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라우디오 아바도의 삶과 예술

방랑자의 뜨거웠던 여정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4년 3월 1일 12:00 오전

81세를 일기로 볼로냐 자택에서 생을 마감한
클라우디오 아바도. 음악으로 시작해 음악으로
끝난 그의 발자취를 따라가본다


▲ ⓒLucerne Festival

16세기와 17세기에 걸쳐 독일 중부 튀링겐 지방의 에어푸르트와 아이제나흐에 이르는 도시 곳곳에서 ‘바흐’라는 이름은 곧 음악가를 뜻했다. 실제로 1693년 아른슈타트 궁정악단에 공석이 생겼을 때 당국은 급히 바흐 가문의 사람을 수소문하기도 했을 정도다. 그만큼 바흐의 가계는 음악가가 많았다는 뜻이다. 이와 동급으로 20세기 이탈리아 밀라노에서는 아바도 가문이 유명했다. 단순히 음악을 업으로 삼은 수준을 넘어서 밀라노에서 ‘아바도’를 거치지 않으면 음악가로 입신하는 것 자체가 어려울 만큼 절대적인 권력을 과시했다. 그리고 그 정점에 지난 1월 20일 아침 8시 30분, 볼로냐의 자택에서 타계한 클라우디오 아바도가 있다.
클라우디오의 할아버지 미켈레 아바도는 할머니 비토리아 갈리안과 결혼해 이탈리아 북서쪽 피에몬테 지방의 알바에 정착했다. 그는 자연과학자였지만 바이올린·비올라·피아노와 작곡까지 배울 만큼 음악에 열광했다. 1907년 미켈레는 밀라노로 이주해 왕립수의학협회에서 식품학 교수가 되었다. 클라우디오의 아버지 미켈란젤로는 1900년 알바에서 태어나 6세부터 음악이론을 배울 정도로 천재성을 드러냈다. 7세에 밀라노 베르디 음악원에 입학한 미켈란젤로는 바이올린과 작곡을 전공했다. 1917년에 음악원을 졸업한 그는 불과 24세에 팔레르모 음악원 교수가 될 정도로 실력을 인정받았다. 1년 뒤 1925년 밀라노로 돌아온 미켈란젤로는 50년 이상 모교에서 가르치며 밀라노 음악계의 대부로 군림했다.
1925년 팔레르모에서 만난 매력적인 피아니스트이자 동화작가인 마리아 카르멜라와 결혼한 미켈란젤로는 이듬해 장남 마르첼로를 낳았다. 마르첼로는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밀라노 음악원에서 피아노와 작곡을 배우고, 1972년부터 무려 25년 동안 주세페 베르디 음악원의 원장을 역임하며 이탈리아 음악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마르첼로의 아들 로베르토는 클라우디오의 뒤를 이어 현재 세계 정상급 지휘자로 활약하고 있다. 1929년에 태어난 딸 루차나는 밀라노 음악 페스티벌을 만들었으며, 리코르디 출판사의 디렉터이기도 했다. 그녀는 2012년 세상을 떠났다.
이러한 집안 분위기에서 1933년 6월 26일 클라우디오가 태어났다. 어린 시절 클라우디오는 한 살 터울의 남동생 가브리엘레와 붙어 다녔다. 아바도 집안에서 음악을 전공하지 않은 유일한 인물인 가브리엘레는 형보다 먼저인 몇 해 전 하늘나라로 갔다.
“우리 가족 중에서 클라우디오와 나는 차분한 편이었어요. 형은 늘 호기심이 많았죠. 나는 형을 그림자처럼 따랐어요. 그는 신비로운 전설과도 같은 존재였지요. 자신은 음악을 택했지만 내게는 다양한 것을 해보라고 주장했어요. 결국 난 건축가를 택했죠. 큰형과 누나는 제2의 부모와도 같았어요. 마르첼로는 음악 스튜디오에서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었고, 루차나로부터는 수학을 배웠습니다.”
가브리엘레의 말처럼 클라우디오는 막내 동생에게 친구와도 같은 존재였다. 이들 형제는 여느 아이들처럼 전쟁놀이에도 몰두했다. 가장 즐겨 한 것은 13세기 알렉산드르 넵스키가 이끄는 러시아군과 독일 기사단의 얼어붙은 호수 위 전투였다. 프로코피예프의 칸타타 ‘알렉산드르 넵스키’가 나오는 영화음악을 흥얼거리는 건 기본이었다. 여기에 옆집 사는 개구쟁이가 합세했으니, 그는 아버지와 함께 트리오의 멤버였던 첼리스트 질베르토 크레팍스의 아들인 귀도였다. 클라우디오보다 42일 뒤에 태어난 귀도는 평생 죽마고우로 지내며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디자이너로 성공했다.


▲ ⓒGiorgio Lotti

이 시대의 살아있는 양심
이렇게 밀라노 골목을 뛰놀던 꼬마 아바도에게 인생의 전기가 운명처럼 찾아온 것은 불과 일곱 살 때였다. “나는 어릴 때부터 어머니의 젖을 빨듯 슈베르트·브람스·베토벤 트리오를 매일같이 들었죠. 일곱 살에 어머니에게 피아노를 처음 배우면서 본격적인 음악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 라 스칼라 극장의 맨 꼭대기 입석 좌석에서 드뷔시의 ‘세 개의 녹턴’을 처음 접하고 마법에 홀린 것처럼 충격을 받았지요. 그 음악을 내 손으로 지휘하는 게 꿈이었어요.”
동시대 작곡가에 대한 아바도의 지대한 관심은 그때부터 싹텄는지도 모른다. 녹턴을 듣는 순간 지휘자가 되기로 결심한 그는 25년이 지난 뒤 드뷔시 대신 말러 교향곡 2번으로 라 스칼라 무대에서 꿈을 이뤘다.
아바도 집안은 사회 참여에도 적극적이고 정의로웠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아바도의 어머니는 무솔리니를 반대하는 사람들을 돕고, 스위스에서 피난 온 유태인 어린이를 데리고 있다가 투옥되기도 했다. 10대의 아바도는 거리에 낙서로 휘갈겨 쓴 ‘비바 버르토크(Viva Bartók)’에 자극받아 버르토크에 심취했다. 버르토크가 반파시스트 당원이라 의심한 당국의 비밀경찰은 아바도의 집으로 찾아와 ‘버르토크 당원’이 누구냐며 총을 들이댔다. 버르토크의 음악을 모르는 그들이 결국 가버리자 아바도는 악보를 다시 꺼냈다.
이러한 살아있는 양심은 성인이 되어 더욱 견고해졌다. 아바도는 베를루스코니 총리에게 거침없는 비판을 가했다. 정부의 문화정책에 대해서도 “문화는 사회적인 불공평함을 극복하고 가난으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라며 반박하기도 했다. 그는 2009년 지진으로 폐허가 된 라퀼라에서 눈물을 흘리며 슈베르트의 교향곡을 연주했다. 2012년에는 지진으로 부서진 페라라의 코무날레 극장 복구를 위한 기금 마련을 목적으로 자신의 악단을 이끌고 연주 여행을 감행했다. 지난해 10월에는 쓰나미 피해를 입은 일본 후쿠오카 지방을 다녀왔다. 볼로냐에서는 모차르트 오케스트라와 함께 어린이 환자와 죄수들을 찾아갔다. 베네수엘라를 방문해 엘 시스테마 현장을 살펴보며 어린이 오케스트라를 가르치고 지휘한 것은 아바도에게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지난해 8월 30일 아바도는 이탈리아 종신 상원의원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급여 전부를 피에솔레의 음악학교에 장학금으로 기탁했다.
환경 문제 또한 아바도를 비껴갈 수 없었다. 사르데냐 섬의 쓰레기 매립지를 자연친화적인 공간으로 바꾸는 데 앞장섰고, 수십 년 동안 해안가 밭에서 부겐빌레아와 바나나 나무를 심고 직접 키웠다. 2008년에는 밀라노 시에 9만 그루의 나무를 심자고 제안했다. 아바도 추모 연주회가 열렸던 1월 27일, 라 스칼라 극장 입구에는 올리브 나무 한 그루가 놓여 있었다. 나무를 들고 온 두 명의 시민은 말했다. “우리는 밀라노 시장에게 8만 9,999그루 이상의 나무를 심자는 마에스트로의 꿈이 실현되기를 바란다.”


▲ ⓒFelix Broede/DG

영광의 시작
1949년 16세의 아바도는 밀라노 음악원에 입학했다. 그는 어린 시절에 토스카니니와 푸르트벵글러가 지휘하는 것을 직접 보았다. 프리드리히 굴다와 함께 피아노와 작곡을 공부하다 결국 안토니오 보토에게 지휘를 배웠다. 1953년 음악원 졸업 후 아바도는 출세의 길이 보장되어 있음에도 실내악단 단원으로 연주 여행을 다니며 현장 감각을 익혔다. 그리고 이듬해 여름 시에나에서 열린 음악 아카데미에서 주빈 메타를 만났다. 두 거장의 우정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메타는 당장 빈으로 가자고 했지만 아바도는 파르마에서 레슨을 받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메타의 집요한 설득 끝에 1955년 아바도는 드디어 빈 음악원에 입학했다. 당시 빈 음악원에는 ‘지휘자 제조기’라 불릴 만큼 비상한 교수 능력을 지닌 한스 스바로프스키가 있었다. 메타는 그에게 아바도를 소개했다. 스바로프스키의 수학적인 지휘 접근은 후에 아바도가 악보를 해석하면서 엄격한 음악적 기초와 감정을 동시에 추구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학교를 다니면서 메타와 아바도는 빈 징페라인 합창단에 들어가 베이스 파트에서 노래했다. 그들은 제사보다 잿밥에 관심이 많았다. 합창과 함께하는 작품을 연주할 때 조지 셀·브루노 발터·헤르베르트 카라얀의 지휘를 코에서 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1959년 아바도는 발칸 반도에 면한 고대도시 트리에스테 베르디 극장에서 프로코피예프의 ‘3개의 오렌지의 사랑’으로 오페라 무대에 데뷔했다. 그해 탱글우드 뮤직센터에서 열린 지휘 콩쿠르에서 쿠세비츠키 상을 수상한 아바도는 1963년 미트로폴로스 콩쿠르에서 우승하며 뉴욕 필하모닉을 지휘하는 영광을 얻는다. 1960년 아바도는 알레산드로 스카를라티 탄생 300주년 기념 시리즈 공연을 지휘하며 라 스칼라 극장에 데뷔했다. 1965년은 아바도가 세계로 비상하던 해였다. 카라얀의 초대를 받아 잘츠부르크 축제에 데뷔한 그는 빈 필하모닉과 함께 말러 교향곡 2번을 지휘했다. 라 스칼라에서도 같은 곡으로 돌풍을 일으켰다. 이듬해에는 런던 심포니의 포디엄에 생애 처음으로 올라서는 기염을 토했다.
1968년 12월 7일 아바도는 드디어 콧대 높은 라 스칼라에 음악감독으로 입성했다. 그는 1986년까지 라 스칼라에서 혁명적인 변화를 시도했다. ‘아바도 시즌’의 핵은 레퍼토리 확장이었다. 오페라와 고전, 낭만에 안주해 있던 라 스칼라에 베르크·스트라빈스키·쇤베르크·버르토크와 같은 20세기 작곡가를 적극 소개했다. 1924년 푸치니의 ‘투란도트’를 초연한 라 스칼라는 그로부터 60년 만인 1984년에야 슈토크하우젠의 ‘빛으로부터의 토요일’로 세계 초연한 작품을 가지게 되었다. 슈베르트의 모든 교향곡은 오리지널 스코어로 다시 연주되었다. 이 모든 것을 위해서는 콘서트 전용 오케스트라가 필요했다. 이에 아바도는 결국 라 스칼라 필하모닉을 새롭게 만들기에 이르렀다. 1972년부터는 라 스칼라 역사상 최초로 학생과 공장 근로자들을 위해 극장 문을 활짝 열었다. 또한 현장을 찾아가는 음악회도 처음으로 시도했다.
아바도는 2012년 10월의 마지막 밤에 라 스칼라로 되돌아왔다. 장장 26년 만의 귀환이었다. 볼로냐에서 그가 만든 모차르트 오케스트라도 동참했다. 라 스칼라 필하모닉을 지휘해 말러 교향곡 6번이 끝나자 무려 15분 동안이나 기립박수가 이어졌다. 고향 청중은 열렬히 환호했고, 무대는 그들이 던진 꽃다발로 파묻힐 지경이었다.

런던과 베를린을 안방 삼은 코즈모폴리턴
1979년 아바도는 로열 페스티벌 홀에서 런던 심포니 취임 연주를 지휘하며 그의 화려한 런던 시대를 열었다. 뉴욕과 빈의 활동을 정리하고 라 스칼라조차도 무티에게 넘긴 아바도는 런던 심포니와 함께 베토벤·멘델스존은 물론 말러 전곡 사이클을 연주하며 밀월 관계를 이어갔다. 민간 오케스트라의 특성상 살인적인 리허설과 연주 스케줄을 감행했지만 단원들은 이를 감내했다. 1982년 런던 심포니가 바비컨 센터에 입주할 때의 주인공도 아바도였다. 베리오·림·메시앙·티펫의 작품을 런던에 소개해 보수적인 청중에게 박수를 받기도 했다. 엄청난 양의 음반 녹음도 1986년 사임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1984년 아바도는 빈 슈타츠오퍼에 데뷔했다. 2년 뒤 빈 슈타츠오퍼의 음악감독으로 취임한 아바도는 빈 필하모닉의 수석지휘자도 겸하면서 ‘빈의 음악 총감독’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주가를 높였다. 스바로프스키의 학생으로 빈에 발을 디딘 지 30년 만에 주인공으로 다시 돌아온 것이다. 아바도가 있는 한 현대음악은 빈에서도 비껴갈 수 없는 필연이었다. 1988년 아바도는 현대음악과 비주얼 아트, 댄스와 영화를 통합해 장르를 초월하는 빈 모던 페스티벌을 주도했다.
1989년 10월 베를린 필하모닉은 창단 후 최초로 단원들이 직접 뽑은 첫 음악감독으로 아바도를 선택했다. 그는 베를린 필 역사상 최초의 비독일인이자 살아서 베를린 필을 그만둔 최초의 지휘자였다. “어떤 지휘자들은 독재자가 되기를 원한다. 하지만 나에게는 음악에 대한 사랑과 서로의 말을 들어주는 것이 전부다”라며 맞받아쳤다. 베를린 필하모닉을 새로운 시대로 이끈 그는 카라얀과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음악을 만들어갈 뿐만 아니라 단원과의 소통에도 앞장섰다.
‘듣는 것(Listening)’이야말로 아바도의 트레이드마크였다. 리허설에서 제일 자주 들리는 말도 당연히 ‘들어라’였다. “사람들은 말하는 것은 잘 배우지만 상대방의 말을 잘 듣는 것은 배우지 않습니다. 우리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서로의 말을 들어주는 것입니다. 음악은 듣는 방법에 대해 가장 잘 알려줍니다”라며 민주적인 운영 방식을 선포했다.
“베를린은 제가 볼 때 가장 코즈모폴리턴적인 도시입니다. 문화는 사회에서 물과 같은 존재입니다. 공연장·도서관·박물관·영화관은 작은 송수관과 같습니다. 예술적인 경계를 넘어 사회 구석구석 접근해야 합니다.”
베를린 필하모닉과의 관계가 거의 끝날 무렵인 2000년 아바도는 위암 수술을 받았다. 병마는 평생 아바도를 괴롭혔다. 1991년 빈 슈타츠오퍼를 사임한 이유도 원인을 알 수 없는 건강상의 문제였다. 2001년 3개월 동안 활동을 중단했으나 10월에는 공연을 녹화했으며, 의사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일본과 미국 순회연주를 떠났다. 2002년 5월 베를린 필하모닉의 마지막 정기연주회가 끝나고 아바도는 30분 동안 박수를 받았으며, 독일 대통령이 국가원수가 아닌 개인에게 수여하게 되는 최고의 훈장을 달아주었다.
2003년 병에서 회복되고부터 아바도는 공연 횟수를 줄이고 사르데냐 섬에서 가족과 시간을 보내기를 즐겼다. “음악은 암을 이겨내는 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가족입니다. 내 주위를 감싸고 있는 친척과 친구들의 사랑도요.”

가슴 한 편엔 늘 새로운 열정이
젊은 시절 아바도는 거칠 것 없는 스타였다. 대부분의 거장 지휘자들이 그랬듯이 아바도의 여성 편력도 평균 이상이었다. 1956년 그는 성악가 조반나 카바초니와 결혼했다. 2년 뒤 장남 다니엘레가 태어났다. 그는 현재 세계적인 오페라 연출가로 성장했다. 지난해 베르디 탄생 200주년 기념으로 출시한 파르마 레조 극장의 ‘투토 베르디’ 시리즈 가운데 ‘나부코’를 연출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딸 알레산드라가 태어나고 부부 사이에는 금이 가기 시작했다. 1960년부터 매력적인 의상 디자이너 가브리엘라 칸탈루피와 연애를 시작한 것이다. 결국 아바도는 1968년에 이혼했다. 카바초니는 그 후 사업가로 변신해 CEO로 승승장구했다. 두 번째 부인 칸탈루피와는 아들 세바스티아노를 얻었다.
가정에서 안정을 찾을 것 같던 아바도에게 마그달레나 코제나와 사이먼 래틀과 같은 엄청난 스캔들이 터졌으니 바로 러시아의 바이올리니스트 빅토리아 뮬로바가 그 주인공이었다. 무려 26년 터울의 딸과 같은 뮬로바는 아바도의 아기를 가졌고, 1991년에 아들 미하일이 태어났다. 아바도는 뮬로바가 임신 7개월이 되었을 때 그녀를 떠났다. 양육비를 지급하겠다는 조건은 충실히 지켜졌다.
제스처와 눈빛은 아바도 지휘 스타일의 백미였다. 아바도는 미세한 움직임으로도 악보 없이 암보로 지휘하는 것이 오케스트라와의 진정한 소통이라고 굳게 믿었다. “지휘자는 단원들과 눈을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오케스트라의 소리를 바꿀 수 있어야 합니다. 머리를 살짝 트는 것만으로 원하는 음악을 오케스트라로부터 뽑아내야 하죠. 지휘자는 자신을 무엇보다도 음악가로 간주해야 합니다. 자신이 신이나 독재자라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으면 안 됩니다.”
세계 최정상의 악단을 두루 섭렵한 아바도는 오케스트라 창단의 달인이었다. 라 스칼라 필하모닉에 이어 1978년 유럽연합 청소년 관현악단을 만들어 새로운 청소년들을 주인공으로 끌어들였다. 1986년에는 구스타프 말러 청소년 오케스트라가 탄생했다. 베를린 필하모닉을 사임한 뒤 2003년에는 세계 최정상의 연주자들을 한데 모은 루체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를 창단해 축제의 품격을 한껏 높였다. 루체른 페스티벌에서 공연한 말러 교향곡 시리즈는 영상물로 발매돼 애호가들의 찬사를 한 몸에 받기도 했다. 그리고 2004년부터는 그가 죽기 전까지 가장 애착을 가졌던 모차르트 오케스트라를 만들어 전 유럽을 돌며 함께 했다. 아바도는 엘 시스테마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음악의 기술적인 완성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음악의 가치와 감정을 찾는 것입니다. 나는 몇 개의 청소년 오케스트라를 만들었습니다. 베네수엘라의 엘 시스테마에도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음악은 범죄·매춘·마약에 빠진 아이들을 구할 수 있습니다. 음악을 하면서 그들은 자신을 새롭게 발견하죠.”


▲ ⓒMarco Caselli Nirmal

영원한 빛이 그대와 함께하길
2014년 1월 20일, 아바도는 볼로냐에서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서거했다. 베를린 필하모닉은 홈페이지에 “우리는 위대한 인간이자 음악가의 타계를 애도합니다. 그의 음악에 대한 사랑과 만족을 모르는 호기심은 우리에게 영감을 불어넣어 주었습니다”라는 추모 글을 띄웠다.
1월 25일 저녁, 아바도의 50년 친구 주빈 메타는 검은 타이를 메고 베를린 필하모닉 무대에 섰다. 최고의 말러 해석가인 아바도를 위해 교향곡 5번의 ‘아다지에토’가 차분하게 울려 퍼졌다. 박수도 없었다. 몇몇 청중의 눈가에는 이슬이 맺혔다. 메타는 이어 베베른의 작품을 연주해 현대음악을 사랑했던 친구에게 경의를 표했다. 오는 5월 16일부터 3일 동안 아바도는 베를린 필하모닉을 지휘할 예정이었다. 오케스트라 당국은 지휘자 없이 콘서트를 열어 아바도를 추모하기로 했다.
아바도의 타계 다음 날인 1월 21일, 두다멜은 거장이 생전에 물심양면으로 지원했던 시몬 볼리바르 청소년 오케스트라와 함께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베를리오즈의 ‘레퀴엠’을 연주했다.
1980년 리차렐리·베럿·도밍고·기아우로프 등 당대를 주름잡던 초호화 독창자들과 아바도가 이끄는 라 스칼라 필하모닉이 함께 연주했던 베르디 ‘레퀴엠’은 LP 음반 사상 최고의 명반 중 하나다. 2001년 1월 25일 아바도는 암을 극복한 직후 베르디 서거 100주년을 맞아 베를린 필하모닉과 함께 베르디 ‘레퀴엠’을 연주했다.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 돌아와 뼈만 앙상한 거장의 모습은 보기만 해도 안타깝다.
“주여 나를 구원해주소서. 영원한 빛을 우리에게 비춰주소서.”
‘우리를 구원하소서(Libera Me)’의 숭고한 의식이 끝나고 아바도는 왼손을 가슴으로 가져간다. 이후 박수가 나오기 전까지 30초 이상 정적이 흐를 때 아바도는 기도한다. ‘레퀴엠’의 마지막 구절처럼 그는 세상의 모든 고통과 아픔을 뒤로한 채 천국에서 영면하리라.

글 유혁준(음악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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