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지 루솔로의 ‘음악’

미래파 화가들이 바라본 세상, 그리고 예술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4년 10월 1일 12:00 오전

정통을 버리고 현대 문명의 역동성을 추구했던 미래주의 예술가들은 음악·미술 등의 영역을 넘어 일상으로까지 힘찬 움직임을 전하고자 했다


▲ 루이지 루솔로의 ‘자화상과 두개골’

팔이 다섯 개나 달린 피아니스트가 연주를 시작하면 음악이 자극할 수 있는 가장 민감한 영역의 세계가 눈앞에 펼쳐진다. 열 손가락도 모자라 모두 스물다섯 개의 손가락이 넓은 음역에 걸쳐 꽉 찬 화음을 빚어낸다. 파랑·노랑·빨강 띠가 피아니스트의 머리를 중심으로 소용돌이치면서 큰 파장을 일으켜 허공을 가득 메운다. 런던 에소토릭 컬렉션이 소장 중인 화가 겸 음악가 루이지 루솔로의 대표작 ‘음악’이다.

마리앤 마틴은 문어발처럼 여러 개의 팔이 달린 피아니스트의 모습에서 네 팔과 두 다리로 힌두교 신전에서 우주의 춤을 추는 나타라자를 떠올린다. 루솔로가 음악과 미술 외에도 동양철학에 심취한 것을 감안한다면 지나친 해석은 아닌 듯하다. 하지만 피아니스트가 바로 루솔로의 자화상이라는 해석 역시 가능하다. 피아니스트의 머리에서 동심원처럼 뻗어가는 물결은 연주자의 후광 또는 아우라, 더 나아가서 소리가 빚어내는 파형이다. 건반악기의 소리 자체가 노래하기도 하고 때로는 울부짖기도 한다. 원색의 향연으로 수놓인 막대에 매달린 가면들은 음악이 빚어내는 다양한 심리 상태를 반영한다. ‘음악’이라는 표제에서 짐작할 수 있듯 그림을 통해 음악적 음향과 종지, 특정 요소의 반복, 메아리의 반복 등을 표현하려고 했다. 오페라 작곡가 푸치니는 1919년 이 작품이 걸린 전시회에 참석해 “소리와 음색을 선과 색채로 실감나게 옮겨놓았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이 그림이 자아내는 다소 괴기스러운 공포의 분위기를 모두 설명할 수 없다. 최근, 미래파 화가들에 대한 관심을 촉발시킨 마우리치오 칼베시의 저서 ‘미래파’에 따르면, 이 그림에 등장하는 동심원의 구도는 에드바르트 뭉크의 ‘절규’에서 그림 속 주인공을 감싸고 있는 여러 겹의 곡선과 맥을 같이한다. 한편 미래파의 동료 화가인 카를로 카라는 “이 그림에 등장한 여러 얼굴의 가면에서 과거 위대한 작곡가들의 혼백이 나타난 것 같다”고 말했다. 건반에서 멀어질수록 동심원 사이의 간격은 넓어진다. 루솔로가 훌륭한 피아니스트였고 새로운 음악을 추구하기 위해 음향학을 제대로 공부했다는 사실에 주목해보면 그림 속에 등장하는 선과 곡선은 상상의 결과물만은 아니다. 루솔로는 ‘자동차의 역학’이라는 그림에서 달리는 자동차 앞에서 벌어지는 음파의 압축 현상을 그려냈는데 놀랍게도 음향학 교재에서 도플러 효과를 설명할 때 나오는 그림과 흡사하다. 작곡가 루솔로는 음정의 다이내믹한 연결이 가능하다는 이유에서 옥타브를 12개의 반음 대신 24개의 4분의 1로 나눈 음계를 사용했다.


▲ 루이지 루솔로의 ‘음악’

자동차는 승리의 여신보다 아름답다

루솔로의 아버지는 가업을 이은 시계공이었지만 마을 성당의 오르가니스트로도 활동했다. 다섯 남매 중 넷째로 태어난 루솔로는 베르디 음악원에 진학한 두 형 때문에 가족과 함께 밀라노로 이사한다. 음악가 집안에서 자랐지만, 음악가 대신 화가가 되기로 결심한 것도 이때부터였다. 그래서 명화 복원 전문가 밑에서 조수로 일하면서 판화를 배웠으나 정식 미술교육은 받지 못했다. 1909년, 파밀리아 아르티스티카에서 열린 그룹전 ‘흑과 백’에 세기말 상징주의의 영향을 받은 판화 몇 점을 출품했는데 특히 니체 초상화는 음악의 리듬을 시각화했다.

루솔로는 전시회에서 만난 움베르토 보초니와 많은 얘기를 나눴다. 그리고 낭만주의와 세기말 사조에서 탈피해 현대 산업사회에 걸맞은 새로운 예술적 감수성을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을 함께 모색했다. 이듬해, 문학 동네에서 고군분투하던 루솔로는 미술·음악 등 다른 예술 장르에도 미래파의 기운을 전파하려던 참에 이탈리아 출신의 시인 필리포 토마소 마리네티를 만났다.

루솔로 등 미래파 화가들의 정신적 지주였던 마리네티는 홍보 감각에서도 빛을 발한다. 1909년 2월 20일자 프랑스 일간지 ‘르 피가로’는 마리네티가 기고한 ‘미래파의 창설과 선언문’을 1면 기사로 올렸다. 그에게 고국 이탈리아는 ‘죽은 자의 나라’ ‘관광용 타임머신’ ‘헌 옷 가게’에 불과했다. 혁명적이고도 도발적인 선언문에서 그는 ‘날개를 단 사모트라케의 승리의 여신’보다 경주용 자동차가 더 아름답다고 주장하며 세상을 깨끗하게 정화할 수 있는 것은 전쟁뿐이라고 했다. 예술 또한 폭력·잔인함·비행을 저질러도 된다고 주장했다. 이는 예술의 영역을 일상생활에까지 넓히려는 아방가르드 운동의 신호탄이 되어 영화·무용·연극 등 예술 장르뿐만 아니라 요리·장난감 등 일상의 모든 부문에서 미래파 선언이 이어졌다. 그중 선봉에 선 것은 회화와 조각이었다. 1910년 ‘미래파 화가 선언문’에 이어 ‘미래파 화가 기술 선언문’이 발표됐고 움베르토 보초니·카를로 카라·루이지 루솔로·자코모 발라·지노 세베리니 등이 서명했다. 이들은 로마제국의 영화를 그리워하며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던 르네상스를 동경하는 이탈리아 미술의 과거지향주의에 환멸을 느꼈다. 이들은 미술 혁명을 일으켜 동시대 작가들이 미술계를 지배하는 세상을 만들고 싶었던 것이다. 미래파 화가들의 화풍은 각각 달랐고 세기말 이탈리아에서 나타난 분리파 계열이 대부분이었다. 기술 선언문에는 구체적인 행동 강령을 담았는데 엑스레이로 투시한 것 같은 해체, 모방에 대한 거부, 누드화 금지 등의 내용이었다. 대신에 힘과 속도로 대표되는 역동성, 즉 다이내미즘과 아방가르드 예술을 최종 목표로 추구하며 움직임과 빛으로 현대사회를 해부하는 데 주력했다.


▲ 루이지 루솔로의 ‘자동차의 역학’

공장, 소음의 오케스트라

루솔로는 아방가르드 미술 사조에 자극을 받은 뒤에 다시 음악에서 자신의 예술 세계를 펼치고자 1913년부터는 그림을 잠시 접고 음악 작업에 몰두한다. 같은 해, 동료 화가들과 미래파 작곡가 프란체스코 프라텔라에게 편지로 보낸 선언문 ‘소음의 예술’은 1916년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다. 1909년 마리네티가 ‘르 피가로’에 실은 선언문의 음악적 실현인 셈이다. 그는 여기서 생활 주변에서 발생하는 소음들을 음악 작품에 포함시키는 작업에 이론적·미학적 근거를 제시했다. 인토나루모리, 즉 소음을 만드는 기계를 개발했고 일상생활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소음을 음악 작품 속에 포함하려고 했다. 허디거디처럼 오른손으로는 손잡이를 돌리고 왼손으로는 건반이나 버튼을 누르면 대포의 굉음이나 사이렌·굴착기·배수관·호루라기·기중기 소리 등 온갖 소음이 나오도록 고안했다. 현대 산업사회에서 쉽게 들을 수 있는 기계의 소음을 음악으로 승화시켜야 한다고도 했는데 그에게 소음투성이인 공장은 거대한 ‘오케스트라’인 셈이다. 루솔로는 1914년 런던을 시작으로 1920년대에 유럽 전역에서 소음 악기 콘서트를 열었고 자신의 이름을 붙여 각각의 소음 악기를 혼자 연주할 수 있는 일종의 건반악기인 루솔로포노라는 악기도 만들었다.

1921년 루솔로는 파리에서 미래파 연주회를 세 차례 열었는데 27개의 소음 악기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협주곡이었다. 이때 참석한 스트라빈스키·디아길레프·라벨 등은 충격과 감동을 받았다. 특히 몬드리안은 네덜란드에서 화가 테오 판 두스뷔르흐가 발행한 신조형주의 계열의 미술 잡지 ‘더 스테일’에 이날 공연에서 들은 인토나루모리에 관한 장문의 글을 기고했다. 디아길레프는 ‘라벨과 스트라빈스키에게 위촉한 발레음악에 이 악기를 넣어달라고 부탁할까’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루솔로포노는 1929년 에드가르 바레스에 의해 파리에서 소개되었고 ‘스튜디오 28’이라는 무성영화의 반주음악으로 사용되었지만 아쉽게도 루솔로가 사용했던 ‘소음 악기’나 악보는 현재는 남아 있지 않다. 하지만 1940년대 피에르 셰페르가 창안한 ‘구체음악’이나 존 케이지의 ‘4분 33초’는 루솔로의 소음음악에 많은 것을 빚지고 있다.

미래파 화가들은 제1차 세계대전에 이탈리아가 참전하는 것에 적극 찬성하여 의용군으로도 참전했는데 루솔로는 부상을 입고 1년 넘게 병상에 있었고 보초니는 전사했다. 무솔리니의 파시즘하에서 미래파는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미술로 인정받았지만 마리네티가 무솔리니를 지지했다는 이유로 미래파는 미술사가나 큐레이터 사이에서 ‘퇴출 명령’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최근 50년 사이에 미래파에 대한 연구와 관심이 증가하면서 대표적 아방가르드의 전형으로 자리 잡고 있다.

글 이장직(서울대 서양음악연구소 특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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