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꽃’ 올린 상주작곡가 살바토레 샤리노

16세기의 잔혹한 치정극, 시간을 거스르다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4년 5월 1일 12:00 오전


▲ 죽음을 부르는 사랑에 이끌리는 고뇌를 표현하는 백작 부인

올해 통영에는 두 명의 상주음악가가 자리를 지켰다. ECM 레이블에서 종교적인 색채감이 강한 음악을 다수 발매한 아르메니아 출신의 티그란 만수리안과 이탈리아의 아방가르드 작곡가 살바토레 샤리노가 그 주인공이다. 15편의 음악극을 발표하면서 전 세계 극장에 끊임없이 초청되고 있는 샤리노는 올해 통영국제음악제에 ‘죽음의 꽃’(1998)을 선보였다. 이들은 3일간 진행된 작곡 마스터클래스는 물론, 개막일부터 통영에 상주하면서 자신들의 지혜를 학생들과 나누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3월 30일 ‘다이내믹 통영-새로운 음악과 미래’라는 제목으로 열린 심포지엄에서는 현대음악 작곡가들이 나아갈 방향과 이에 대한 통영국제음악제의 역할에 대한 논의가 펼쳐졌다. 만수리안과 샤리노는 출생도, 음악적 세계도 각기 다른 사람들이었지만 자신들의 ‘정체성’을 지켜야 한다는 점에서 공통된 의견을 보였다. 아시아 작곡가 쇼케이스에서 심사를 맡은 두 명의 작곡가에게 “진정한 정통성은 어떤 기준으로 판단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하자 만수리안은 자리에서 일어나 연설을 시작했다. 청중의 눈을 보고 직접 말하고 싶다는 이유에서였다.
“비서구인들은 자신의 내용물로 작곡해야 합니다. ‘우리’(아르메니아 출신의 그는 서구를 타자화하여 지칭했다)가 아무런 저항 없이 서구의 도구들을 가져다 쓰면 그 누구에게도 필요하지 않은 음악이 생산될 것입니다. 우리의 의무는 유럽의 전통과 자신의 전통 사이에서 정확한 지점을 찾는 것이지요.”
만수리안은 독일에서 유학을 하며 작곡을 배웠으나 아르메니아 현대음악의 창시자 코미타스로부터 강한 영향을 받았음을 강조했다. 이에 반해 샤리노는 자신의 삶이 이탈리아에서 시작되었지만 스무 살에 베를린으로 이주했을 당시 도시의 빠른 템포에 강력히 매료되었다며 운을 뗐다. 이어 새로운 음악은 삶 속의 실제 상황이 투영될 때 가능하다는 점을 강조하며 작곡가는 자신만의 세계에 고립되면 안 된다고 조언했다. 그럼에도 새로운 자극은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상호 교류의 대상’임을 자각하는 것이 중요한데, 그러한 점에서 통영이라는 도시가 특유의 지역색이 강한, 매우 독특한 공간이라는 데 매료되었다고 말했다.


▲ 관에 담긴 시체로 제시된 방문객의 죽음

3월 28·29일 두 차례에 걸쳐 공연된 샤리노의 음악극 ‘죽음의 꽃’(원제는 ‘배신의 눈빛이여’, Luci Mie Traditrici)은 음악제 초반에 큰 힘을 실어주었다. ‘죽음의 꽃’은 불륜을 저지른 아내와 그 정부를 살해한 16세기 작곡가 제수알도의 일화에서 영감을 받은 음악극이다. 샤리노는 작곡을 구상하던 중 러시아 작곡가 시닛케가 이 일화로 오페라를 작곡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제수알도에 대한 언급을 지운 리브레토를 완성했다. 뼈대만 살린 제수알도의 잔혹한 치정극에 남은 것은 사랑에 대한 본능과 생에 대한 집착 사이의 갈등이었다. 간단하게 전해진 제수알도의 일화에서 제수알도는 복수에 눈이 멀어 살인을 저지르고 마는 무시무시한 인물로 묘사되지만, 샤리노는 여기서 인간의 고뇌에 주목한 것이다. 죽음을 예견하면서도 불륜에 이끌려가는 욕망의 본능,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을 죽였을 때의 후회를 두려워하면서도 결국 칼을 빼들고야 마는 복수의 본능은 결코 현실을 저버릴 수 없는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본능과 충돌한다.
이 끝없는 갈등은 노래와 언어가 하나의 프레이즈에 혼합되어 있는 듯한 특유의 창법으로 표현됐다. 두 본능 사이의 갈등이 손바닥 뒤집히듯 끊임없이 번복되어 날카로운 목소리로 표출되는데, 그것은 때로 노래와 언어로, 때로는 비음악적인 바람 소리와 바로크 음악의 선율로 번갈아가며 그 모습을 달리했다. 샤리노는 “말처럼 들리게 작곡했을 뿐, 실제로는 음을 가지고 있는 노래”라고 설명하며, 자신이 개발한 특별한 보컬 스타일 때문에 그러한 효과를 낼 수 있었다고 밝혔다.
또 하나의 특수한 효과는 통영국제음악제의 블랙박스가 지닌 구조적인 특색에 의해 가능했다. 좁은 공간을 활용해야만 하는 여건 상 지휘자와 앙상블은 2층 발코니석에 ‘ㄷ자’ 형으로 펼쳐져 배치됐다. 관객의 머리 뒤에 서서 연주하는 지휘자를 프로젝터로 비추는 영상은 흑백 처리돼 그로테스크한 형상으로 모니터에 비춰졌는데, 이것은 죽음의 사자와 같은 무시무시한 형상으로 다가왔다. 이에 대해 샤리노는 “전혀 예상치 못한 극장의 환경 때문에 오히려 좋은 효과를 낼 수 있었다”라고 회고했다.
세련된 무대 디자인과 평생 음악극에 헌신해온 샤리노의 성숙된 양식이 돋보이는 수작이었지만, 아쉬움도 여전히 존재한다. 이 작품을 제대로 즐긴 관객은 소수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300석 규모의 다목적홀에서 두 차례 공연되었을 뿐이며, 게다가 절반 이상의 좌석에서 자막을 읽을 수 없었다. 천으로 된 막에 띄워진 자막은 중간 지점 이후에 앉은 관객들에만 제대로 비춰졌다. 텍스트와 음악이 긴밀하게 교류하는 극의 특성상 자막을 제대로 읽지 못한 관객들은 한 시간 반에 이르는 시간 동안 답답함을 견뎌야만 했다. 2006년 음악제에 올랐던 최우정의 음악극 ‘로즈’와 같이 이제 통영국제음악제는 또다시 새로이 작품을 위촉해야 할 시기가 도래했음을 상기해야 한다. 마스터클래스와 작곡가 쇼케이스를 통해 통영을 창작의 산실로 만들려는 올해의 노력에 비추어보아 그것이 그리 먼 미래는 아닐 것이다.

글 김여항 기자(yeohang@gaeksuk.com) 사진 통영국제음악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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