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올리니스트 조진주의 고백- 굿바이! 콩쿠르 인생

지난 9월, 조진주에게 가장 소중햇던 기억은 동료들과 함께 오래 음악을 나눌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었다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4년 12월 1일 12:00 오전

바이올리니스트 조진주의 고백

굿바이! 콩쿠르 인생

지난 9월, 조진주에게 가장 소중햇던 기억은 동료들과 함께 오래 음악을 나눌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었다


▲ ⓒDenis R.Kelly

지난 9월 인디애나폴리스 콩쿠르에서 1위를 수상한 조진주가 ‘객석’ 편집부로 한 통의 메일을 보내왔다. 앞으로 이어질 글은 소위 ‘콩쿠르 인생’에서 ‘연주 인생’을 향해 달려가는 시간 속에서 한 바이올리니스트가 온몸으로 마주한 현실, 그럼에도 그 자신의 표현처럼 ‘변덕스러운 성격으로 곧 바뀌게 될 결론’에 관한 이야기다(편집자 주).

쳇바퀴 도는 다람쥐처럼 콩쿠르만 돌고 있는 느낌

도저히 모를 일이다. 왜 스물여섯 해를 사는 동안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던 걸까. 음악을 경쟁시킨다는 이 말도 안 되는 구도 안에서 우승을 한다는 것이 누군가를 제쳤다는 기쁨보다는 15년을 넘게 보아온 동료들을 향한 미안함을 불러일으키는 일이라는 것을 말이다.

지난 2014년 9월, 나는 오래도록 꿈꿔오던 인디애나폴리스 콩쿠르에서 1차에 통과했고, 2차도 통과하더니 덜컥 1등이라는 자리에 앉아버렸다. ‘콩쿠르’라는 것을 멀리한 지 꼭 2년 만의 일이었다. 2012년 여름, 나는 다섯 살부터 시작했던 콩쿠르 인생(이것이 얼마나 잔인한 일인지!)에 잠정적 휴식기를 두기로 결정했다.

경쟁에, 그리고 실패에 지쳐 있었고 언젠가부터 콩쿠르의 과정도 자극적이지 않고 지루했다. 이기는 것을 좋아하던 어릴 때와는 달리, 뭘 하고 싶다가도 다른 사람도 한다고 하면 금세 포기하게 되었다. 당분간 새로운 선생님과 공부를 시작하며 레퍼토리도 늘리고, 여태 타임라인에 쫓겨 시도하지 못했던 재미있는 프로그램들에 대한 욕심도 마음껏 채우며 나만의 음악적 색깔과 자유를 찾고 싶었다.

경제적 독립도 큰 화두였다. 이제는 정말 성인 음악가로서 내 인생을 스스로 책임지고, 남들과 확연히 다른 유일무이한 음악인으로서 앞으로의 10년을 준비해야 할 것 같았다. 나는 절박했다. 지금 이대로라면 현재도 미래도 모두 없어질 것 같았다. 쳇바퀴 도는 다람쥐처럼 지구를 뱅뱅 돌면서 콩쿠르만 돌고 있는 느낌이었다. 내 음악이 내 마음에 썩 들지 않는데, 남에게 이것을 좋아해달라고 어필하는 것이 그리 좋지 않은 상품을 들고 아파트 초인종을 누르며 판매를 시도하는 세일즈맨의 하루처럼 입안에 쓴맛만 남기는 듯했다. 콩쿠르고 뭐고 일단 나 자신을 돌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해서든 어떠한 압박에도 머리카락 하나 꿈쩍하지 않는 강인한 음악가로 거듭난 후에 콩쿠르에 다시 도전하고 싶었다.

무식해서 용감했던 건지, 아니면 음악적으로 절박하고 초조해서 보질 못했던 건지 그때까지만 해도 바깥세상에 대한 큰 두려움이 없었다. 너무나 순진하게도 이제까지 해온 공부와 쌓아온 경력이 있으니 어느 정도 먹고사는 데 지장이 없을 줄 알았나 보다. 그런데 웬걸, 예상은 빗나가도 한참 빗나갔다. 현실은 녹록지 않았고 내가 소중히 생각하던 음악적 가치, 그리고 어릴 적에 얻어낸 콩쿠르 입상이라는 감투는 대부분의 생활 전선에서 정말이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결혼식 음악이나 배경음악 연주가 아르바이트의 대부분인데, 내가 주인공이 아닌 곳에서 나의 예술적 가치를 알아봐달라고 하는 것이 우스운 꼴이었다. 궁여지책으로 연주 기회가 보장되는 이런저런 오디션의 문을 두드려봤지만 자신의 연주에 확신이 없는 사람의 오디션이 잘될 리 만무했고, 급기야 예전의 콩쿠르 입상으로 들어오던 이런저런 연주도 점점 줄어들었다. 급하게 마주한 차가운 현실은 꿈만 크게 가지고 있던 나를 그렇게 비웃었다.

사실 생활 전선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상관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건 음악이라기보다는 정말이지 그냥 돈을 벌기 위한 ‘일’이니까. 그런데 가장 답답했던 건, 여러 가지 경험을 하고 어떻게든 잘해보려고 노력하고 있는데 내 음악이 전혀 나아지고 있지 않다는 점이었다. 내가 원하는 것은 말하듯 노래하듯 감정과 색깔의 변화가 무쌍하면서도 바로 옆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전달도가 높은 음악이었는데 이도 저도 아니게 돼버렸다. 그나마 엄청난 양의 레퍼토리를 거의 갈아치우다시피 배우고 있어 다행이긴 했지만 습관처럼 학교에 갔다가 너무 급여가 낮아 아무도 하지 않으려고 했던 아르바이트까지 모두 마친 후 지친 몸과 복잡한 마음을 끌고 집에 돌아와 SNS에서 내가 떨어진 콩쿠르에서 입상한 사람들이 올린 공연 사진들을 보고 있노라면 너무나 속이 상해 울고 싶을 지경이었다.

주위에 조언을 구해봐도 돌아오는 답은 같았다. 지금보다 더 노력해라, 더 연습해라, 더 많이 해라, 더, 더, 더… 그리고 나도 그걸 믿었다. 더 원하면, 더 노력하면, 더 연구하면, 더, 더, 더… 그런데 과연 내가 해야 했던 것이 ‘더 해야’ 하는 것이었을까?

“네가 원하는 것은 뭐든지 하면 된다”는 스승의 가르침

나에겐 그때 명확히 어떻게 바뀌어야겠다는 목표조차 없었다. 원하는 음악적인 그림, 즉 원하는 소리가 상상되지 않았고 무작정 뭔가 새로운 것을 해보자니 자세부터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활을 어떻게 잡는지, 왼손은 어떻게 잡는지 머리는 아는데 몸이 잊어버린 것 같은 이상한 느낌이었다. 오늘 잘되던 부분이 그다음 날은 전혀 되지 않았다. 아무리 어려운 테크닉도 쉽게 해내는 친구들이 부럽고 신기해서 점점 더 테크닉에 집착했다. 자세를 바꿔보고, 손가락 잡는 방법도 바꿔보고….

혼자 이런 과정을 끙끙 앓으며 겪고 있던 2012년, 오랫동안 함께 공부해온 켄터 선생님과는 달리, 라레도 선생님은 레슨에서 가타부타 말씀이 별로 없으셨다. 계속해서 새 곡을 듣고 싶다고 하시곤 계속해서 칭찬만 해주셨다. 공부를 시작하고 한두 달이 지나가는데도 정말이지 부끄러울 정도로 칭찬만 하셨다. ‘이건 뭐지’ 싶다가도 아직은 선생님이 어려워 말씀하시는 대로 “네, 네” 하고 나오곤 했다. 그런데 어느 날, 여느 때처럼 레슨에 들어갔는데 선생님이 악기를 꺼내지 말라고 하시더니 “오늘은 연주하지 말고 이야기를 좀 하자”는 말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특별한 대화는 아니었다. 그저 요즘 고민거리가 뭐고, 어떻게 생활하고, 강아지는 잘 있는지… 함께 공부한 지 얼마 안 됐으니 나에 대해 좀 더 알고 싶으셨나보다 생각하고는 시간이 다 되어 방을 나서려는데 선생님이 갑자기 아무렇지도 않은 듯, 툭 던지셨다.


▲ ⓒDenis R.Kelly

“넌 아무것도 증명할 필요가 없는 연주자이니 네가 원하는 것은 뭐든지 하면 된다.”

살면서 그때 처음으로 알았다. 어떤 결과에 상관없이 강한 확신과 믿음으로 내 연주를 사랑해주는 것에 내가 목말라 있었다는 걸, 그리고 내가 꽤나 인정받는 것에 대해 집착하고 있다는 것을. 연습도 연주도 무언가를 증명하기 위해서 했구나. 나는 사랑받을 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나는 잘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내가 1등을 하거나 떨어진 것이 나에게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은 척하며 내가 세상에 존재할 이유가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악기를 잡았다.

그런데 그토록 아무렇지도 않게 그걸 이제 그만하라고 하시는 선생님 말씀에 무언가 뜨거운 것이 울컥 올라와서, 그리고 내 가장 추잡한 욕망이 갑자기 들춰진 것 같아서, 나를 그렇게밖에 취급하지 못한 내 자신이 너무 한심해서 한순간 갑자기 마법이 풀려버린 듯 가슴속 꽉 막힌 것이 순식간에 사라지는 느낌에 나는 선생님 앞에서 한참을 주체하지 못하고 엉엉 울다가 방에서 나왔다.

막힌 하수구를 강한 압력으로 뻥 뚫어버린 듯 그날부터 조금씩, 느리지만 확연하게 모든 것이 달라졌다. 이제는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 알 것 같았다. 내가 해야 하는 것은 ‘더’ 노력하는 것이 아니고 나에게 ‘어울리는’ 노력을 하는 것이었다. 안 되는 걸 그날 당장 되게 하려고 용쓰지 않았다. 열심히 안 해도 된다고 생각하니 오히려 연습이 재밌어지는 게 신기했다. 물론 아직도 모든 프레이즈가 유치하게 들렸고 활을 바꿀 때 연결이 끊기는 것도, 제스처가 반복적인 것도, 한 종류밖에 없는 비브라토도, 왼손의 포지션도 모든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일단 여유를 갖고 귀가 음악을 듣는 기준과 방식 자체를 다르게 하려고 노력했다.

20년 동안 해온 경쟁의 환경을 넘어서서 옳고 그른 것, 잘하고 못하는 것에 대한 인식을 내 마음에 드는 것, 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으로 바꿔 생각하니 오히려 새로운 아이디어가 많이 떠올랐다. 옳거나 틀린 것이 아닌, 기호에 따라 호불호가 갈리는 것이니 ‘틀린 연주를 하면 어떡하지’라는 두려움 자체가 없어졌다. 거의 ‘막’나간다고 해야 할까. ‘당신 맘에 들든지 말든지 나는 내가 이제까지 받아온 교육과 내 귀의 음악적 본능을 믿고 이걸 이렇게 하련다’라고 할 수 있는 대범함이 생기는 것도 재미있는 변화였다.

퍼포먼스에 있어서 두려움이라는 것은 재미있는 감정이다. 라이브 공연이 지닌 매력은 어쩌면 연주자가 두려움을 아무렇지도 않게 뛰어넘는 것을 목격할 때 느끼는 그 짜릿함일지도 모른다. 현실의 두려움은 그 형태가 매우 분명하고 뛰어넘기 어려운 데 반해 주로 심리적인 형태로 존재하는 예술적 두려움은 형체가 불분명하기 때문에 관객은 연주자의 예술적 두려움에 자신의 현실적 두려움을 이입시킬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공연장이라는 이름 아래 구성되어 있는 가상의 세계에서 관객은 이 두 가지의 두려움을 무의식적으로 동일시하게 되고, 연주자가 그것을 뛰어넘을 때 감정이입이 된 관객은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이런 초월의 환상을 제공하는 것이 예술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 아닐까. 이 이론이 성립된다면, 공연이라는 것은 관객이 느낄 수 있는 최대의 대리만족인 셈이다.

우리는 등급을 매기는 고기나 상품이 아니다!

동기나 선후배들을 보면서도 느끼는 것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음악을 하겠다고 마음먹는 순간부터 두렵고 무서울 일이 많다. 그리고 이 감정은 연주자들이 성인이 되면서 점점 더 심리적인 압박으로 작용한다. 연습 대신 몰래 빌린 만화책을 읽을 때 동반하는 심장의 ‘쫄깃함’, 반복적인 중·고등학교와 대학 입시를 겪으며 악착같지 못하다며 어린아이의 순수함을 비난받는 것에 대한 ‘불만족… 이 모든 것이 두려움의 한 종류로 무의식 한구석에 자리했으리라.

언덕에서 돌이 굴러떨어지듯, 연달아 나의 많은 이슈 또한 두려움의 일종이라는 것을 깨닫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본능적으로 느꼈다. 이놈을 떨쳐내기 시작하는 그 순간부터 나는 음악적으로 한 단계 성숙해갈 것이라는 것을. 서서히 테크닉의 문제라고 생각했던 많은 부분이 저절로 고쳐지기 시작했고 언젠가부터 조금씩 내 연주가 마음에 들기 시작했다.

이상했다. 분명 태어난 이래로 머리와 몸을 가장 열심히 팽팽 돌리며 고되게 살고 있는데, 나는 내 인생 처음으로 희미하게 가슴 중앙 가장 깊숙한 곳에서 솟아나는 행복을 느꼈다. 흔들리고 힘들었지만 나의 중심은 분명히 알고 있었다. 이 과정 속에서 나오는 것은 그 누구의 것도 아닌, 온전히 나만의 소중하고 특별한 것이라는 것을. 그리고 이 특별한 것을 점점 더 가꾸어갈수록 나는 분명히 행복을 향해 느리게 행진하고 있다는 것을. 시간이 갈수록 나는 악기를 연주하는 행위 자체에 점점 더 집중하는 법을 배웠고 다른 사람이 나에게 주는 영감에 의존하지 않고 내 자신의 음악적 본능과 지성을 믿는 것이 바로 나만의 목소리를 발전시키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이런 과정을 거친 다음 2년 반 만에 처음으로 나간 큰 콩쿠르였던 2014 인디애나폴리스 콩쿠르는 준비 기간부터 예전의 경험과는 모든 것이 다르게 느껴졌다. 여름 페스티벌은 하지 않았으면 하셨던 선생님의 조언과 반대로, 난 지난 여름 특별히 ‘빡센’ 페스티벌인 뮤직 앤 멘로와 펄먼 뮤직 프로그램에 참여했고 이후 콩쿠르까지 남은 기간인 3주 동안 정말 할 수 있는 만큼만 노력했다. 1차에서도 2차에서도 그리고 파이널에서도 연주 자체는 나름대로 마음에 들었지만 나의 연주는 이런 큰 대회가 요하는 완벽성과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했다. 다른 친구들의 연주도 정말 좋았고, 그래서 라운드마다 내 이름이 불릴 때 매번 놀랐다.

사실 난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지난 3년간 나의 심적인 변화와 음악적 깨달음이 내가 특별하거나 잘나서 얻은 것이 아닌, 그곳에 있었던 모든 동료와 함께 자연스럽게 걷고 있는 음악가 길의 일부에 불과하다는 것을. 특히 결선 진출자 6명 중 5명은 더욱더 비슷한 성장통과 고충을 나누는 한국 동료, 후배였기에 우승자로 호명된 그 순간 나는 기쁘기보다는 미안했다.

그들도 나처럼 많은 것을 두려워하고 있음을 알기 때문이고, 그 순간 어쩐지 마음 한편이 아리고 허전했을 그들의 자리에 나도 충분히 있어 보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등급을 매기는 고기나 상품이 아니고 음악가로서 같은 길을 함께 열심히 걷는 동료일 뿐인데, 혹 사람들이 우리를 숫자로 바라보게 될까봐 나는 정말 많이, 미안했다. 설사 이게 지나친 생각일지라도.

너무나 신기하게도 많은 연주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지금, 감사하고 기쁘고 신이 난다. 그리고 이 순간, 내 젊음이 가능케 하는 열정을 모두 활활 태울 준비가 되어 있다. 나에게 지난 9월, 가장 소중했던 기억은 우승의 환희가 아니라 결과가 발표된 직후 나를 꼭 안아주던 동료들의 따뜻한 마음이었다. 세계 이곳저곳에서 만나고 부딪히며 오랜 세월 나를 자극하고 가르쳐준 동료들과 함께 앞으로도 오래도록 음악을 나눌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생기는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언젠가는 우리나라의 모든 젊은 음악인이 평가의 두려움 대신 패기와 도전 정신,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 발견한 고유의 특별함을 한껏 사랑할 수 있는 환경과 인식 수준이 이루어지기를 진심으로 바라며, 이제 20년 콩쿠르 인생을 끝마치고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는 나 자신에게, 그리고 모든 음악인 동료에게 우리 파이팅이라고, 진짜 많이 고맙다고 말하고 싶다.


▲ 학교 생활 중 라레도와 함께

▲ 학교 생활 중 캔터 선생님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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