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그곳에 가다! 체코 프라하 루돌피눔

낭만과 향수가 반짝이는 예술가의 집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4년 8월 1일 12:00 오전

체코의 심장 프라하의 참된 이름은 바로 ‘유럽의 음악학원’이다.

체코 문화의 성지인 야나 팔라하 광장 중심에는 루돌피눔이 있다


▲ ⓒche

2005년 드라마 ‘프라하의 연인’이 인기리에 방영됐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다리로 꼽히는 카를교에 두 주인공이 등장할 때 아스라이 떠오르는 노스탤지어! 이는 마라톤 코스로 나오는 구시가지와 비세흐라트 성 주변을 두 주인공 재희와 상현이 달려갈 때도 마찬가지였다. 체코인들이 ‘블타바’라고 부르는 몰다우 강변 노천카페에서 신비로운 야경을 바라보며 속삭이는 사랑의 밀어. 그곳은 분명 인공적이고 온통 회색빛 빌딩뿐인 도시에서 갑갑하게 살아가는 우리의 자화상과는 차원이 다른, 순수의 세계이자 잃어버린 동심의 발원지다. 또한 대문호 카프카와 ‘신세계로부터’를 작곡한 드보르자크를 배출한 최고의 예술 도시다. ‘체코 음악의 아버지’ 안토닌 드보르자크는 스메타나의 뒤를 이어 체코 음악을 세계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또한 스메타나·야나체크와 함께 체코 민족주의 운동의 가장 위대한 작곡가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음악의 거장들과 카프카 같은 대문호를 고이 품고 있는 서부 보헤미아 지방과 동부 모라비아 지방으로 이분되는 체코의 심장은 바로 프라하다. 일찍이 ‘동유럽의 진주’라 불리며 천년의 역사를 거슬러온 프라하는 유네스코가 진작부터 도시 전체를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할 만큼 중세의 모습 그대로를 간직하고 있다. 14세기 신성로마제국의 카를 4세는 프라하를 도읍으로 정하고 황금기를 구가하는데, 이때 프라하는 유럽에서 파리 다음가는 큰 도시였다. 그러나 ‘100탑의 도시’ ‘북쪽의 로마’라고 일컬어지는 프라하의 참된 이름은 바로 ‘유럽의 음악학원’이다.

체코인의 ‘어머니 강’이라 불리는 블타바. 프라하 한가운데를 흐르는 블타바 강의 13개 다리 중 가장 유명한 카를교 동쪽 강변에는 스메타나 기념관이 자리해 있다. 그리고 스메타나 기념관 건너편 길가에 우뚝 선 유서 깊은 건물은 국민극장이다. 1881년 스메타나의 오페라 ‘리부세’로 개관 공연을 한 국민극장은 ‘체코어에 의한, 체코인을 위한 오페라’를 위해 만든 공연장이다.

프라하에서 가장 번화한 거리는 국립박물관에서 북쪽으로 난 바츨라프 광장이다. 이 길을 따라 걷다가 오른쪽으로 돌면 오베츠니 둠(프라하 시민회관)이 있다. 스메타나홀은 오베츠니 둠의 메인홀로 매해 5월 12일 프라하의 봄 페스티벌(Mezinárodní hudební festival Pražské jaro)의 개막 공연이 열리는 곳으로 유명하며, 프라하 심포니가 입주해 있다.

모차르트는 생전에 “나의 오케스트라는 프라하에 있다”며 프라하에 각별한 애정을 표했다. ‘피가로의 결혼’의 대성공으로 프라하와 인연을 맺게 된 모차르트는 자신의 음악을 이해하지 못하고, 정치적인 이유로 이런저런 트집을 잡았던 빈보다 프라하를 진정 더 사랑했다. 1787년 10월 오페라 ‘돈 조반니’의 초연을 한 곳이 바로 구시가 광장 근처의 에스타테 극장이다. 프라하의 봄 페스티벌 기간에는 이곳에서 모차르트의 오페라가 상연된다. 모차르트가 프라하에 올 때마다 머물렀던 베르트램카는 현재 모차르트 박물관으로 공개되고 있다. 이렇듯 프라하는 ‘음악학원’에 걸맞은 훌륭한 공연장을 가지고 있다. 체코가 세계에 내세우는 프라하의 봄 페스티벌은 프라하 전역의 총 17개 공연장에서 펼쳐진다.


루돌피눔의 탄생 이야기

체코를 대표하는 연주회장은 어딜까? 바로 프라하의 봄 페스티벌의 연주회가 열리는 루돌피눔 ‘드보르자크홀’이야말로 세계 정상급의 건축미와 음향을 자랑하는 체코 최고의 콘서트홀이다. 프라하 성을 품고 있는 구시가 스타레 메스토에서 걸어 내려와 블타바 강을 굽어보며 마네수프 다리를 건너면 야나 팔라하 광장이 나온다. 이곳이 바로 소지구 말라 스트라나의 초입이다. 이 광장의 북쪽에 루돌피눔이 당당히 서 있다. 야나 팔라하 광장은 체코 예술, 교육기관의 총본산이다. 루돌피눔 개관에 이어 예술 아카데미가 남쪽에 둥지를 틀었고, 1900년대에 장식예술 박물관이 문을 열었다. 1920년대에 카를로바대학교(프라하대학교) 예술학부가 생겨 야나 팔라하 광장은 체코의 문화를 책임지는 성지와도 같은 곳이 됐다.

1873년 체코 유수의 저축은행 체스카 스포리텔나는 현재 루돌피눔이 있는 야나 팔라하 광장의 땅 일부를 사들였다. 창립 50주년을 기념해 ‘예술가의 집’을 짓기 위해서였다. 국가와 궁정의 도움을 받지 않는 기업의 예술 후원이라는 점에서 루돌피눔은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와 많이 닮았다. 1743년, 12명의 상인이 12명의 음악가를 지원하며 콘서트를 열면서 시작된 게반트하우스의 역사가 프라하에 제대로 전수된 셈이다.

합스부르크 제국의 루돌프 황태자가 이 계획의 후원자를 자처했다. 체코와 오스트리아에서 건축가들이 건축 공모전에 몰려들었다. 그리하여 체코 사람 요세프 슐츠와 요세프 지테크가 뽑혔다. 두 거장의 지휘로 10년이 넘는 꼼꼼한 공사 끝에 1885년 2월 8일 첫 콘서트를 열게 된다. 루돌프 황태자는 빈에서 직접 프라하로 달려와 개관 공연을 지켜봤다. 그의 이름을 따서 루돌피눔 명칭이 정해진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당시 프라하에는 국민극장과 루돌피눔이 네오 르네상스풍의 웅장함을 자랑하는 유일한 건물이었다.


▲ 야나 팔라하 광장 북쪽에 당당히 서 있는 루돌피눔

루돌피눔과 체코 필하모닉의 기구한 역사

빈 슈타츠오퍼의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공연을 따로 마련해 선보인 것이 빈 필하모닉의 창단으로 이어졌다면, 프라하 국립극장 단원들이 1895년 오페라 반주에서 벗어나 자신들만의 음악회를 시도한 것이 체코 필하모닉의 시작이다. 그리하여 1896년 1월 4일 루돌피눔에서 역사적인 창단 연주회의 지휘를 드보르자크가 맡았다. 이때 연주한 곡은 드보르자크의 ‘신세계로부터’다. 그 뒤로 바츨라프 탈리흐·카렐 안체를·바츨라프 노이만 등 체코가 내세우는 지휘자들이 거쳐간 체코 필하모닉은 ‘드보르자크홀’에 자연스레 둥지를 틀었다. 하지만 곧 시련에 직면했다. 오케스트라가 본업이었던 단원들은 1901년 오페라 총감독 카벨 코바조비치에 대항해 파업을 감행했다. 이에 코바조비치는 전원 해고라는 초강수로 맞섰고, 밖으로 내몰린 체코 필하모닉은 먹고살기 위해 살인적인 스케줄을 감내했다. 체코가 합스부르크 제국으로부터 독립한 뒤, 루돌피눔을 국회의사당으로 리모델링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전용 홀도 잃었다. 나치 강점기에는 루돌피눔에서 독일 필하모닉이 연주하는 것을 눈앞에서 바라봐야 했다. 결국 1945년 국립 오케스트라로 지위를 얻고 나서야 체코 필하모닉은 루돌피눔의 진정한 주인이 될 수 있었다.

1908년 5월 23일 루돌피눔은 역사적인 공연을 치른다. 체코 보헤미아 지방의 칼리슈트에서 태어난 작곡가 구스타프 말러의 교향곡 7번을 말러가 직접 지휘하며 체코 필하모닉이 초연한 것이다. 이후 체코 필하모닉은 말러 교향곡에 관한 최고의 해석을 보인다. 그리고 1946년 제1회 프라하의 봄 페스티벌에서 루돌피눔은 오베츠니 둠과 함께 페스티벌의 메인홀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제1차세계대전 후 1919년부터 루돌피눔은 독립한 체코슬로바키아의 국회의사당으로 사용됐다. 콘서트 전용 홀의 필수 조건은 파이프오르간이다. 루돌피눔의 파이프오르간 역사는 기구하다. 국회의사당의 연단 설치 때문에 1884년 프랑크푸르트의 오르가니스트 빌헬름 자워가 제작한 파이프오르간이 브르노 음악원으로 옮겨졌다. 대신 그 자리에 초대 대통령 토마스 마사리크의 상이 조각되었다. 파이프오르간은 1940년 나치 침공 이후에야 되돌아올 수 있었다. 그리고 1975년 리게르 클로스의 파이프오르간이 최종 낙점되면서 자워의 파이프오르간은 다시 철거됐다.


▲ 프라하의 봄 페스티벌의 연주회가 열리는 드보르자크홀 ⓒPrague Spring/Zdeněk Chrapek

루돌피눔, 다시 날개를 달다

나치는 1939년부터 안토닌 엥겔이 주도하는 ‘예술가의 집’으로 복원을 원했다. 드보르자크홀은 완벽한 음향을 되찾았고, 작곡가 요세프 수크의 이름을 딴 실내악을 위한 수크홀도 새롭게 문을 열었다. 하지만 나치의 체코 지역 총사령관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는 루돌피눔 내의 멘델스존 동상을 파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히틀러가 싫어하는 유대인이라는 이유에서였다. 이는 1936년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앞에 서 있던 멘델스존의 동상을 야밤에 제거한 나치의 만행과 동급이었다. 이 와중에 인부들은 히틀러가 좋아하는 작곡가 바그너의 동상을 치우는 해프닝을 벌이기도 했다.

1945년 해방과 더불어 루돌피눔은 드디어 체코 필하모닉의 전용 홀이 됐다. 이듬해 제1회 프라하의 봄 페스티벌이 여기서 개최됐다. 1990년 민주화를 이룬 체코 정부는 2년에 걸쳐 대대적으로 루돌피눔을 리모델링했다. 드보르자크홀은 1,104석으로 자리가 늘어났고 수크홀은 220석이 됐다. 또한 무려 500명이 동시에 회의와 무도회를 할 수 있는 드보르나, 즉 세리모니 홀이 새롭게 만들어졌다. 여기에 칼럼 홀·프레지덴셜 살롱·웨스트 홀까지 루돌피눔은 공연뿐 아니라 국제회의·기자회견·패션쇼·경매·파티에 이르는 모든 회합을 주도하며 수익 사업에도 적극 나서고 있다.


▲ 수크홀 내부 ⓒEster Havlova

명실공히 체코 음악의 자랑

루돌피눔의 외관은 드레스덴 젬퍼오퍼와 닮았다. 출입구 앞 광장에는 드보르자크의 동상이 서 있고, 안으로 들어가면 화려한 샹들리에가 반짝이는 로비가 나타난다. 로비를 돌아 들어가면 드보르자크홀이 그 위용을 보인다. 전면에 아름다운 파이프오르간이 자리하고 천사가 날아다니는 천장화는 감탄이 절로 나오게 한다. 무엇보다 드보르자크홀은 세계 최고의 음향을 자랑한다. 체코필의 음반 대부분이 여기서 녹음되었으며, 스메타나 4중주단·수크 트리오 등 체코 정상의 실내악단이 모두 이곳에서 연주하거나 녹음했다.

2004년 1월 4일, 필자는 드보르자크 서거 100주년을 맞아 루돌피눔에서 열린 첫 공연을 관람했다. 그 자리에는 바이올리니스트 이성주가 초청돼 드보르자크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연주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동이 드보르자크홀의 환상적인 어쿠스틱과 맞물려 가슴을 울렸다.

오는 9월 체코 필하모닉은 120회 시즌을 개막한다. 특히 2014/2015 시즌 ‘드보르자크 프라하’ 시리즈 공연을 대대적으로 홍보하고 있다. 9월 8일 첫 공연은 체코필의 음악감독 이르지 벨로흘라베크가 지휘하는 드보르자크 교향곡 3번과 요세프 스파체크의 드보르자크 바이올린 협주곡으로 서막을 연다. 체코 음악은 단연코 루돌피눔에서 느껴야 한다.


▲ 루돌피눔 출입구 앞 광장에 있는 드보르자크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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