휘자 김대진의 임기가 2014년까지 이어지고 있으니 수원시향은 20여 년 동안 세 명의 확실한 살림꾼에 의해 성장하게 된 셈이다. 자리 부침이 심한 국내 지역 오케스트라들의 현실을 감안해보면 1990년대 이후 수원시향의 안정적인 과거가 ‘인간적 인격’을 지닌 오늘의 오케스트라를 탄생시키지 않았을까 싶다.

덕을 아는 착한 오케스트라, 지략을 지닌 지휘자
김대진과 수원시향의 제1도약을 2010년 예술의전당에서 진행한 베토벤 시리즈로 치자면, 지금부터 이야기 나눌 제2도약은 오는 3월 개관하는 전용공연장 입성, 두 차례 계획된 해외 공연, 발매를 눈앞에 둔 차이콥스키 교향곡 전곡 음반으로 압축할 수 있다. 2013년 예술의전당 실황을 담은 차이콥스키 음반부터 얘기해보자. 베토벤 교향곡 2·5번 발매(2012) 때와는 또 다른 기분일 듯하다.
떨린다. 복잡 미묘한 감정이다. 크게 봤을 때 국내 교향악단이 교향곡 전집을 상업 음반 형태로 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고, 수원시향 입장에서는 프로젝트를 완성해나간 매 순간이 특별한 기억으로 남는다. 우리 모두가 정말 열심히 했고, 배웠고, 느꼈고, 그렇게 공유했다. 내가, 또 단원들이 앞으로 뭘 하고 살든 잊지 못할 순간이다. 그간의 연주 활동을 통해 좋아진 점들을 음반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는 면에서도 의미 있다. 건강검진을 끝낸 기분이랄까. 건강검진을 해보면 좋아진 부분, 앞으로 개선이 필요한 부분이 나오지 않나. 딱 그 느낌이다.
청자 입장에서 ‘실황 분위기’라면 공연장 특유의 공명, 관객들이 내는 작은 소음, 박수 정도를 떠올린다. 음악을 만드는 입장에서 ‘실황 분위기’는 무얼 의미하나.
즉흥성의 발휘, 혹은 공연 중에만 가능한 대단한 몰입도가 만들어낸 결과를 뜻한다. 이들이 전체적인 음악의 흐름에도 분명 변화를 준다. 그런 변화도 웬만하면 실황 음반에 그대로 담으려 했다. 누군가는 너무 고리타분하다 말할 정도로, 나는 어떤 일을 시작하는 시점에 가졌던 기본적인 생각이나 본질이 늘 ‘근본’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연주는 ‘순간’ 만들어지고 이내 사라진다. 음악뿐만 아니라 대부분 공연예술의 특징이다. 생성되고 바로 소멸하는 연주를 ‘기록’으로 남겨 재생하려는 시도가 실황 음반인데, 그렇다고 해서 그때 그곳에 모인 사람들의 ‘기억’을 다시 재생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그 기억에 가장 가깝게 두는 것이 실황의 본질이라 생각한다.
스튜디오 혹은 필드 녹음이라면 완전히 다른 결과였을까.
당연히! 스튜디오 녹음이 연설문을 녹음해서 전달하는 거라면, 실황 녹음은 실제 모여있는 대중 앞에서 연설문은 읽는 것과 같다. 창조성, 즉흥성, 예상 못한 여러 가지 일이 벌어진다.
그날따라 객석의 분위기가 너무 이상해서 그 기운이 지휘자와 단원들에게까지 영향을 끼치고, 결국 원하는 방향과 전혀 다른 연주가 됐다 치자. 그래도 음반에 담을 것 같나.
‘만약에’라는 강력한 가정하에 답변하고 싶다. 청중의 분위기에 도움을 받을 때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이번 차이콥스키 시리즈를 진행할 때, ‘비창’ 3악장 끝나고 박수가 나오지 않았다. 물론 연주 직전, 오늘 이 연주가 녹음되고 있다는 사전 공지가 있긴 했지만, 그래도 나는 무척 놀랐다. 그만큼 청중의 수준이 높아졌고, 알고 들으러 온 분들이 많다는 뜻이다. 청중이 실황 녹음에 방해가 된 적은 절대 단 한 번도 없지만, 만약 그런 경우가 있다 해도 앞서 얘기한 듯 최대한 있는 그대로를 담았을 것 같다. 미켈란젤리의 베토벤 ‘황제 협주곡’ 음반 중에 천둥소리가 녹음된 게 있다. 협주곡의 대미, 팀파니가 점점 작아지고 잠깐 쉬었다가 피아노가 마지막 런을 하면서 곡이 끝나는데, 피아노가 시작하기 바로 직전에 비어 있는 그 한 마디에 천둥소리가 잡혔다. 실제로 천둥이 쳤다. 지금 기술이라면 이 정도는 가볍게 지울 수 있지만, 옛날 녹음이라 그대로 실렸다. 그 음반을 들어보면 자연 현상도 연주의 하나로 들어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음반업계가 불황이라지만 오히려 전 세계 오케스트라들은 앞다퉈 자체 레이블을 만들고 실황 음반을 내놓는 실정이다. 수원시향의 경우 그 음악적인 까닭은 ‘건강검진론’으로 설명된 듯하고, 운영 측면은 지난 2010년 인터뷰에서 답을 찾을 수 있다. (“해외에서 우리를 초대하려 해도 자료가 부족해서 무산되는 경우가 많다. 음반 하나 없는 오케스트라를 어떻게 초대하느냐는 식인데, 어느 정도 이해가 된다. 그래서 기록용 녹음을 넘어선 음반이 필요하다.”)
그 결과가 최근 하나의 현실로 나타났다. 국제 콩쿠르 심사 등으로 해외에 나갈 일이 워낙 많은데, 그때마다 수원시향 베토벤 음반을 정말 많이 가져가서 기회가 되면 한 장씩 전달하고 다녔다. 그렇게 전달, 전달되어 이탈리아 메라노 페스티벌 감독에게까지 갔고, 그 결과 오는 9월 메라노 페스티벌에 서게 됐다. 최근 페스티벌 홈페이지에 들어가보니 서울시향이 개막 공연, 우리가 폐막 공연을 하게 됐더라. 서울시향은 워낙 해외와의 네트워크가 잘 돼 있지만, 우리는 CD 한 장으로 낸 성과다. 연주료도 제대로 받고 간다. 개인적으로는 엄청난 성과라 생각한다.
누구나 자기만의 그릇이 있고, 그 그릇이 채워지는 순간 감동이 일어난다는 게 김대진의 ‘그릇론’이다. 차이콥스키 시리즈 후 수원시향의 그릇은 어떻게 변했나.
우선 팀워크는… 내 입으로 이렇게 말하긴 뭐 하지만 더 이상 좋을 수 없을 것 같다. 여러 연주 평을 통해 가장 많이 들은 얘기가 현 파트의 두껍고 질감이 느껴지는 소리다. 그 소리에 익숙해져 있다가 최근 베토벤 교향곡 5번 음반을 들어봤는데, 순간 받은 느낌이 ‘왜 이렇게 아기 같지’였다. 그만큼 경험이 쌓인 것 같고, 또 앞서 강조한 팀워크가 있어 가능했던 변화다. 목관 얘기도 빼놓을 수 없다. 우리나라의 그 어떤 오케스트라보다 균형 잡힌, 평준화된 목관이다.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점 중 하나다.
이번 실황 녹음을 들어보니 차이콥스키 교향곡이기에 더욱 부각될 수밖에 없는 금관도 선전하고 있었다.
우리 금관주자들이 아주 젊다. 시기가 잘 맞아 좋은 연주자들을 영입할 수 있었다. 금관주자뿐만 아니라 수원시향에는 외국인 단원이 한 명도 없다. 국내 오케스트라 발전을 논할 때, 해당 파트의 학생들과 졸업자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발전을 위해서는 좋은 재원을 얻기 위한 투자가 필요하다. 예술의전당 토요콘서트 무대에 서는 예술의전당 페스티벌 오케스트라(오케스트라 단원을 직업으로 꿈꾸는 음대 재학생 및 졸업생들을 위한 일종의 직업 체험의 장이 되는 프로젝트 오케스트라)의 경우, 2012년까지 금관 파트를 현직 오케스트라 단원들에게 맡겼다가 2013년부터는 학생과 졸업생들을 세우고 있다. 그런 식의 경험과 훈련이 필요하다. 금관 파트에 외국인 몇 명 앉히는 게 당장은 좋은 효과를 가져올 수 있지만, 길게 봤을 때는 그 인건비로 우리 금관 교육에 대한 투자를 해야 한다.


▲ 사진제공 수원시향

오케스트라의 꿈, 전용공연장 입성
오는 3월, 상주·전용공연장인 수원SK아트리움이 개관한다. 수원시향이 주로 서게 될 950석 규모의 대공연장이 마음에 드는지.
처음부터 내세운 건 단 하나, 음향이었다. 음향이 좋으면 여러 불편이 감수될 수 있다고 본다. 반대로 다른 게 다 좋고 음향이 나쁘면 결국 좋은 홀이 아니다. 지난해 12월 31일 송년음악회를 통해서 음향을 살펴봤는데, 우리도 청중도 그 정도면 충분히 만족할 만한 음향이라는 결론이다. 나는 보통 음향으로 죽어있는 홀, 살아있는 홀로 나누는데 여긴 살아있는 홀이다.
공연장을 짓는 데 어느 정도로 관여했는가.
원래 SK가 갖고 있던 부지에 공장을 짓지 않고 홀을 지어서 시에 기부 체납한 형태다. 구상부터 수원시향을 염두에 두었고, 시장님이 모든 걸 내게 확인 받으라 해서 귀찮을 만큼 자주 현장에 가서 살펴보고 조언을 해드렸다.
SK가 홀을 지어주고, 삼성전자 후원으로 곧 유럽 투어에 오르고, 수원시와도 사이가 좋다. 스스로 CEO가 되어야 하는 음악인들을 위해 그 비결을 공유한다면.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일찍이 공무원들과 일한 것이 많은 도움이 됐다. 학교에서 정말 온갖 시행착오를 다 겪었는데, 그때와 지금의 경험에 비춰보면 결국 시도, 기업도, 오케스트라도 모두 잘하고 싶어 한다. 잘하려고 노력하는데 서로 관점이 다를 뿐이다. 저쪽에서 이쪽이 하는 일을 방해하고 막으려 한다 생각하면 불행해질 수밖에 없다. 잘하고 싶은 서로의 마음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걸 어떻게 깨달을 수 있을까. 오직 연주를 통해서 가능하다. 최선의 연주가 낳은 감동을 청중은 물론 관계자들이 다 함께 공유하면 그 순간 ‘소통’이 시작된다. 한편 상대방으로 하여금 내가 독선적이지 않은 사람, 소통 가능한 사람, 같이 설렁탕 사먹을 수 있는 보통 사람… 그런데 음악회에서는 감동을 만들어낼 수 있는 사람으로 비춰졌으면 한다.
2월 삼성전자 후원으로 빈·부다페스트·프라하·뮌헨으로 이어지는 유럽 투어에 오른다(7일 빈 무지크페라인잘, 9일 부다페스트 이탈리아 문화원, 11일 프라하 드보르자크홀, 12일 뮌헨 헤라클레스홀). 지난 2010년 인터뷰 당시, ‘정당한 대우’가 보장돼야 해외 투어에 오를 거라 밝혔다. 기업 후원으로 가는 투어는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정당한 대우로 순수 초청을 받아 가는 건 9월에 있을 메라노 페스티벌의 경우다. 삼성전자 후원의 투어는 기업과 국내 오케스트라의 협업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공립 예술단체가 왜 시민의 세금을 써가며 해외에 나가느냐라는 의문에서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다. 2012년 창단 30주년을 맞았을 때 우리는 해외가 아닌 국내 각 도시를 돌며 지방 투어를 했다. 시장님과 내 생각이 딱 맞아떨어진 부분이었다. 왜 해외에 가서 시민의 돈을 써가며 자축을 하는가, 그리고 부산·대구 시민들은 수원시향이 어떤 음악을 만드는지 과연 아는가. 그렇게 우리의 30주년을 기념했다. 해외 관객에게 우리 기량을 선보이고 싶다는 생각은 당연히 할 수 있는데, 문제는 어떻게 나가느냐다. 우연찮은 기회에 수원이라는 같은 연고지를 둔 삼성전자와 연이 닿아 해외 투어가 성사됐다. 사실 베를린 필이 내한할 때마다 국내 기업들이 후원하겠다고 줄을 선다는 얘기를 들으면 씁쓸하다 못해 쓸쓸했는데, 이번 기회에 기업과 국내 악단의 좋은 선례가 만들어졌다.
연주력의 발전, 단체의 위상 강화만큼 단원들의 처우도 나아졌나.
여전히 안 좋다. 5년간 임금 동결 상태다. 이 이야기를 하기 전에 꼭 전제조건을 달고 싶다. 여러 자리에서 늘 강조하는 거지만, 지금의 염태영 시장만큼 수원시향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을 해주는 경우는 드물 것이다. 그럼에도 (김대진 자신을 포함해) 단원들 임금은 5년째 동결이었다. 수원시향의 활동이 이렇게나 활발한데, 단원들 개개인은 그래서 더 상실감을 느꼈을지 모른다. 시에서 지난해 말 임금인상을 추진했는데 의회에서 걸렸다. 그 과정의 마지막에, 모든 걸 다 걸고 해보자라는 심정으로 인상이 안 될 경우 사임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이례적으로 표결 단계까지 다시 갔는데 한 표로 졌다. 약속을 했으니 사표를 냈다. 그 후 한 열흘 지나 시장님과 긴 면담을 하고, 다시 약속을 받고, 사표가 반려되고… 그런 일이 있었다. 단원들도 다 아는 얘기다. 우리 모두가 공감하고 함께 노력했던 일인데….
나는 우리 단원들이, 우리 오케스트라가 착하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내가 부임한 후 지금까지 평정을 통해 해촉된 단원은 없다. 단원을 대상으로 하는 평정 시스템이 답이 아니라고 믿는다. 대신 나 자신에게, 학생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단원들에게도 자연스럽게 묻는 게 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까. 그 끝이 어딘지 아세요?” 그래서 나는 아는가. 나도 잘 모른다. 가끔 그런 생각도 한다. 이보다 더 열심히 할 수 있을까. 차이콥스키 시리즈를 진행하면서 단원들에게 몇 번 그렇게 말한 적이 있다. 어쨌든 나는 평정의 결과가 아닌 ‘최선’의 결과를 믿는다. 단원 개개인의 최선에서 오는 진심의 소리는 어떤 지휘자도 만들 수 없는, 그들만의 소리다. 수원시향은 그런 최선과 진심을 오랫동안 지켜온 단체다. 그래서 착하고 선한 오케스트라이고, 그것이 이들의 전통이다.
스스로가 “예상 외의 애국자”라고 밝힌 적이 있다. 애국자로서 요즘 어떤 나라 걱정을 하고 있는가.
역시 음악적인 걱정들이다. 오케스트라 아니면 교육에 대한 것들. 요즘은 영재에 대한 생각이 많다. 영재 교육이며 연구며 한창 이뤄지고 있는데, 예술 영재는 과학·수학 영재와 다르다는 근본적인 인식 공유가 부족한 듯해 안타깝다. 영재는 해당 분야의 특별한 능력은 지닌 아이들이기도 하지만,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의 큰 상상력을 지니기도 했다. 그런데 어른들이 자꾸 객관적인 지식과 사실을 이 아이들 머릿속에 집어넣으려고 한다. 그만큼 상상력의 공간이 사라진다. 일례로, 열 살짜리 꼬마가 베토벤의 마지막 피아노 소나타를 기가 막히게 친다고 해보자. 무슨 생각으로 쳤냐고 물으면 십중팔구 “모르겠는데요.” “별 생각 없이 쳤는데요”라고 답한다. 그럼 어른이 또 이렇게 묻는다. “베토벤의 마지막 소나타이고 그가 세상을 다 초월해서 쓴 곡인데, 이 곡에 대한 네 생각은 어떠니?” 이렇게 묻는 순간 아이의 상상력은 닫힌다. 열 살짜리 아이가 베토벤 소나타 32번을 기가 막히게 연주하는 걸 바라는가, 아니면 그 재주 있는 아이가 60, 70이 되어서도 자기 상상력에 기대어 연주 활동을 활발히 이어가길 바라는가. 수학·과학 영재가 그 어린 나이에 새로운 이론이나 현상을 발견·발명했다 치자. 그건 하나의 ‘사실’로 입증되어 세상에 남는다. 그런 걸 예술에 기대할 수 없다. 해서도 안 된다.
최근 KBS교향악단이 정상화를 위한 여러 시도를 보이고 있다. KBS교향악단이 과거의 기량을 찾는다면 국내 오케스트라의 판도에도 어느 정도 변화가 있을 거라 예상되는데, 끝으로 이에 대한 의견을 묻고 싶다.
KBS교향악단은 무조건 좋은 결말을 얻어야 한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오케스트라이고, 그만큼 역사가 깊은데 허무하게 무너져 내린다면 우리 모두에게 너무 큰 손실이다. 나는 KBS교향악단과 특별한 인연이 있다. 1981년, 국립교향악단에서 KBS교향악단으로 전환될 때 이강숙 전 총장님이 총감독을 맡아 그 작업을 진두지휘하셨다. 그때 대학교 1학년이었던 나는 단원 오디션장에서 종일 반주를 했다. 지금 KBS에 있는 주요 단원들이 그때 내 반주로 오디션 봐서 합격한 사람들이다. 그러니 지켜보는 마음이 더 남다를 수밖에 없다. 조언을 하자면, 사무국과 단원들이 하나의 목표를 바라보고 있는지 알아야 한다. 단원으로서의 존재 이유, 사무국의 존재 이유, 나아가 KBS교향악단의 존재 이유가 뭔지, 목표점이 같은지 말이다. 각자 상처가 있고 또 깊겠지만, 우리가 존재하는 이유도 음악이고 상처를 치유하는 것도 음악임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 지금으로서는 ‘최상의 연주’만이 오랜 문제를 풀 최선의 해결책이란 말씀밖에 해드릴 게 없다.

…이날, 지휘자 김대진의 연구실에서 여전히 가장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피아노였다. 2011년 슈베르트 피아노 소나타 음반을 내놓았을 때, 그는 “피아니스트로서 일종의 임무를 스스로에게 부여해보고자 했다”라고 배경을 밝혔다. 지금은 그 임무를 어떻게 이어가는지 묻자 어느 선배님의 말씀이라며 “일을 쳐야 일이 된다는데…”라 답해놓고는 그저 멋쩍게 웃는다.
“앞서 얘기한, 시에 사표를 내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그 며칠간 ‘다시 옛날로 돌아가면 뭘 해볼까’라는 구상으로 잠시나마 행복했어요. 사람은 전쟁 중에도 행복을 느낀다고 하잖아요. 나 역시 그 치열한 시간에 피아니스트로서의 이런저런 구상을 하게 되더라고요.”
‘피아니스트 김대진’의 오랜 팬들은 그것이 구상에만 머물지 않기를 바란다. 지난 슈베르트 음반에서 들려준 ‘사뭇 다른 김대진’을 잊지 못한다. 다음에 그를 카메라 렌즈에 담을 때는 연미복·총보·지휘봉이 아닌 오직 건강한 열 손가락만을 준비해달라 부탁하리라.

글 박용완 기자(spirate@gaeksuk.com) 사진 홍장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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