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블러드 브라더스’

비판적 시각으로 바라본 계급의식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4년 8월 1일 12:00 오전

영국에서 20년 넘게 공연된 이 뮤지컬의 매력은 흥미진진한 스토리와 다양한 버전의 음반이다

절친한 친구가 있다. 우연히 생일도 같았고, 그래서 반가운 마음에 의형제도 맺었다. 어른이 됐다. 한 사람은 공장을 다니는 신세가 됐고, 다른 한 사람은 명문 대학을 졸업해 정치인이 됐다. 두 사람의 인생이 극과 극으로 바뀐 셈이다. 그런데 사실 두 사람은 쌍둥이 형제였다.

한날한시에 태어난 쌍둥이가 각기 다른 계급에서 자란다면 그들의 인생은 완전히 달라질까? 쉽게 대답하기 힘든 문제를 절절한 사연에 담아 화제가 됐던 뮤지컬이 있다. 바로 ‘블러드 브라더스(Blood Brothers)’다. 피를 나눈 형제 혹은 그 정도로 가까운 의형제라는 의미다. 자그마치 24년간 런던의 피닉스 극장에서 공연됐던 영국의 대표적인 흥행 뮤지컬이다.

사연은 이렇다. 스피브인 남편과 함께 살던 존스톤 부인은 뜻하지 않은 임신 소식에 절망한다. 스피브란 ‘작은 악당이나 좀도둑’이라는 의미인데, 산업 부흥기를 배경으로 한 영국산 문화 콘텐츠에 자주 등장한다. 당시 중하층민의 젊은 남성상으로 우리로 치자면 일종의 건달이다. 사실 남성 중심 사회였던 당시 영국에서는 일하지 않고 젊음을 탕진하며 여성들을 성 노리개쯤으로 생각하던 스피브족과 이에 따른 미혼모 문제가 커다란 사회적 고민거리였다.

존스톤 부인의 입장도 크게 다를 바 없다. 가정에는 관심이 없는 남편 탓에 혼자 허드렛일로 아이들을 키우던 그녀에게 이란성쌍둥이의 임신 소식은 청천벽력과 다름없었다. 문제의 발단은 존스톤 부인이 파출부로 일하던 상류계급 가정에서 비롯된다. 불임으로 고민하던 주인집의 라이언스 부인은 곧 태어날 쌍둥이 중 한 명을 아무도 모르게 자신에게 입양시킬 것을 제안한다. 하층계급의 그저 그런 인생을 살아가야 하는 자식의 미래를 고민하던 존스톤 부인은 결국 한 아이를 라이언스 부인에게 넘겨주기로 약속한다. 그리고 라이언스 부인은 ‘쌍둥이가 서로의 혈연을 모르고 살다가 그 사실을 알게 되는 순간 모두 죽는다’는 미신을 이야기하며 존스톤 부인과의 연을 끊는다.

부모는 아이들이 서로 만날 것을 원치 않지만 세상일은 뜻대로만 풀리지 않는다. 우연히 만나게 된 윗마을의 부잣집 아이 에디 라이언스과 존스톤 부인의 막내아들 미키 존스톤은 서로에게 호기심을 느낀다. 생일마저 같다는 것을 알게 된 두 사람은 서로에게 ‘블러드 브라더’가 되기로 결심한다. 이렇게 한날한시에 태어난 쌍둥이는 얽히고설킨 기구한 운명의 소용돌이로 빠져든다.

쌍둥이 형제의 기구한 사연

이야기의 배경은 영국이다. 우리에겐 오랜 전통의 ‘민주주의의 나라’로 여겨지는 이 나라에는 아직도 계급이 존재한다. 반상의 구분이 오래전에 사라진 우리에겐 사실 머나먼 꿈나라 이야기처럼 들릴지도 모르지만 엄연한 사실이다. 한강을 기준으로 서울을 강북과 강남으로 구분해 부르는 우리처럼 영국의 수도인 런던은 서쪽과 동쪽을 나눠 부른다. 런던의 서쪽을 말하는 용어인 웨스트엔드와 동쪽을 주로 지칭하는 이스트엔드는 이런 구분에서 탄생된 용어다. 웨스트엔드에는 예로부터 귀족이거나 상류계급이라 불렸던 사람들이 주로 살고, 이스트엔드에는 중산층 혹은 노동자계급이 모여 산다. 심지어 쓰는 말도 다른 경우가 있다. 상류계급은 주로 퀸스 잉글리시라 불리는 정통 영어를 쓰는 반면, 노동자계급은 소위 코크니라 불리는 사투리를 쓰는 경향이 짙다. 같은 영어지만 마치 외국어처럼 들릴 정도로 차이가 많다.

물론 오늘날 계급의 문제는 부와는 별개의 문제로 통한다. 한 영국 신문의 조사에 의하면, 최근 큰 성공을 이룬 영국의 사업가 중 70퍼센트가량은 스스로를 노동자계급이라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는 것으로 조사된 적이 있다. 자신이 이룬 재산은 부모나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이 아니라 오로지 스스로의 노력과 아이디어의 결실이라는 자긍심이다. 계급 혹은 신분에 대한 영국 사람들의 생각을 미루어 짐작하게 해준다.

그러나 영국 사회에서 계급 간의 갈등과 반목은 오늘날도 여전하다. 해마다 논란이 되는 ‘여우 사냥’이 대표적인 사례다. 전통이나 역사라는 시각으로 이를 지속하려는 상류계급과 사냥개를 풀어 죄 없는 여우를 잔인하게 사냥하지 말라는 노동자계급이 정계에서 격론을 벌이며 다툰다.

‘블러드 브라더스’는 이런 영국의 계급사회를 소재로 한 작품이다. 1983년 잉글랜드의 중북부 도시인 리버풀에서 초연 무대가 있었고 런던에서는 1991년부터 피닉스 극장에서 공연을 시작했다. 특히 매년 크리스마스 시즌에는 영국의 여러 일간지에서 선정하는 연말 웨스트엔드 극장가에서 가장 인기 있는 뮤지컬 공연 중 하나일 정도로 많은 사랑을 받아온 작품으로도 유명하다. 영국 사회의 계급 문제를 기구한 사연에 담아 보는 재미가 다양한 연령층에 공명을 불러일으켜 큰 매력으로 작용한 셈이다.

영국 계급사회의 갈등을 쌍둥이 형제의 삶과 죽음이라는 이야기로 풀어낸 이 뮤지컬의 원작자는 바로 영국의 극작가 윌리 러셀이다. 우리 극장가에서도 큰 인기를 누렸던 1인극 ‘셜리 밸런타인’으로도 유명한 극작가다. 수많은 연극과 영화를 통해 웨스트엔드에서는 ‘전설적인 작가’라는 애칭을 갖고 있는 그는 사실 젊은 시절 글쓰기가 아닌 미용사 교육을 받았다. 스무 살이 넘어서야 겨우 정규교육을 받았을 만큼 어려운 유년 생활을 보냈던 전형적인 노동자계급이었다. ‘블러드 브라더스’에 녹아 있는 계급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사회 고발은 바로 작가의 실제 체험에서 비롯됐음은 두말할 나위 없다. 특히 그는 이 뮤지컬에서 원작·작곡·작사의 1인 3역을 맡아 성공적인 무대를 만들어내며 타고난 이야기꾼으로서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 ⓒAlyssa Archer

유명 여배우들이 탐내는 쌍둥이 엄마 배역

‘블러드 브라더스’는 유명 가수와 배우들이 등장하는 적극적인 스타 시스템의 활용으로도 명성이 높다. 특히 파란만장한 삶을 사는 어머니 존스톤 부인 역은 많은 가수나 배우들로부터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지금까지 이 역을 거쳐간 인기 연예인으로는 바버라 딕슨·캐럴 킹·키키 디·페툴라 클라크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면면이 화려하다. 2000년 이후부터 종연 무렵까지 1980년대 인기 그룹 놀랜스의 멤버였던 린다 놀랜이 존스톤 부인 역을 맡아 연일 기립 박수를 받을 만큼 높은 인기를 누리기도 했다.

뮤지컬 ‘블러드 브라더스’는 작은 규모의 극장에서 단순한 세트에 의존하는 소극장형 뮤지컬이다. 자칫 지루할 수 있는 극적 긴장감을 유지시키는 것은 무대의 특수 효과가 아닌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력이다. 주연배우도 그렇지만 수십 가지 배역으로 변신하며 이야기 속 해설자로 등장하는 배우들의 명연기도 뛰어나다. 예를 들자면, 웨스트엔드의 무대에는 ‘미스 사이공’에서 베트콩 장교 투이 역으로 등장했던 키스 번스가 해설자로 등장해 절정의 기량을 과시한 적도 있다.

오랜 인기 덕에 제작된 시대나 나라에 따라 다양한 버전이 존재하다 보니 음반을 찾아보는 재미도 제법 쏠쏠하다. 앞서 설명한 모든 배우의 음반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지만, 바버라 딕슨이 노래하는 1983년 오리지널 런던 캐스트 앨범과 키키 디가 출연한 1988년 런던 리바이벌 캐스트 앨범, 페툴라 클라크가 나오는 1995년 오리지널 런던 캐스트 앨범은 이 작품을 좋아하는 애호가라면 놓치기 아쉬운 매력을 담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블러드 브라더스’는 극단 학전이 번안해 ‘의형제’라는 작품으로 무대에 올렸고 스타 배우의 산실 역할을 하여 화제가 되기도 했다. 오늘날과 같은 명성을 얻기 전 조승우도 이 역할로 무대에 등장한 바 있으며, 훗날 신시컴퍼니가 만들었던 우리말 번안 무대에는 이석준이 참여하기도 했다. 극단 학전의 ‘의형제’는 한국 뮤지컬 역사에서 ‘지하철 1호선’과 함께 큰 의미를 부여할 만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음악계와 공연 및 뮤지컬 분야에서 의미 있는 활동을 보이고 있는 김민기가 영국 계급사회의 반목을 6·25전쟁부터 유신 말기에 이르기까지 우리 근대사에 맞춰 절묘하게 재구성하는 기가 막힌 아이디어를 선보였기 때문이다. 완성도 높은 작품의 재해석으로 이 뮤지컬은 그해 동아연극상 작품상을 수상했고, 2001년에는 백상예술대상 연극 부문 대상과 연출상을 휩쓸기도 했다. 요즘 일부 수입 뮤지컬들은 단순 번안 수준에 머물며 인기 스타의 활용으로 표 팔기에 급급한 제작 행태를 보인다. 시대를 거꾸로 돌리는 우를 범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반성하게 되기도 한다. 음반으로나마 아쉬움을 달래보길 추천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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