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르마 왕립극장의 2014 베르디 페스티벌- 다시 외치는 비바 베르디!

오로지 베르디를 위한 26일간의 긴 축제는 깐깐한 파르마 청중을 감동시켰다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4년 12월 1일 12:00 오전

파르마 왕립극장의 2014 베르디 페스티벌

다시 외치는 비바 베르디!

오로지 베르디를 위한 26일간의 긴 축제는 깐깐한 파르마 청중을 감동시켰다


▲ 오페라 ‘운명의 힘’ 막의 한 장면


▲ ‘운명의 힘’ 2막 중 레오노라를 향한 수도승들의 성스러운 합창

오페라 ‘운명의 힘’은 러시아 황실의 의뢰로 1862년 11월 10일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마린스키 극장에서 초연한, 베르디의 중·후기 오페라의 최대 걸작 중 하나다. 총 4막, 연주 시간만 3시간이 넘는 대작이기도 하다. ‘운명의 힘’의 ‘힘’은 능력이나 효력을 뜻하는 ‘힘(potenza)’이 아닌 역동적으로 변화하며 움직이는 ‘힘(forza)’이다.

잉카제국의 후예인 알바로와 금지된 사랑을 하는 레오노라. 알바로는 레오노라의 아버지 칼라트라바 후작의 허락을 받으려다 실수로 그녀의 아버지를 총으로 쏴버린다. 아버지의 죽음을 목도한 그녀는 도망치다 결국 알바로와 헤어지고 죄책감을 느끼며 수도원에 귀의한다. 하지만 운명의 장난은 이 커플을 쫓는 오빠 카를로에 의해 어마어마한 비극으로 종결된다. 카를로는 수도원의 신부로 숨어든 알바로를 끝내 용서하지 못하고 뒤쫓아가 결투를 하는데, 결국 알바로에게 치명상을 입는다. 죽어가던 카를로는 레오노라를 칼로 찌르고, 레오노라가 죽어가는 최후의 장면은 숨이 턱턱 막히는 슬픔이 엄습한다.

10월 10일 저녁, 이탈리아의 파르마 왕립극장. 작곡가 베르디의 201번째 생일을 맞이해 열린 베르디 페스티벌의 오프닝 공연으로 ‘운명의 힘’의 막이 올랐다.

“천사들의 성모여, 당신의 옷자락으로 그녀를 덮으소서. 주의 천사가 그를 지키게 하소서.”

‘운명의 힘’ 2막 2장의 피날레. 2개의 벽을 합쳐 만든 거대한 십자가를 통해 빛이 쏟아져 나오고 순백의 성의(聖衣)를 입은 레오노라가 제단 위에 두 팔을 벌리고 엎드렸다. 그러자 횃불을 든 수도승들이 성스러운 합창으로 레오노라의 수도원 입회 의식의 시작을 알렸다. 레오노라가 응답하고 하프 두 대가 연주하는 천국의 선율은 그대로 하늘로 올라갔다.

우리에게 파르미자노 레자노와 프로슈토로 잘 알려진 도시 파르마. 그곳은 베르디가 태어났던 시골 마을 론콜레와 베르디의 보호자 바레치가 있는 도시 부세토를 품고 있는 유서 깊은 고대 도시로, 당시 파르마 공화국의 수도였다. 파르마 사람들은 당연히 작곡가 베르디에 대해 최고의 자부심을 가지고 있고 그만큼 관련 유적지도 많다.

파르마 왕립극장은 1829년 나폴레옹의 두 번째 황비였던 마리 루이즈가 이혼의 대가로 파르마를 다스리던 시절에 지어진 화려하기 그지없는 이탈리아 최고의 오페라하우스다. 1,400석의 객석은 로열박스부터 5층까지 이르는 발코니석까지 어디서든 웅혼하고 깊은 울림을 들을 수 있다. 음향은 라 스칼라 극장보다 오히려 낫다는 평가도 있다.

베르디는 자신의 고향에 있는 오페라극장에 각별한 애정을 과시했다. 1843년 4월 17일 자신의 첫 히트작 ‘나부코’를 직접 지휘하며 데뷔한 베르디는 ‘롬바르디의 첫 십자군’과 ‘맥베스’의 개정판을 파르마에 다시 올릴 만큼 열정을 쏟았다. 파르마 왕립극장은 베르디가 생전에 도와준 은혜를 보답하기라도 하듯 1913년 탄생 100주년과 1951년 서거 50주년을 맞이해 시즌 전체를 베르디 오페라로만 진행하기도 했을 정도다. ‘아이다’는 150년 동안 무려 177회나 파르마 왕립극장 무대에서 갈채를 받았다.

1980년대 중반부터 1993년까지 파르마 왕립극장은 베르디 페스티벌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그리고 2001년부터 재개된 축제는 매년 4월 말부터 5월까지 이어졌다. 2007년부터는 베르디 탄생일인 10월 10일에 맞춰 10월로 축제를 이동했다. 그리고 그 결과물은 지난해 탄생 200주년 축제에서 대단원의 결실을 맺었다. 세계 최초로 베르디의 26개 오페라와 레퀴엠을 묶어 ‘투토 베르디(Tutto Verdi)’라는 제목의 베르디 전집을 출시하게 된 것이다. 2006년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서 내놓은 모차르트의 22개 오페라 전집 ‘모차르트 22’를 능가하는, 그야말로 세계 음악사상 전무후무한 프로젝트를 완성했다.


▲ ‘라 트라비아타’ 중 전면 거울로 연출된 상징적 장면

▲ ‘운명의 힘’의 칼라트라바 후작을 연기하는 베이스 임채준


한국인 최초로 베르디 축제의 메인 오페라 무대에 선 임채준

올해 파르마 왕립극장의 베르디 축제는 ‘운명의 힘’으로 개막했다. 야데 비냐미니가 지휘하는 아르투로 토스카니니 필하모닉이 연주하는 서곡은 활화산 같은 폭발력과 에너지로 압도했다. ‘운명의 힘’ 서곡은 이렇게 연주해야 한다는 표준을 증명해 보이는 듯했다. 아르투로 토스카니니 필하모닉은 파르마 왕립극장에 달려 있는 콘서트 전용 홀, 오디토리엄 니콜로 파가니니에 둥지를 튼 정상급 악단이다. 적어도 베르디 오페라 연주에 관한 한 최고 수준임을 자부한다. 여기에 극장의 음향은 최상의 사운드로 청중을 쥐락펴락했다. 특히 첼로와 더블베이스의 그윽한 저음은 기막힌 음향으로 필자의 귀를 호강시켰다.

드디어 1막의 무대가 드러났다. 거대한 벽이 압도하고 레오노라의 아버지 칼라트라바 후작이 등장했다. 베이스 임채준이다. 그는 이번에 한국 성악가로는 처음으로 베르디 축제의 메인 오페라에 초청을 받는 쾌거를 이루었다. 라 스칼라 극장을 중심으로 이탈리아 전역의 오페라하우스를 누비고 있는 자랑스러운 우리 성악가다. 단단하고 옹골진 저음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노래 실력뿐만 아니라 아버지의 분노와 애타는 심정을 절절하게 표현했다. 임채준은 아직 젊기에 그의 향후 행보가 기대된다.

흑백을 조화시킨 거장 연출가 스테파노 포다의 연출은 한순간도 무대에서 눈을 떼지 못하게 하는 마력을 풍겼다. 2막 1장의 발레 장면은 더할 나위 없이 비극적인 오페라의 칙칙한 분위기를 바꾸는 데 일조했다. 2막 2장, 수도원에서의 합창은 탄성이 절로 나오게 하는 명장면이었다. 3막에서 포다가 보여준 전쟁터의 참혹함은 혼신을 다하는 댄서들의 연기로 감정이입이 제대로 이루어졌다. 카를로와 알바로가 벌이는 논쟁은 바리톤 루카 살시와 테너 로베르토 베로니카에 의해 완성되었다. 유럽 오페라 무대에서 각광받고 있는 두 가수가 만나 시너지 효과를 거두었다.

버지니아 톨라가 부른 레오노라는 십자가 위의 순교 장면을 절묘하게 이끌어내며 가장 많은 박수를 받았다. 드라마틱 소프라노이면서도 완벽한 메사 디 보체의 테크닉을 구사하는 톨라는 4막 피날레의 마지막 기도 ‘주여, 평화를 주소서’에서 나약하게 쓰러져가는 레오노라가 아닌, 강인한 정신력으로 스스로를 담금질하는 ‘철의 여인’을 느끼게 했다. 루치아노 파바로티에게조차 그날 상태가 좋지 않으면 사정없이 토마토 세례를 퍼붓고 “집에나 가라!”며 야유를 퍼붓는, 평가가 인색하다고 소문난 파르마의 청중은 이날 발을 구르며 열광적인 호응을 보냈다.

전면 거울로 타락한 현실을 고발하다

11월 2일, 부세토의 주세페 베르디 극장. 베르디의 청춘이 고스란히 배어 있는 시청사 앞 베르디 광장은 당시 그대로의 모습으로 늦가을을 맞이하고 있었다. 베르디 축제의 일환으로 ‘라 트라비아타’ 공연이 300석 규모의 작은 극장에서 열렸다. 연주자의 숨소리까지 생생하게 포착되는 소규모 극장에서 ‘라 트라비아타’가 가능할까 하는 의문은 헨니히 브로크하우스의 연출로 간단히 풀렸다. 무대 전면을 가득 채운 거울을 이용해 바닥의 소품과 가수들의 움직임을 입체적으로 보이게 하는 마법과도 같은 아이디어였다. 여기에 거울에 수시로 투사되는 상징적인 메시지는 충분한 설득력을 지니고 있었다. 특히 3막 마지막 부분에 객석과 오케스트라가 통째로 거울에 비치며 하나가 되는 설정은 압권이었다.

1막 ‘축배의 노래’는 무대 위의 난잡한 파티가 전라의 여인들이 비치는 거울 장면에 더해져 타락한 현실을 고발하는 설득력을 보여주었다. 들국화가 가득 핀 2막 1장의 무대는 대단히 아름다운 전원을 그렸고, 2막 2장은 이와 대비되게 환락과 모순을 극대화했다. 어두움으로 일관한 3막은 비감을 더욱 깊게 했다. 비교적 신진 가수들로 진용을 짠 출연진도 평균 이상의 실력으로 감동을 주었다. 이를 받쳐주는 스테파노 라발리아 지휘의 볼로냐 시립극장 오케스트라·합창단은 축소된 편성임에도 보여줄 것은 다 보여주었다. 이탈리아 오페라극장의 새로운 강자로 부상한 볼로냐 시립극장의 저력이 느껴졌다.

자정이 다 되어 끝난 ‘라 트라비아타’의 감흥은 숙소에서도 이어졌다. 지난 7월 25일 90세를 일기로 타계한 테너 카를로 베르곤치가 운영하던 극장 바로 옆 호텔 ‘포스카리가의 두 사람’의 방으로 들어가니 레나타 테발디·루치아노 파바로티 등 수많은 전설적 거장이 묵었던 흔적이 그대로 배어 있다. 주인은 없고 이제 주인의 취향과 친구 가수들의 사진만이 이방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노장 피아니스트가 전하는 묵직한 감동

다음 날, 파르마 왕립극장에서는 그리고리 소콜로프의 피아노 리사이틀이 열렸다. 1966년 불과 16세의 나이로 차이콥스키 콩쿠르에서 우승하며 일대 파란을 일으켰던 천재 피아니스트는 어느덧 예순을 훌쩍 넘긴 노신사가 되어 있었다. 전설의 피아니스트 스뱌토슬라프 리흐테르처럼 소콜로프도 선배를 따라 무대 위에 극히 어두운 조명 2개만 켠 채 미동도 하지 않고 피아노 앞에서 기도하듯 건반을 눌렀다. 바흐의 파르티타 1번 프렐류드의 정갈한 음표들이 흘러나오자 극장은 그대로 바흐의 신전으로 변했다. 아, 오페라극장에서 들려오는 대(大)바흐의 건반악기 음률이 이렇게도 고고할 수 있는가. 소콜로프는 베토벤 소나타 7번과 쇼팽 소나타 3번으로 이어가는 연주에 인간미까지 덧입혀, 감정의 파고를 넓고 깊게 일으켰다.

하지만 공연의 백미는 오히려 앙코르였다. 즉흥곡 세 곡에 이어, 슈베르트 말년의 걸작 ‘3개의 피아노 소품’ 2악장의 천국적인 선율이 극히 느린 템포로 시간을 무한대로 늘리며 물고 늘어졌다. 이 처절한 슈베르트의 ‘무언가’ 끝자락에서 기어이 나는 눈물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소콜로프는 그러고도 무려 40분가량 세 곡의 앙코르를 더 연주하며 예정에 없던 ‘2부’를 선보였다. 유독 사연 많았던 거장의 굴곡진 인생사가 절절하게 전해져오는 순간이었다.

깐깐한 파르마 청중을 만족시키다

11월 4일, 파르마 베르디 페스티벌의 폐막 공연은 잔안드레아 노세다가 이끄는 토리노 왕립극장 오케스트라·합창단의 갈라 콘서트로 마무리됐다. 콘서트를 위해 설치된 무대의 음향은 마치 궁전처럼 화려하고 은은했다. 베르디 축제의 고고한 전통이 느껴졌다. 절정기를 구가하고 있는 노세다의 지휘봉은 전반부, 베르디 ‘4개의 성가’에서 디테일과 스케일을 동시에 확인할 수 있었다. 국내에서는 좀처럼 듣기 힘든 ‘레퀴엠’과 궤를 같이하는 ‘아베마리아’와 ‘테 데움’에 이르는 4개의 교회음악은 토리노 왕립극장 오케스트라·합창단이 베르디 축제에 초청된 이유를 알게 했다.

‘맥베스’ 4막 ‘학대받은 조국’의 격정적인 장면은 극장을 소리의 폭풍으로 휩쓸고 지나가는 듯한 착각마저 들게 했다. ‘나부코’ 서곡에서 청중은 기어이 공연 도중에 기립 박수를 보내고야 말았다. 파르마 청중이 기립 박수라니! 노세다의 널뛰는 다이내믹은 그의 지휘에 자석처럼 반응하는 오케스트라와 함께 절대 명연으로 거듭났다. ‘금빛 날개를 타고 날아가라, 내 상념이여’의 유려한 선율이 아스라이 번져오다 느닷없이 송곳처럼 날카로운 비트로 객석을 휘감았다.

‘오텔로’ 1막, 키프로스 섬의 시민들이 부르는 합창 ‘기쁨의 불꽃’은 리듬감으로 충만했다. 3막의 댄스 장면으로 마침내 26일간의 축제가 끝나자 객석은 열렬히 환호했다. 마침내 노세다가 무대로 등장해 축하의 말을 전하고 다시 지휘봉을 잡았다.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 도입부가 흘러나오자 극장은 감전된 듯 가라앉았다. 이 곡을 수백 번은 족히 연주했을 합창단과 오케스트라는 제2의 애국가를 연주하는 것처럼 정성을 쏟았다.

이탈리아 오페라극장은 불안한 정치와 맞물려 몇 년 전부터 극심한 재정난을 겪고 있다. 파르마 왕립극장도 예외가 아니다. 하지만 올해 베르디 축제를 접하면서 느낀 것은 적극적인 기업 후원 유치와 수준 높은 공연들로 슬럼프를 정면 돌파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우리 극장들도 파르마를 벤치마킹해 맞춤형 축제와 공연을 기획해보는 것은 어떨까. 질 좋은 공연과 한 단계 앞서가는 마케팅이야말로 극장을 살리는 당연한 해법이다


▲ 잔안드레아 노세다/토리노 왕립극장 오케스트라·합창단의 폐막 공연

사진 Teatro Regio di Par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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