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프라노 서예리 리사이틀 ‘바로크&현대’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4년 11월 1일 12:00 오전

소프라노 서예리 리사이틀 ‘바로크&현대’

10월 3일 LG아트센터

고전과 낭만음악이 주를 이루는 국내 클래식계에 음악의 양극에 있는 바로크와 현대 레퍼토리만 들고 10년 만에 고국 무대에 선 소프라노 서예리. 현재 유럽에서 두 분야의 스페셜리스트로 손꼽히고 있는 그녀가 지난 10월 3일 LG아트센터에서 선보인 국내 첫 리사이틀은 한마디로 ‘격’이 다른 무대였다. 레퍼토리는 물론이고, 의상과 연출까지 누구도 예상치 못한 무대를 선보이며 그녀만의 해석으로 500여 년의 시간을 넘나들었다. 특히 시간의 흐름에 맡기지 않고 현대음악과 고음악을 교차시킨 레퍼토리가 눈에 띄었다.

첫 곡은 현대음악의 정점에 있는 곡이자 그녀 스스로 한국에 꼭 소개하고 싶다던 루치아노 베리오의 ‘세쿠엔차’. 검은 티셔츠와 바지, 운동화를 착용하고 흡사 진행요원 같은 차림으로 등장한 그녀를 두고 놀라지 않은 이는 없었다. 객석의 웅성거림이 그녀의 입으로 옮겨갔다. 무대 위를 돌며 우물우물 주문을 외우듯 시작한 연주는 객석의 모든 시선을 집중시켰다. 그 어떤 사유의 세계도 거치지 않고 오로지 느끼고 욕망하는 그대로의 소리를 담아낸 베리오의 곡은 그것 자체만으로도 파격이었지만 서예리를 통해 더 뚜렷이 발현됐다. 1부의 또 다른 현대곡, 진은숙의 오페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중 ‘snagS&Snarls’를 연주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녀의 정확한 딕션과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연기가 더해져 이 작품이 언어유희에 근간을 두고 있음을 잘 보여주었다.

헨리 퍼셀의 오페라 ‘디도와 아에네아스’ 중 ‘디도의 탄식’과 헨델의 오페라 ‘리날도’ 중 ‘울게 하소서’를 노래하는 서예리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거침없는 연기를 선보이던 그녀는 내면에 집중했다. 두 곡 모두 상실의 슬픔을 주제로 삼고 있었지만 그녀는 영리했다. 자칫 감정 과잉에 빠지기 쉬운 무대를 깨끗한 소리와 절제된 호흡으로 섬세하게 녹여냈다. 극적인 현대곡 사이에 놓인 고음악 연주는 그녀가 왜 이 분야의 스페셜리스트인지 단번에 확인시켰다.

어둑한 무대조명 아래 촛불을 밝히고 시작한 2부는 ‘성주간의 저녁기도’에 초대된 관객을 위한 배려였다. 프랑수아 쿠프랭의 ‘어둠의 수업’ 중 ‘두 번째 가르침’은 어둠 속에서 수도사들이 부르는 미사곡으로 깊은 종교적 호소력을 담고 있다. 한 곡이 끝날 때마다 촛불을 끄는 서예리의 모습은 관객을 그 시대로 이끌어 ‘재현하는 것’에 가까웠다. 국내 관객에겐 어려울 수 있는 두 시대의 레퍼토리만으로 꾸밀 무대에 대한 고민 때문이었을까. 사실 관객을 음악에 집중시키기 위한 그녀의 노력은 시작과 끝, 모든 스테이지에서 드러난다. 하프시코드와 오르간, 피아노가 한 무대에 오른 것만으로도 충분히 다채로운 무대가 될 것임을 짐작할 수 있었지만 그녀는 총 다섯 벌의 의상과 다양한 소품으로 시각적으로도 지루할 틈 없는 무대연출을 선보였다. 그녀와 함께 호흡한 피아니스트 홀거 그로쇼프와 하프시코드·오르가니스트 마르쿠스 매르클의 독주 무대는 변화무쌍한 서예리의 연주를 환기시키는 역할을 했다.

몬테베르디의 모테트 ‘기뻐하여라, 시온의 딸아’와 리게티의 ‘거대한 종말’ 중 ‘마카브르의 신비’를 부르는 서예리는 음악적 표현에서부터 의상, 헤어스타일까지 이전 무대와 모든 부분을 달리했다. 특히 ‘마카브르의 신비’를 연주할 때 피아니스트 홀거 그로쇼프와 서예리가 보여준 연기는 마치 한 편의 음악극을 보고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그녀가 유럽 무대에서 인정받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무엇보다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탁월한 연주력 때문이리라. 현대음악을 연주하다 보면 퍼포먼스적인 연주 기법을 필요로 하는 작품이 많기에 늘 고른 발성을 유지해야 하는 성악가들에게는 부담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서예리는 그러한 우려를 잠재우는 소프라노임에 틀림없었다. 두 시간에 걸쳐 상반된 스타일의 곡들을 소화해야 함에도 정확한 딕션과 빈틈없는 소리, 잘 닦인 소리 길을 통해 뻗어 나오는 안정된 호흡과 음색은 그녀가 지난 10년간 얼마나 학구적으로 발성을 연구해왔는지 충분히 짐작케 했다. 이날 시종일관 무대를 향해 몰입했던 관객들은 준비된 모든 순서가 끝나자 기립 박수와 함께 온몸으로 그녀의 첫 국내 무대의 성공에 찬사를 표했다. 고음악의 낯섦을 섬세하게 풀어내고, 난해한 현대곡마저 유쾌하게 해석한 소프라노 서예리. 그녀의 탄탄한 음악성과 자유로운 해석이 우리 음악계에 미칠 수혜의 폭은 기대 이상일 것이다.

사진 LG아트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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