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 무용수 김기완

세상을 향해 비상하다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4년 9월 1일 12:00 오전

국립발레단 입단 3년 차, 길지 않은 경력이지만 김기완은 다수의 작품에서 주역으로 무대를 누비고 있다.

풋풋한 신인과 노련한 예술가의 모습을 갖춘 그를 무대 밖에서 만났다

“다른 것도 한번 해볼게요.”

라이징 스타 촬영을 위해 만난 김기완은 기자의 말이 이어지기도 전에 끊임없이 새로운 동작을 선보였다. 신중하게 동작과 구도를 고민하는 한편, 셔터를 누르기 시작하면 거침없이 날았다. 촬영은 한 시간 가까이 이어졌고 사진작가의 카메라에는 역동적인 그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겼다.

김기완은 2011년 하반기 국립발레단 인턴 단원으로 입단해 그해 12월 ‘호두까기 인형’의 왕자 역으로 주역 데뷔 무대를 가졌다. 매 연말마다 공연되는 ‘호두까기 인형’은 사실상 유망한 무용수가 자신의 춤을 알릴 수 있는 기회나 다름없다. 그는 남들보다 빨리 찾아온 기회를 거침없이 손에 쥐었고 입단 3년 차인 지금, 국립발레단 무대에서 주·조연으로 서고 있다. 주역 무용수로 무대를 이끌 때마다 부담감은 없느냐는 질문에 그는 “사람들 앞에 서는 것이 너무나 좋다. 공연이 끝나고 막이 내려오는 순간의 기쁨이 있기에 망설임 없이 다시 무대에 오른다”라며 해맑게 웃었다. 발레를 위한 정석의 길을 걸어온 그가 이제는 새로운 도전을 눈앞에 두고 있다. 무용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한 김기완에게 그의 스물다섯 해 이야기를 들어봤다.

나, 김기완의 시작 어린 시절 나는 태권도·수영을 배우던 평범한 남자아이였다. 작곡을 전공해 다양한 예술에 관심이 많던 어머니께서 잡지에 소개된 무용수를 보고 “발레 한번 해봐라”라고 말한 것이 시작이었다. 지금도 노는 것을 좋아하지만 어릴 적부터 음악을 틀어놓고 춤을 추거나 사람들 앞에서 노래 부르는 것을 좋아했다. 아마도 사람들에게 박수 받는 것을 즐겼던 것 같다. 발레를 처음 접한 게 초등학교 5학년 때였으니 무용수로서는 늦게 시작한 편이다. 처음 연습실에 들어섰을 때부터 이상하게도 어색함이 없었다. 그렇게 동네의 작은 발레학원에서 동생(김기민)과 함께 발레를 시작했다. 특출한 아이는 아니었다. 누가 보아도 그냥 발레를 해도 ‘괜찮을’ 아이였다. 발레가 전공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중학교 2학년이 되던 해에 ‘춤과 사람들’ 주최 콩쿠르에 나갔는데 그곳에서 만난 예원학교 무용부장 선생님이 예원학교 입학을 제안하셨다. 영화 ‘빌리 엘리엇’에서 탄광촌의 소년 빌리가 로열 발레학교에 입학하듯, 내게도 예술중학교 진학은 꿈같은 일이었다. 예원학교를 졸업 후 서울예고에 입학했다. 이후 한국예술종합학교를 졸업했고, 지금은 국립발레단에서 솔리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영원한 스승, 이원국 나의 춤 인생에 있어 가장 중심에 있는 아버지 같은 분이다. 예술의전당에서의 첫 만남은 아직도 생생하다. 당시 국립발레단 수석 무용수였던 이원국 선생님은 단순히 발레뿐 아니라 우리 형제와 함께 생활하며 진정한 예술가의 삶을 알려주셨다. 테크닉도 중요하지만 춤을 추기 위한 감정을 이끌어내려면 모든 생활이 예술가의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발레단과 극장을 집처럼 들락거리면서 무용수가 공연 전에 어떻게 준비하고 어떤 마음가짐으로 무대에 오르는지 생생하게 보고 배웠다. 무대에서 막 내려온 현역의 무용수가 뜨거운 땀이 맺힌 채 들어와 들려주는 이야기를 비롯한 모든 가르침이 지금까지 내게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무용 인생에서 전환점이 된 시점 한국예술종합학교 재학 당시 아킬레스건이 파열되는 부상으로 1년 정도 무용을 쉬었다. 그 시기에 컨디션은 깊은 수렁에 빠진 듯 가장 낮은 곳까지 내려갔다. 더욱이 그날은 동생 기민이가 국립발레단에서 객원 주역으로 ‘백조의 호수’ 데뷔 무대를 갖던 날이었다. 수술을 마치고 재활에만 매달린 시간 동안, 동생은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동기들도 마찬가지였다. 상대적으로 위축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정신적으로도 힘들었지만 그럴수록 독기를 품고 복귀할 날만 생각했다. 몸이 완전히 회복될 때까지 술은 입에도 대지 않았을 만큼 간절했다. 그렇게 재활을 마치고 다시 연습실로 돌아왔는데 오래도록 쉰 탓에 팔다리가 내 것이 아닌 듯 느껴졌다. 어느 때보다 무용을 그만두고 싶을 만큼 힘들었다. 하지만 당시에 느꼈던 여러 감정과 수많은 생각, 치열했던 그 순간이 지금 쉽게 쓰러지지 않도록 하는 초석이 되었다.

나의 춤 스타일 스스로 어울린다고 생각하는 역할은 ‘스파르타쿠스’의 크라수스. ‘호두까기 인형’ 이후 2012년 들어 처음 주역을 맡은 작품이다. 크라수스는 모든 권력을 가진 악의 캐릭터인데, 이 역할을 연기하면서 이전에는 몰랐던 ‘또 다른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외모 때문인지 부드러운 이미지의 역할이 어울린다는 이야기를 듣지만, 오히려 악역이야말로 내 스타일이다. ‘백조의 호수’에서도 왕자보다는 악마 로트바르트가 마음에 든다. 지난해 공연한 ‘차이콥스키: 삶과 죽음의 미스터리’에서는 퇴폐적인 분위기의 카지노 장면 군무를 췄는데, 힘든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정말 즐겁게 소화했다.

나에게 영감을 주는 존재 내 동생 김기민! 영감을 주기도, 자극이 되기도 하는 존재다. 지금은 러시아 마린스키 발레에 있어 자주 만나지는 못하고 통화로 아쉬움을 달래곤 한다. 타지에서 동생이 느끼는 외로움과 슬픔을 내가 한국에서 경험하는 감정들과 공유한다. 동생과 나누는 대화는 무대에서 ‘나’를 연출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된다. 기민이는 내 모습이 비쳐 보이는, 그래서 서로가 자극을 주고받는 ‘거울’ 같은 존재다. 거울 속 피사체가 결국 내 자신인 것처럼 동생과 나는 멀리 떨어져 있지만 항상 같은 느낌을 공유하려고 한다.

스스로 프로임을 느낀 순간 지난 3월 국립발레단 ‘라 바야데르’ 공연 당시 허벅지 근육을 다치는 바람에 공연을 잘 마무리하지 못했다. 주변에서 프로는 좋은 모습을 보여줘야 하니까 이번 무대엔 서지 않는 게 좋겠다고 만류했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내게 주어진 캐스팅은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내가 해야하는 몫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관객이 나를 보기 위해 극장에 오는 것은 아니지만 캐스팅 보드에 내 이름이 올라 있다면 아무리 컨디션이 좋지 않더라도 최선을 다하고 무대를 내려오는 게 프로라고 생각한다.

대중에게 듣고 싶은 말 한 편의 공연을 보고 난 후에 그 무용수가 좋아졌다는 말을 듣고 싶다. 내 이름은 몰라도 상관없다. 하지만 객석을 나섰을 때 공연의 여운이 진하게 남았으면 좋겠다. 그것이야말로 무용수와 관객의 공감이 이뤄졌단 의미니까.

김기완과 밀접한 타 예술 장르 여가 시간엔 영화를 즐겨 본다. 특히 멜로 영화를 좋아하는데 가만히 보고 있으면 감정이 나긋나긋해져 좋다. 발레와 같은 공연예술은 실수 하나도 용납되지 않는 무대예술이지만, 영화는 현장의 에너지가 스크린을 통해 대중에게 전달되는 영상예술이다. 어떤 매체를 통해 간접적으로 전달된다는 점이 공연예술과는 또 다른 매력인 것 같다.

2014년 계획 10월에는 국립발레단의 신작 공연이 예정되어 있다. 우베 숄츠의 ‘교향곡 7번’과 글렌 티틀리의 ‘봄의 제전’이다. 지금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작품으로, 고전적인 발레가 아닌 원초적인 움직임이 매력적이다. 연습실을 벗어나서는 연애를 하고 싶다. 이성 간의 감정을 공유하는 친구가 있으면 예술가로서 스펙트럼도 더 넓어지지 않을까. 물론 그러려고 사랑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1989 서울 출생

2008 서울예술고등학교 졸업

2011 국립발레단 입단

2012 한국예술종합학교 실기과 예술사 졸업

 

2006 제36회 동아무용콩쿠르 학생부 발레 동상

2009 제10회 뉴욕발레콩쿠르 레프코위츠상(특별상)

2009 제46회 전국신인무용경연대회 전체 대상

2012 제9회 서울국제무용콩쿠르 발레 시니어 남자 2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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