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네바 대극장의 알프레도 카탈리니 오페라 ‘왈리’

성악가에겐 너무나 어려웠던 무대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4년 8월 1일 12:00 오전

현지 언론의 악평과 호평이 엇갈린 오페라 ‘왈리’. 연출가 체사레 리에비는 “미래가 말해줄 것이다”라는 말로 공연에 의미를 두었다. 우리의 젊은 테너 이용훈이 주역 하겐바흐 역을 맡아 열연했던 그 현장을 소개한다


▲ 하겐바흐의 뒤를 따라 눈사태에 몸을 맡기는 왈리

지난 6월 18~28일 제네바 대극장에서 알프레도 카탈리니의 오페라 ‘왈리(La Wally)’가 공연됐다. 제네바 대극장에서 50년 만에 다시 열린 ‘왈리’는 최근 프랑스와 이탈리아 오페라 레퍼토리에서 큰 명성을 자랑하는 이탈리아 지휘자 에벨리노 피도와 이탈리아 출신의 유명 연출가 체사레 리에비가 호흡을 맞췄다. 여기에 주역부터 조역까지 탁월한 캐스팅으로 기염을 토했다. 필자는 6월 18일 첫 개막 공연을 관람했다.

픽션과 전기가 혼재되어 있는 ‘왈리’는 카탈리니의 다섯 번째 오페라이자 그의 마지막 작품으로, 1892년 라 스칼라 극장 초연 당시 큰 호응을 얻었다. 그러나 1893년 카탈리니가 결핵으로 요절한 후 이 작품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희미해져갔다. 농도 엷은 작품성에 이를 커버하기 위해 성악가들이 진 빠지게 노력을 해야 하는 점 때문이었다.

1907년 라 스칼라 극장, 1909년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서 이 작품을 올린 토스카니니는 ‘왈리’의 추종자였다. 섬광 같은 광채를 자랑했던 마리오 델 모나코의 힘과 둥글고도 폭이 큰 보이스로 왈리 역을 빛냈던 레나타 테발디의 퍼포먼스는 최고의 레퍼런스로 알려져 있다.

아니나 다를까. 이 같은 작품을 무대에 올린다는 것은 야심과 의지로만 되는 것은 아니었다. 총감독 토비아스 리히터는 애초 이 작품을 위해 하겐바흐 역에 그레고리 쿤데와 왈리 역에 크라시미라 스토야노바를 주인공으로 점찍었다. 하겐바흐 역에는 심오하고 드라마틱한 음색의 쿤데가 적격이라는 분석이었다. 그러나 리히터가 꿈꾸던 이 이상적인 캐스팅은 스토야노바의 거부로 성사되지 못했고 왈리 역엔 아이노아 아르테타와 모레니크 파다요미, 두 소프라노가 함께 캐스팅됐다. 그리고 하겐바흐 역엔 쿤데 대신 한국인 테너 이용훈이 발탁됐다. 토비아스 리히터는 “그의 의지가 강했어요”라며 이용훈의 헌신적인 참여에 경의를 표했다.

드라마틱하면서도 예측할 수 없는 ‘왈리’의 무대

1막과 2막의 무대 배경은 티롤 지방의 작은 마을이다. 멀리 보이는 눈 덮인 알프스의 산봉우리들과 작은 교회, 오른쪽으로 보이는 스트로밍거의 집으로 꾸민 장치와 민속 의상은 마치 우편엽서 같았지만 대본에 충실한 편에 속했다.

소프라노 레지에로 이반나 레시크 사디프스카는 왈리의 친구인 발터 소년 역으로 분해 큰 갈채를 받았다. 이 분위기를 깨며 하겐바흐가 등장하자 호른이 뿔피리처럼 울려 퍼지고, 사냥꾼들은 그가 죽인 거대한 곰을 거꾸로 매단 채 들고 나온다. 훤칠한 키에 외향적인 성격을 자랑하며 사냥담을 노래하는 이용훈의 등장은 주목할 만했다. 이어서 남장을 한 모습으로 등장한 왈리는 그녀를 짝사랑하는 겔너(비탈리 빌리 분)와의 결혼을 강요하는 아버지와 분쟁에 들어간다.

왈리는 어머니 없이 아버지 손에 자란 야성적인 처녀로, 눈 덮인 산봉우리에서 살며 아버지가 정한 신랑감 대신 아버지가 싫어하는 하겐바흐를 선택하는 고집 센 인물이다. 이 작품의 주된 줄거리는 바로 하겐바흐에 대한 왈리의 강박적이고 눈먼 사랑에 관한 것으로, 하겐바흐가 죽자 결국에는 그녀 또한 자살하는 것으로 끝난다.

짙은 금발 가발에 불꽃같은 열정과 차가운 냉정함, 연약하면서도 강철 같은 의지를 지닌 이 왈리 역으로 분한 아이노아 아르테타는 캐릭터에 밀착된 모습을 보여줬다. 스트로밍거 역의 쟈보는 대화하듯 유연한 프레이즈로 작품의 음영을 부각시켰고, 겔너 역의 빌리는 뉘앙스 넘친 음색과 심리 변화로 호평을 연발했다.

2막은 교회 세트가 공중으로 상승하고, 점점 더 커지면서 일종의 클로즈업 효과를 연출하고 있었다. 신나고 새로운 영감에 찬 코러스가 울려 퍼지는 마을 광장 장면으로, 세상을 떠난 아버지의 유산을 상속받고 자유로워진 왈리가 진주 목걸이와 레이스 달린 원피스를 입은 채 도도하게 등장한다. 왈리는 하겐바흐와 결혼을 앞둔 아프라(아흘리마 무함디 분)를 질투해 술잔을 얼굴에 던진다. 이를 복수하기 위해 하겐바흐와 마을 주민들은 어리석은 내기를 한다. 누가 차가운 왈리의 키스를 얻어내느냐였다. 영리한 왈리는 처음엔 하겐바흐의 구애를 완강히 거절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점차 빠져든다. 복수심에서 출발한 하겐바흐 역시 점점 더 왈리에게 빠져든다. 끝내 하겐바흐는 왈리를 바닥에 눕히며 관능적인 자세로 키스를 받아낸다. 멜로라면 멜로이지만 이용훈과 아르테타는 연인의 미묘한 심리를 흥분과 호기심이 넘치는 것으로 승화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 강도 높은 감정은 “아! 하하!” 하는 마을 사람들의 조롱에 찬 웃음소리로 박살이 난다.

3막은 하늘의 구름과 산봉우리가 만나는 하얀 설산 꼭대기에 자리 잡은 왈리의 집이다. 안개 사이로 이리저리 얽히고설킨 암벽 가운데에 떨어지면 죽는 계곡이 설정되어 있다. 하겐바흐는 사랑을 고백하고자 왈리를 찾아온다. 겔너는 그를 계곡 사이로 떠밀고 왈리는 하겐바흐에 대한 복수심보다 강한 사랑에 이끌려 스스로 밧줄을 타고 내려가 하겐바흐를 구한다. 그녀가 하겐바흐에게 키스하며 이별을 고하는 장면에서 오케스트라는 왈리의 아리아 멜로디를 다시 반복한다.

작품은 점점 더 드라마틱하고 예측할 수 없는 대단원을 향해 청중을 흡인했다. 음악적으로도 카탈리니는 푸치니와 동시대를 살았지만, 사실적인 베리스모 오페라를 혐오했고 ‘왈리’는 분명 낭만풍 오페라로 쓰였다. 바로 이 점에서 토비아스 리히터는 이 작품을 설명하기 모호한 전대미문의 작품이라고 덧붙여 말했고, 에벨리노 피도는 “이 작품은 드라마 기법상 부족했던 감정의 차원을 음악이 대신하고 있다”라며 ‘왈리’의 아름다움을 강조했다.

카탈리니는 1막 초부터 사냥꾼의 피리나 에델바이스의 샹송, 왈리의 아리아인 ‘잘 있거라, 고향집이여’ 같은 라이트모티프를 효과적으로 쓰고 있다. 그러나 3막에서 4막으로 넘어가며 듀오·코러스 같은 형식미가 모호해지면서 멜로디는 거의 무한선율처럼 쉬지 않고 두 연인의 내면을 심오하게 그리는 데 우선권을 둔다.

4막은 토속적인 1막과는 전혀 달랐다. 하늘과 구름 사이에 빙하를 그린 무대장치는 독일 낭만주의 화가 카스파르 다비드 프리드리히의 그림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하겐바흐의 추락을 자책하며 혼자 남은 왈리는 하얀 잠옷 차림에 검은 가운으로 얼굴을 가린 채 차가운 눈이 덮인 바위 위에 앉아 있다. 금방 얼어붙을 것만 같아 발퀴레로 불렸던 왈리의 고귀함과 존엄성은 놀랍게도 브륀힐데 같아 보였다.

발터가 찾아와 마을로 내려가자고 하지만 그녀는 사양한다. 부상당한 팔로 찾아온 하겐바흐에게 왈리는 자신이 그의 암살을 주문했다고 고백하고, 하겐바흐는 그녀를 가슴에 품은 채 사랑을 고백한다. 이후 오케스트라의 음향효과처럼 거센 바람과 폭설이 떨어지는 가운데 구조를 청하러 떠난 하겐바흐는 눈사태로 죽고 만다. 이윽고 왈리 역시 거대한 눈사태에 스스로 몸을 맡긴다.


▲ 왈리에 대한 복수심을 애정으로 맞바꾼 하겐바흐

이용훈에 대한 찬반

하겐바흐 역을 맡은 이용훈을 공연 후 극장에서 만났다. 이번 무대에 오른 그의 소감은 다른 작품을 경험했을 때보다 매우 각별한 듯 보였다.

“후련합니다. ‘왈리’는 음악이 아름답지만 자주 공연되지 않아서 많은 사람이 잘 모르는 작품입니다. 이번에 캐스팅된 배우들뿐 아니라 저에게도 이 작품은 처음이었죠. 음악을 만들고 이야기를 진행해나가는 과정에서 참고가 될 만한 좋은 레퍼런스가 있었다면 좋았을 거예요. 하지만 그렇지 않아서 우리 모두는 많은 것을 창조해내야만 했습니다. 그 과정은 힘들기도 했지만 재미도 있었습니다.”

이어서 그는 “이 작품은 아주 무거운 작품입니다. 소프라노도 그렇지만 테너가 너무 육중해서 잘 불리지 않고, 그에 걸맞은 좋은 테너를 찾기도 어렵습니다. 연습을 하다가 중간에 그만두는 경우도 그 이유 때문이에요. 고음뿐 아니라 중음에서도 포르테가 많아서 아주 어렵죠. 컬러에 변화를 두지 않고 계속 포르테로만 노래하면 지루하고 너무 시끄럽게 들립니다. 오케스트라도 포르테이니까요. 포르테로 쓰인 부분들을 피아니시모로 부를 수 있는 테크닉이 있지 않으면 음색을 자유자재로 바꾸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이 작품은 마리오 델 모나코 같은 드라마틱한 스핀토 테너들만 불렀습니다. 그러나 그들도 이 작품을 하며 힘들어했습니다. 그들의 레코드를 들어보면 포르테로만 노래하죠. 저는 지휘자와 상의를 거쳐 어떻게 하면 베르디 오페라처럼 여러 가지 컬러를 쓸 수 있을지 고민했어요. 그래서 굉장히 감미로운 부분도 있고 강한 부분과 여린 부분도 존재하게 됐습니다”라며 남다른 해석을 주도했다고 덧붙였다.

그는 하겐바흐 역이 마을에서 가장 힘센 인물이자 곰을 왼손으로 때려잡는 사냥꾼인지라 작곡가가 강한 보이스를 지닌 역으로 설정한 것 같다고 분석했다. 과거에는 델 모나코가 있었지만 요즘 우리 시대에 그와 같은 큰 음향을 지닌 테너가 많지 않다고 말하는 이용훈은 이 점을 강조했다.

“저의 음량은 힘이 세거나 성량이 큰 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테크닉에서 옵니다. 사실 세계 유명 오페라 무대에서 동양인으로 대작에 주인공으로만 출연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좀 더 가벼운 도니체티의 ‘사랑의 묘약’이나 푸치니의 ‘라 보엠’ 같은 작품에서 동양인들을 볼 수 있지만, 똑같은 역량이면 동양인 대신 서양인을 쓰는 풍토로 보아 무거운 스핀토 테너 세계에서 제가 서양 테너들보다 더 뛰어난 것이 없었다면 이처럼 큰 무대에서 활동하는 것이 불가능했을 겁니다.”

그는 “연기란 힘들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스스로 집중해서 몰입하면 자연스럽게 흘러가게 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관객 또한 그것을 충분히 공감하고 느낄 수 있다는 것이 그의 믿음이었다.

반면 청중의 반응은 미지근했다. 아이노아 아르테타에게만 수줍은 브라보가 터졌을 뿐이다. 현지 언론들 역시 ‘영혼이 없는’ ‘큰 장점이 없는’으로 주된 타이틀을 장식했다. 유감스럽게도 이용훈의 광채 나는 포르테와 메사 디 보체를 두고서 ‘힘으로만 밀어붙이는, 뉘앙스를 전혀 모르는’ ‘저속한 이탈리아어 딕션… 마리오 델 모나코의 딕션도 1953년 녹음을 보면 그보다 더 좋지는 않지만…’ 등으로 코멘트했다. 물론 언론의 자유라는 차원에서 그들의 의견을 100퍼센트 존중할 필요는 있지만, 연주자의 진실과는 분명 괴리가 있어 보였다. 물론 이 점은 거의 모든 연주자에게 해당되는 문제이기도 하다.

스위스의 RTS 방송 프로그램인 아방센에서 비평가 폴 앙드레 드미에르는 “마리오 델 모나코나 레나타 테발디처럼 이 역에 어울리는 성악가가 부재한 요즘, 이 작품을 무대에 올려야 할 필요가 있을까”라는 반문을 던지기도 했다.

델 모나코와 테발디의 황금기는 신화일 뿐이다. ‘왈리’는 분명 몇몇 성악가에게 어울리는 작품이지만, 과연 그들의 캐리어에 도움이 될 것인지는 또 다른 문제다. 이같이 놀라운 작품을 사장하느니 요즘의 테너들과 소프라노들이 그들만의 감수성과 감성으로 새로운 ‘왈리’를 선보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다면 이번 제네바 대극장이 보여준 획기적인 기획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것을 실현해낸 토비아스 리히터는 “이번 기획이 성공적이었는지는 미래가 말해줄 겁니다. 단 이번 ‘왈리’는 우리 시대의 레퍼런스가 될 것임은 확실합니다”라는 말로 총감독으로서 확신을 피력했다.


▲ 하겐바흐의 강렬하고도 감미로운 음색을 선보인 이용훈

사진 Carole Parodi/Grand Théâtre de Genè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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