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길 떠나는 가족’의 오브제 디자이너 이영란

사물에 대한 올곧은 믿음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4년 8월 1일 12:00 오전

이영란에게 오브제는 사람과 사람을 연결해주는 좋은 언어다. 물체가 배우와 만나 함께 움직이고 영혼을 통해 나오는 언어가 그녀의 손끝에서 흘러나온다

지난 7월 명동예술극장에서 막을 내린 연극 ‘길 떠나는 가족’(작 김의경·연출 이윤택)에서 많은 관객들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 중 하나는 무대, 그 자체였다. 하나의 작품을 완성하는 데 필요한 각 요소가 유기적이면서도 촘촘하게 자리 잡은 느낌이 강했다. 특히 1991년 초연 당시 작품의 오브제 디자이너로 참여했던 이영란이 이번에 다시 올라간 무대에서 미술감독으로 나섰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이중섭의 삶과 예술을 다룬 작품을 효과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이영란은 무대를 비어 있는 캔버스 삼아 이중섭의 예술과 삶을 펼쳐놓았다. 특히 이번 무대미술에서 쉽사리 눈을 뗄 수 없었던 것은 작품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 들어간 오브제였다. 이중섭의 작품 속에 빈번하게 등장하는 소와 어린아이, 나비며 꽃이며 물고기까지 모두 한지와 나무를 재료 삼아 만들어낸 오브제는 이중섭의 그림을 보듯 정겨웠다. 마치 눈앞에 펼쳐진, 어른들을 위한 동화와도 같았다.

배우들이 사용하는 소품이며 장치들을 모두 목탄화로 그린 것도 인상적이었다. 이것은 관객에게 의도적인 평면 형태로 보였는데, 그로 인해 화가의 인생을 그려낸 작품에 통일감이 더해졌고, 작품의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이 더 쉽고 명확해졌다.

공연이 끝난 뒤에도 무대 위에 펼쳐졌던 풍경들이, 오브제들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래서 이 오브제에 생명을 불어넣은 오브제 디자이너 이영란의 이야기가 궁금했다. 그리고 함께 나눈 대화의 끝에 더욱 선명해진 이영란은 채움보다 비움을, 쌓아 올리기보다 소멸시키는 데 시선을 고정시키고 살아가는 사람이었다.

‘길 떠나는 가족’이 초연된 지 23년이 흘렀다. 이미 빛바랜 듯한 연극을 지금의 무대에 다시 올리면서 고민이 적지 않았을 것 같다.

시대가 많이 변했다. 그 상황에서 재공연의 의미를 어디에서 찾아야 할지가 고민이었다. 이윤택 연출가와 함께 도달한 사고의 지점은 옛것을 옛것으로만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역사와 시간의 흐름 속에서도 여전히 볼만한 작업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초연이 열 발자국 앞서간 느낌이었다면 이번에는 딱 한 발자국만 앞서고 거기에 서서 관객과 만나려고 노력했다.

작품 자체가 또 하나의 그림이었고, 어른을 위한 한 편의 동화 같은 느낌이었다. 아름답지만 동시에 슬픈 감정들이 솟아나 작품을 보고 난 뒤에도 가슴이 먹먹했다. 배우의 연기뿐 아니라 무대미술에서 비롯된 영향이라고 생각한다.

무대에는 흑백이 명확하다. 굉장히 차가운 느낌인데, 그것을 목탄화 스케치로 표현한 데서 동화적인 느낌이 부여된 것이라 생각한다. 모던한 요소와 질퍽한 이야기가 절묘하게 만나서 관객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 사이를 모두 오갔을 것이라 생각한다.

목탄화를 사용한 특별한 이유가 있나.

암울한 시대적 배경을 담는 데 목탄화가 잘 맞을 것이라 생각했다. 목탄화는 나무를 태워서 그 검댕으로 그림을 그리는데 굉장히 거칠면서도 명암이 뚜렷하다. 검댕을 뭉개면서 그림을 그려내는 것이기에 일반적인 붓 터치가 지닌 강함과는 또 다른 느낌이 있다.

오브제 전반에 목탄화를 사용했지만 일부분에는 색을 부여했는데.

컬러 대비를 통해 목탄화가 더 차갑게 느껴지는 효과를 노렸다. 이중섭 이야기를 서사적으로 풀 때 그의 내면이 보이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내면이 드러날 때 관객과 소통되고 울림을 갖는데, 그의 내면은 곧 그림이다. 그림을 오브제로 상징적인 퍼포먼스를 펼치고, 그다음 컬러가 중간중간 들어가는 것으로 이중섭의 내면을 표현하고 싶었다.

목탄화로 그린 펌프를 배우가 직접 손으로 움직여 물방울이 그려진 패널을 돌리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원래 펌프는 수직 운동만 해도 알아서 움직이게 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게 잘 안 되어 배우가 손으로 돌리게 된 것인데, 결과적으로는 그게 더 효과적이었다. 작품의 방향성에도 부합하고. 그 부분을 통해 우리가 갈 길은 ‘세련된 아날로그’라는 생각이 들었다. 만들지 못해서 아날로그가 아니라 한쪽은 디지털 한쪽은 아날로그, 그 경계에 있는 것이다.

무대 위에 등장하는 주된 오브제를 입체가 아닌 평면으로 나타낸 것이 극이 ‘화가’의 이야기라는 것에 힘을 실어주면서 모든 오브제가 극에 밀착된 느낌으로 다가왔다.

화가의 이야기이니 무대를 캔버스로 생각하고 이중섭의 삶을 넣으면 잘 표현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를테면 이중섭의 그림 안에 이중섭에 대한 내용을 넣는다든가, 이중섭의 삶 안에 그의 그림을 넣는 방식이다. 그래서 공연에는 2차원의 그림이 필요했고, 어울렸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무대에 등장하는 오브제가 목탄화로 그린 그림인 것을 아는 상황에서 완전한 입체인 사람이 그림(평면)과 만나고 대립했을 때 각각의 특성이 더 극적으로 살아나는 효과가 일어나더라. 이윤택 연출가와 함께 설정했던 부분인데 잘 맞아떨어진 것 같다. 새로운 무대 언어가 이번에 나오지 않았나 싶다.

극에서 가장 중요한 오브제로 손꼽을 수 있는 것은 공연의 시작과 끝에서 이중섭의 손에 들려 있는 인형이다. 서로 비슷한 것 같지만 조금씩 차이가 있어 보이던데.

무대에는 모두 세 종류의 인형이 등장했다. 이중섭에게 아이가 셋 있었는데, 거기에서 모티프를 가져와서 제작했다. 공연 초반에는 모든 오브제가 흑백인 상태에서 바느질 인형이 등장한다. 바느질이 가지고 있는 섬세함과 약간의 까슬까슬한 성질, 색깔을 반영했다. 두 번째로 이중섭과 가족이 제주도에 갔을 때는 뜨개 인형이 등장한다. 뜨개 인형은 순하다. 실제로 뜨개질을 할 때 찔려도 하나도 아프지 않고, 움직이는 놀이 인형으로 삼기에도 좋다. 마지막 장면에 등장하는 목각 인형은 이중섭이 가는 길을 안내하는 동시에 동반자로서 걸어가는 존재다. 목각 인형이 등장할 때 탁탁 발자국 소리가 났으면 해서 배우들에게도 이 부분을 주문했다.

 

사람과 사람을 연결해주는 언어, 오브제

‘레이디 맥베스’에서는 흙과 물, ‘오이디푸스’에서는 석회 분필을 사용했다. 흔하디 흔한 오브제들도 이영란의 손에만 들어가면 그전과는 다르게 활용된다는 인상을 받곤 한다. 어떤 방향과 의도를 갖고 오브제를 대하는지 궁금하다.

흙·나무·밀가루·물·얼음·모래 같은 자연적인 것들, 원시적 오브제에 관심이 많다. 이것들은 무언가 되기 이전의 원래 재료들이다. 이런 원초적인 재료들은 무언가를 만들기도 수월하고, 소멸시키기도 좋다. 그래서 좋아한다. 이번에 사용한 종이·나무·물·목탄 모두 자연적인 소재다.

손끝에서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사람이라면 사라지는 것에 대한 아쉬움이나 거부감이 있을 것 같은데, 오히려 ‘소멸’에 특별한 가치를 부여하는 같다.

오브제로 작업을 하지만, 정작 나는 물건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흔히 사람들은 내가 많은 작품을 갖고 있을 것이라 생각해서 작업실을 궁금해하는데, 막상 와보면 볼 것이 거의 없다. 새로운 사물에 대한 집착도 거의 없어서 1년 동안 안 쓰는 물건이 생기면 바로 처리한다. 연극을 좋아하는 이유도 그와 비슷한 맥락이다. 그 시간, 그 공간에서 소통하고 관계를 맺고 나면 그 시간은 사라진다. 공연도 마찬가지고. 그게 나에겐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이영란이 정의하는 오브제란 무엇인가.

사람과 사람을 연결해주는 좋은 언어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선물에 비유해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누구나 좋은 선물에서 감동을 받는다. 값나가는 물건도 좋겠지만 작은 나뭇잎 하나에도 의미와 영혼을 담는다면 누군가를 감동시킬 수 있다. 이것은 감성적으로 꼭 경험해야 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공감각적인 경험을 통해 사물과 소통하는 연습을 하는 것도 좋겠다.

오브제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어릴 적부터 손으로 갖고 노는 걸 좋아했다. 그때 나무나 흙을 다뤘던 것이 나중까지 이어져 정말 친밀해졌고, 이 재료들이 손에서 자유롭게 논다는 느낌이 있다. 그 외에는 오브제 언어를 만들어나가기 위한 교육을 잘 받았다고 생각한다. 미술뿐 아니라 인형극과 인형 제작을 공부했고, 조각도 배웠다. 재료에 관해 충분히 알고 있고, 사물의 성격과 특징을 가지고 극과 제작을 같이 할 수 있는 것이 다른 사람들과 차별되는 지점이지 않을까.

이영란의 이름 곁에는 늘 ‘오브제아트’라는 단어가 따라다닌다. 아직 국내 관객들에게는 생소한 용어인데.

오브제아트를 우리말로 물체극이라고도 표현한다. 물체극이라는 것은 오브제가 오브제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배우에 의해 움직이게 되면서 언어를 갖는 것이다. 물체 혼자서는 절대로 할 수 없는 이야기, 배우 혼자서도 할 수 없는 이야기, 물체와 배우가 만났을 때 배우에 의해 물체가 움직이면서 영혼을 통해 나오는 언어, 그 둘만이 낼 수 있는 언어를 물체극이라 할 수 있다.

물체에 담긴 이야기를 끄집어내는 것인가, 아니면 물체에 새로운 이야기를 부여하는 것인가.

전자다. 예를 들어 밀가루의 경우, 가루가 물과 만나 반죽이라는 새로운 존재가 된다. 가루·물·반죽 이 세 가지는 모두 완전히 다른 것들이다. 이러한 변화가 나에게는 이야기가 된다. 가루가 물을 만나 조물조물했더니 탄력을 가진 반죽이 되고 수축되면서 살아 있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내가 사물을 바라보는 시각이다.

요즘의 관심사는 어떠한가.

나는 사람들이 행복했으면 좋겠다. 그런데 이 땅에서 사람들이 원하는 행복을 보면 내가 그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없다. 다만 오브제를 통해 자신의 지친 삶을 바라보고 스스로를 위로하며 치유할 수 있는 공연이나 체험을 만들고 싶다. 그런 여지가 있어야 우리의 삶이 조금은 풍요로울 수 있지 않을까. 지난해에 이어 올해에도 조각을 계속 이어갈 생각이다.

글 김선영 기자 사진 심규태

연극 ‘길 떠나는 가족’ 다시 보기

 

지난해부터 이어진 연출가 이윤택의 행보가 새삼 놀랍다. ‘오레스테스 3부작’부터 ‘혜경궁 홍씨’를 거쳐 올해 초 ‘피의 결혼’과 ‘길 떠나는 가족’을 명동예술극장에서, 그리고 하반기에는 국제공연예술제 참가작에도 이름을 올리고 있다. 쉴 새 없이 공연을 만들어내는 에너지도 경이롭지만 그 작품 하나하나가 세상에 대한 묵직한 직언들을 쏟아놓고 있으니 말 그대로 노장(老將)의 귀환이다.

1991년 초연 이후 꼭 23년 만에 다시 공연된 ‘길 떠나는 가족’은 그 자체가 한 폭의 그림 같은 작품이었다. 이중섭의 삶과 예술세계를 조망하는 김의경 작가의 작의(作意)를 견지하면서 무대 전체를 하나의 화폭으로 설정했고, 그로 인해 무대 위의 인물들은 마치 수많은 이중섭 그림 속의 피사체인 듯 장면마다 서로 다른 그림들을 만들어냈다. 여기엔 이영란 미술감독의 힘이 컸는데, 실제로 이중섭의 그림 속에 등장하는 소와 꽃과 물고기와 아이들을 담백하면서도 소박하게 만들어 무대 곳곳에 배치했고, 작품에 필요한 주전자와 컵 같은 소도구들 역시 무채색의 평면으로 제작해 무대 위 모든 것이 그림으로 완성될 수 있도록 했다. 매표소에도 무대에서 사용된 오브제가 곳곳에 놓여 있는 것을 보면 그녀의 섬세함을 짐작할 수 있다.

무대의 그림을 완성한 것은 무엇보다도 배우들이다. 이중섭의 그림 ‘길 떠나는 가족’이 살아 움직이도록 만든 배우들의 앙상블도 아름답고, ‘애들과 물고기와 게’를 만들어낸 인형과 배우들이 조화롭고, 그 가운데서 무게중심을 잡고 있는 배우 지현준의 성장도 아름답다. 비록 지현준의 캐릭터에 대한 과도한 집중 때문에 오히려 심신이 병약한 이중섭으로 그려지지 못하고 따라서 그의 고뇌가 관객들에게 온전히 전달되지 못한 아쉬움이 있지만, 이 배우가 언제 이만큼 성장했는지를 발견하는 것은 커다란 즐거움이었다.

연극 ‘길 떠나는 가족’은 이영란 미술감독이 준비한 캔버스 무대에 우리의 장단과 노래들을 배치해 다양한 색채를 더한 이윤택 연출의 감각, 그리고 그 속에 적절한 오브제가 되어 이중섭의 그림을 그대로 재현한 배우들의 노력으로 완성된 연극으로 이중섭의 삶을 그려낸 아름다운 작품이었다. 지독한 외로움과 가난에 직면해도 버리지 않았던 그림에 대한 이중섭의 열정은 서로 반목하고 비난만을 일삼으며 무엇에 대한 열정도 없이 무기력해진 지금의 우리에게 큰 질문을 던진다. 당신의 뜨거움은 무엇인가? 예술이 존재해야만 하는 이유다.

글 배선애(연극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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