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처드 용재 오닐 데뷔 10주년의 산업적 측면

용재의 성장이 우리의 성장일까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4년 3월 1일 12:00 오전

최근 10년간 국내에서 가장 많은 사랑을 받았던 클래식 음반은 무엇일까? 단순한 물음이었으나 답을 구하기란 좀처럼 쉽지 않았다. 한국음악산업협회·음반 유통사 홈페이지·정부 통계 자료를 전전했다. 그러나 클래식 음악이 얼마나 그리고 어떻게 향유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웬만한 가수라면 음원 다운로드 수는 기본이고 뮤직비디오 조회 수까지 기록되는 시대인데, 오늘날 클래식 음악의 소비에 대해서는 아무도 말하지 않는 듯했다. 며칠을 헤맨 뒤 자체 데이터 수집망을 구축한 ‘한터 차트’에서 비로소 원하던 자료를 얻었다. 국내 클래식 음반 판매량과 순위가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차트에서 단연 돋보이는 존재는 바로 ‘리처드 용재 오닐’이었다. 국내 클래식 음반 10년간의 판매 기록은 그가 2004년 TV 프로그램을 통해 소개된 이후부터 10년간 이루어낸 ‘폭풍 성장’ 기록과도 같았다.


▲ 데뷔 2년차의 풋풋한 모습

음악성 옆에 동등하게 놓인 인간성
그의 첫 음반 ‘리처드 용재 오닐(Richard Yongjae O’Neill)’은 2005년 바흐·포레·리스트의 곡을 담아 발매되었다. 그해 약 3천 장이 넘게 팔리며 연간 판매 순위 34위를 기록했고, 이듬해부터 그는 재발매 포함 적어도 3개 이상의 음반을 연간 판매 100위권 안에 꼬박꼬박 올렸다. 용재 오닐이 지금까지 발매한 총 여덟 개의 음반 중 연간 판매 1위에 빛나는 것은 네 개. 특히 2013년에 1위를 기록한 베스트 음반 ‘마이 웨이(My Way)’는 2위 ‘클래식을 좋아하세요?’보다 약 5천 장 더 팔렸다. 5천 장이면 3위를 한 바흐 ‘골드베르크 변주곡’(슈투트가르트 카머오케스트라)의 한 해 판매량과 맞먹는다. 태교를 위해 기획된 클래식 음반이나 명곡 모음집으로 판매 차트가 도배된 상황에서 용재 오닐이 보여준 음반 판매 실적은 그가 클래식 음악계에서 전에 없이 확고한 팬덤을 형성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성공의 핵심에는 ‘인간’ 용재 오닐이 있다. 사람들은 음악에 앞서 그의 삶을 먼저 발견했다. 그가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2004년 KBS ‘인간극장’이 그의 이야기를 조명한 이후부터다. 클래식 연주자, 그것도 대중에게 다소 낯선 악기인 비올라를 든 연주자에게 ‘인간적인 면모’를 부여해준 사연은 대략 이러했다. “그의 어머니 콜린 오닐은 1957년 미국으로 입양되었다. 어려서 열병을 앓은 후유증으로 정신지체 장애를 얻은 콜린은 미혼모의 몸으로 용재를 낳았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정성으로 아이를 키웠고, 15세가 되던 해 용재는 음악을 공부하기 위해 가족의 품을 떠났다. 넉넉지 않은 살림에 고학으로 전공한 악기이기에, 비올라는 세상 그 무엇보다 특별했다. 그는 비올리스트 최초로 줄리아드 음악원의 아티스트 디플로마 프로그램에 입학한 재원으로 성장했으며, 세종솔로이스츠와 링컨 체임버 뮤직 소사이어티의 멤버로 활동 중이다.”
클래식 음악에 문외한인 사람들에게 줄리아드 아티스트 디플로마 프로그램이나 링컨 체임버 뮤직 소사이어티 같은 긴 이름의 ‘권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녹록지 않은 환경에도 불구하고 꿋꿋이 성장한 청년이 연주하는 모습, 그 모습을 볼 수 있다면 충분했다. ‘인간극장’으로 이름을 알린 이듬해 그는 1집 음반을 발표했다. 호암아트홀에서 열린 국내 데뷔 리사이틀은 방송을 보고 찾아온 팬들로 북적였다. 세종솔로이스츠가 상주악단으로 머문 대관령국제음악제는 용재 오닐 덕에 홍보 효과를 단단히 누렸다.
대중은 용재 오닐의 ‘음악성’과 그가 브라운관을 통해 보여준 ‘인간미’를 아주 긴밀하게 받아들였다. 그는 2004년 ‘객석’과의 인터뷰에서 미국 청중은 “톤이 좋았다, 테크닉이 좋았다”라고 칭찬하는 반면 한국 청중은 “감동적이었다, 찡했다”라고 말한다고 털어놓았다. 용재 오닐을 발굴한 주역인 크레디아의 이강원 팀장은 “지금의 용재 오닐은 그 스스로의 헌신이 있기에 가능했다”라고 일축한다. 요즘의 대중은 진정성이 느껴지지 않으면 쉽게 마음을 열지 않는데, 토크쇼나 다큐멘터리에서 볼 수 있는 그의 헌신적인 인간미와 진정성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다는 뜻에서다. 실제로 용재 오닐은 다큐멘터리 ‘안녕, 오케스트라’ 제작을 위해 2년 동안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상처 많은 아이들을 보듬었다. 그가 보여준 음악에 대한 믿음과 아이들에 대한 따뜻한 시선은 오직 상처를 극복해본 경험이 있는, 그만이 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랬기에 순수하고, 깨끗했다. 클래식 음악 연주자로서는 극히 이례적으로 방송을 통한 노출이 많은 편인 그였기에, 사람들은 음악 외적으로 그의 인간적인 면모를 볼 기회가 많았다.
적어도 ‘인간’ 용재 오닐에 대한 관심은, ‘비올라’라는 악기와 앙상블 디토가 연주하는 ‘실내악’이라는 장르에까지 성공적으로 전파되었다. 침체된 클래식 음악 공연 시장의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용재 오닐과 앙상블 디토의 인기는 식을 줄 모른다. 최근 3년간 용재 오닐은 7회의 리사이틀에서 평균 2,086명의 관람객을 끌었다. 약 2,500석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을 거의 메운 숫자다. 그의 이전에 누구도 비올라를 독주악기로 내세워 이 정도의 티켓 판매를 기록하지 못했다. 오직 비올라 독주곡으로만 이루어진 용재 오닐의 7집 음반 ‘솔로(Solo)’는 2010년 발매된 그해 판매량 1위를 기록했다.
그가 주도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앙상블 디토 역시 승승장구했다. 디토는 기존의 고정된 소수 팬만으로는 클래식 음악계가 발전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스스로 관객을 찾아 나서면서 시작되었다. 발생학적으로 디토의 공연은 기발한 아이디어의 시도와 다양한 레퍼토리를 동시에 선보이는 ‘모험’의 장이 될 수밖에 없었다. 예컨대 클래식 음악에 친숙하지 않은 이들에게 쉽지 않은 레퍼토리인 홀스트의 ‘행성’을 연주할 때는 ‘수금지화목토천해명’을 형상화한 애드벌룬을 걸어두기도 했다. 팬들은 그러한 노력에 보답했다. 디토는 2007년도 서울에서만 세 차례 공연을 치른 후로 2008년 전국에서 아홉 차례, 2009년에는 열 차례로 점차 활동 무대를 확장해나갔다. 2010년 일본 데뷔 첫 해에는 5,200석의 도쿄국제포럼과 오사카홀 공연을 매진시키는 기염을 토했다. 방송 이슈로 형성된 일회성 관심이 아닌, 지속적으로 클래식 음반을 구매하고 공연장을 찾는 팬들을 찾아 나선 용재 오닐과 앙상블 디토의 여정은 어느 정도 그 목적을 달성한 듯하다.


▲ 임동혁이 가세한 2009년 앙상블 디토 시즌

2집 ‘눈물’로 대표되는 팬들의 확고한 취향
그렇다면 이들의 성공이 곧 한국 클래식 음악계의 성공인가? 이 질문에 대해 ‘그렇다’고 대답하기엔 지울 수 없는 물음표가 많다. 클래식 음악 산업에 관한 의미 있는 지표 자체가 부족한 현재의 상황은 그만큼 우리 사회에서 클래식 음악이 ‘변두리’에 위치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어렵사리 얻은 지표들도 의미를 찾기엔 표본이 부족하거나 처참한 수치만을 확인시킬 뿐이었다.
한국문화관광연구원에서 2년마다 실시하는 문화향수실태조사에 따르면, 2000년도에 클래식 음악 공연을 1회 이상 관람한 사람이 국민 전체의 6.7퍼센트지만, 2010년도에 이르러서는 4.8퍼센트로 줄어들었다. 대중음악·영화·미술 전시회를 포함한 총 9개 분야 중에서 클래식 음악 공연에 대한 선호도는 2000년도에는 5위였지만, 2012년에는 8위로 밀려났다. 한국콘텐츠진흥원에서 실시하는 콘텐츠산업통계조사를 보면 클래식 음악 공연계 연간 매출은 2006년 300억 6백만 원에서 2011년 496억 3천만 원으로 늘었지만, 오히려 전체 공연 산업 대비 비중은 15.80퍼센트에서 9.3퍼센트로 줄어든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클래식 음악 공연 산업의 크기가 커지고는 있지만, 그 사실만으로 우리 사회에서 클래식 음악에 대한 선호도가 높아지고 있다고는 장담할 수 없다.
디토 공연의 짧은 역사 가운데 ‘최고 전율의 순간’은 2009년 앙코르 무대에서 선보인 드라마 ‘하얀 거탑’의 음악으로 꼽힌다. 첫 패시지가 울리자마자 객석에선 “꺄!” 하고 난리가 났다. “앙상블 디토의 콘서트는 록 음악 공연장을 방불케 한다”라는 인식과 언론평도 바로 이 장면으로 생긴 것이다. ‘앙코르로 대중적인 음악이 연주되고, 청중은 전에 없는 열광으로 화답한다.’ 어느덧 앙상블 디토 콘서트의 공식이 되어버린 앙코르 순서를 두고, 디토의 어느 멤버는 놀라움과 아쉬움을 동시에 느꼈다고 한다.


▲ 그의 영역은 비올라에서 실내악, 2012년엔 지휘로까지 확대된다

“모차르트나 슈베르트를 아무리 열심히 연주한들, 이렇지는 않았는데.”
리처드 용재 오닐은 수차례 인터뷰를 통해 해가 거듭될수록 공연 관객이 늘어남을 느끼고 있다고 말했고, 디토의 공연을 찾는 팬은 다른 클래식 음악 공연도 찾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실제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근거는 부족했다. 또한 팬들의 음악 선호도에도 여전히 스펙트럼이 존재해서, 소위 말하는 ‘코어 클래식’에 가까운 공연 티켓이나 음반은 상대적으로 부진한 판매를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섬집아기’가 수록된 2집 ‘눈물(Lachrymae)’은 리팩 음반까지 매년 판매 100위 안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유니버설뮤직 측에 따르면 발매 후 통산 8만 장이 팔렸다. 반면 당대연주 스타일을 가미한 고음악 음반인 4집 ‘미스테리오소(Mysterioso)’는 2010년 이후로 음반 판매 100위권 차트에서 종적을 감추었다. 2008년 말에 발매된 음반이니 만 2년 만의 일이다. ‘눈물’이 리처드 용재 오닐이 10년간 일군 성취라면, ‘미스테리오소’는 그가 향후 10년간 걸어가야 할 음악가로서의 지향점이 아닐까.
물론 산업적 통계 수치만으로 그가 걸어온 길을 평가할 수는 없다. 그러나 ‘객관적’으로 현재를 진단하려 한다면 숫자는 그 어느 것보다 훌륭한 기준이 된다. 그가 일궈온 노력으로 이제는 클래식 음악 산업도 ‘좌표’를 찾을 때가 되었다. 10년 후에 나는 다시 한 번 물을 것이다. 최근 10년간 가장 사랑받은 클래식 음반은 무엇이냐고. 여전히 용재의 ‘눈물’이냐고.

글 이채은 인턴 기자(chaelee@gaeksuk.com) 사진 크레디아

*한터 차트(http://www.hanteo.com/)는 국내외 가맹점의 판매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집계해 전국음반판매량 추정치를 발표하고 있다. 문화체육관광부가 운영하는 문화셈터(http://stat.mcst.go.kr/)는 국내의 문화산업에 대한 다양한 지표와 통계를 제공한다


▲ 왼쪽에서부터 1집 ‘리처드 용재 오닐’(2005), 2집 ‘눈물’(2006), 3집 ‘겨울 여행’(2007), 4집 ‘미스테리오소’(2008), 5집 ‘노래’(2010), 6집 ‘기도’(2011), 7집 ‘솔로’(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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