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만, 내면의 풍경’ 저자 미셸 슈나이더

고통에 찬 영혼을 글로 말하다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5년 1월 1일 12:00 오전

최근 한국에 번역 출간되어 뜨거운 호응을 받은 ‘슈만, 내면의 풍경’의 작가 미셸 슈나이더를 파리에서 만났다. 슈만 특유의, 고통을 체화시킨 언어를 눈부신 문장으로 풀어낸 그는 담담하게 음악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지금은 작가로 더 유명하지만 문화부 소속의 고위 공무원으로 행정직을 담당해왔다는 경력이 이채롭다. 음악과 무용 담당 감독으로 일했던 경험은 어땠나.

프랑스라는 나라의 문화 전반을 돌이켜보면 사실 문학이 가장 강세를 보이고 있다. 각국의 고위 공무원들을 살펴보면 그 나라의 엘리트들에게 요구되는 소양이 무엇인지 대략적으로 보인다. 프랑스에서는 문학적 소양을 갖춘 엘리트가 나머지 장르에 비해 월등히 많다. 이탈리아·일본·독일·영국 등의 엘리트들이 음악을 기본 소양으로 여기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프랑스는 학과 기본 커리큘럼에 음악이 제대로 포함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뛰어난 성적으로 최고의 학교를 나와도 음악에 대한 지식이 없거나 악보조차 읽을 줄 모르는 경우도 있다. 물론 음악을 즐기고 사랑하는 분위기가 있는 집안의 몇몇 사람들은 예외가 된다.

당신이 처음 음악과 만난 순간이 궁금하다.

아버지는 부르주아 출신의 엄청난 재산을 물려받은 한량이었다. 평생 일을 해서 돈을 벌어본 적이라곤 전혀 없었고, 그저 집에서 피아노를 치는 것이 아버지가 하는 유일한 일이었다. 나는 7남매 중 막내였는데 아버지가 연주하는 커다란 그랜드피아노 밑에 들어가서 놀곤 했다. 네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아주 희미하지만, 피아노 아래에 있으면 피아노 현에서 전해지는 음들, 미세한 공기의 진동이 마치 장막처럼 온몸을 감싸는 느낌을 받았다. 그 무엇보다 내 몸을 에워쌌던 음악을 아직도 기억한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음악을 만났다. 어머니는 포레 앞에서 연주한 적이 있을 정도로 프로 수준의 바이올리니스트였기 때문에 나는 다섯 살 때부터 바이올린을 시작했다. 내가 진짜 배우고 싶은 건 피아노였는데, 어머니는 바이올린만 강요했다. 내게 피아노는 허락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바이올린을 끔찍하게 생각했고 지금도 그 소리를 좋아하지 않는다. 음반에서 들을 수 있는 매끄러운 바이올린 소리는 한 사람이 엄청난 시간을 들여 이름난 음악가가 된 이후에나 낼 수 있는 소리다.

열두 살 때부터는 피아노를 칠 수 있었다. 늦은 만남이었지만 열여덟 살 때까지 피아노를 진심으로 대했다. 물론 지금도 피아노를 사랑한다. 바이올린이나 첼로는 다른 악기와 연주를 하거나 앙상블을 할 기회가 많지만 피아노와 나는, 이 세상에 오롯이 둘뿐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피아노 앞에 있다 보면 ‘내가 지금 이 악기와 정말 한 몸이 되었다’는 느낌을 받는다. 지금도 거의 매일 피아노 앞에 앉는다. 세상에 그 누구도 필요하지 않을 정도로 단단하게 피아노와 나만 결속되어 있는 듯한 느낌은 최고의 쾌락에 비할 만큼 달다.

하지만 어머니는 냉정했다. 나의 음악적 재능은 뻔하다며 “겨우 파리 외곽의 작은 음악원 선생이나 하면 다행이니 진지한 공부를 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어머니는 최고의 음악가에게 요구되는 재능의 크기가 무엇인지, 스스로 자신의 꿈에 좌절을 겪었기에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열여덟 살에 피아노를 관두며 공부에 매달렸고, 흔히 말하는 최고의 엘리트 코스를 거쳐 공무원이 되었다.

서른다섯에 피아노를 다시 시작했다. 월급을 모아 피아노를 다시 집에 들여놓았을 때의 감격을 여전히 기억한다. 그때 산 피아노는 시골집에 갖다 놓았다. 유엔에서 일하게 되면서 뉴욕 발령을 받았을 때, 다시 피아노 없이 사는 건 상상하고 싶지 않을 만큼 끔찍해서 뉴욕에 도착하자마자 제일 먼저 피아노 교습소를 찾았다. 그리고 “레슨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다만 피아노를 한 시간씩 연습하고 싶다”라고 말했다. 매일 아침, 출근하기 전에 피아노를 한 시간씩 치고 사무실로 향했다. 레슨이 필요하지 않을 정도로 내 귀는 이미 어떻게 쳐야 하는지를 알고 있었다. 위대한 피아니스트들의 음반과 공연으로 단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추구하는 음악의 이상은 드높았지만 슬프게도 손이 따라가지 못했다. 서른다섯에 다시 피아노를 시작할 때, 이미 내 손은 예전 같지 않았다. 다시 악보를 보는 것은 어린 나이에 시작한 남들보다 서너 배 더 노력해야 했다.

이상과 현실의 엄청난 간극 속에서 매일 피아노를 치며 나는 절대로 내가 원하는 소리를 만들어내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과 마주했다. 하지만 거장의 연주를 듣는 것과는 또 다른 기쁨이 있다. 내 손으로 건반을 짚으며 음이 흘러나오는 순간의 희열은 남다르다. 악보와 피아노를 앞에 두고 한 작품의 내부에 직접 들어가서 이 음악이 과연 어떻게 만들어져 나오는지 그 시작부터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 또 다른 차원이 열리며 음악을 다시 경배하고 사랑하게 된다.

슈만의 무엇이 당신을 사로잡았나.

아버지를 어린 시절에 잃고 난 후, 상상 속에서 아버지가 연주했을 법한 음악을 떠올렸다. 왠지 슈만일 것 같았다. 네 살짜리가 피아노 밑에 기어 들어가 들은 음악을 기억해, 작곡가 누구의 어떤 곡이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아주 막연하게 ‘아버지가 오후 내내 치고 있던 그 곡은 슈만이 아니었을까’ 하고 상상했는데 내가 10대였던 어느 날 우연히 외삼촌이 어머니와 이야기하던 중에 아버지가 매일같이 슈만을 쳐대는 통에 아주 질릴 정도였다고 하는 것을 들었다. 내 상상이 결국엔 현실과 맞닿아 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신기했다.

아버지가 그토록 슈만을 쳤다는 이야기를 듣자 슈만의 음악이, 거기에 실린 고통과 감정들이 또 다르게 느껴졌다. 슈만은 쉬운 작곡가가 아니다. 쇼팽이 피아노를 위해 피아노가 가장 아름답고 시적으로 들리도록 곡을 썼다면, 슈만은 끝없이 주저하고 망설이고 떠돌고 절망하다가 침잠한다. 감정적으로 슈만은 훨씬 더 다층적이고 복잡하다. 쇼팽의 곡보다 슈만의 곡을 제대로 연주하는 것이 더 힘들다. 그래서 슈만 스페셜리스트인 피아니스트를 꼽아보라면 쇼팽 스페셜리스트보다 얼마 안 될 것이다. 고통에 찬 영혼과 내면의 깊이까지 모두 음악에 담아내려면 음악가는 ‘악보대로 연주하는 수준’을 뛰어넘어야 한다. 슈만은 단순해 보이지만 그를 이해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그 깊이를 적당하게 음악에 담아내는 것도 아주 높은 경지에 오른 음악가들만이 해낼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슈만, 내면의 풍경’에서 고뇌와 고통을 구별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고뇌(Souffrance, 수프랑스)와 고통(Douleur, 둘뢰르)을 동일시한다. 고통의 동사형 ‘douloir’를 사용하지 않고 고뇌의 동사형 ‘souffrir’만으로 두 명사 모두의 동사형으로 삼는 프랑스어의 경우엔 더욱 두 단어를 혼동하기 쉽다. 하지만 이 단어들의 발음을 들어보자. 독일 낭만주의와 바그너의 대본에도 폭넓게 쓰이는 독일어 단어 ‘슈메르츠(Schmerz, 아픔)’는 소리가 몹시 요란스럽다. 프랑스어에서 역시 고통을 뜻하는 단어인 ‘펜(Peine)’에는 ‘둘뢰르(Douleur, 고통)’처럼 ‘수프랑스(Souffrance, 고뇌)’ 속에서 자음이 내는 천이 찢어지는 듯한 그런 거슬림, 침입이 없다. 이 단어들은 부드럽고 간결하며 유연하다. 그중 더 작고 광택 없고 소박한 ‘펜’은 ‘둘뢰르’라는 좀 비장하고 울림이 있는 단어보다 슈만의 ‘라이트(Leid, 상심傷心)’에 더 가까울 것이다. 둘뢰르는 수프랑스보다 훨씬 완고한 동시에 폭넓다. 우리가 느끼는 고통에도 그 종류가 있다. 슈만은 태생적으로 고통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었고, 그걸 음악으로 표현해냈고, 고통을 못 이기고 세상을 떠났다. 나는 어릴 때부터 광기와 사라짐에 호기심을 품었다. 갑자기 세상을 떠난 아버지를 통해 사라지는 것은 무엇인지 일찌감치 깨달았고, 알제리에 파병되었다가 자살로 생을 마친 내 형은 지금까지도 현재형이다. 그래서 나에게 슈만의 음악이 더 남다르게 다가오는 걸지도 모른다.

나는 작가가 되고 싶어서 된 것이 아니라 될 수밖에 없어서 작가가 되었지만, 마법의 지팡이가 주어져 또다시 생을 산다면 지휘자가 되고 싶다. 음악가로서 누릴 수 있는 가장 높은 위치라서가 아니라 내가 사랑해 마지않는 아바도와 클라이버 같은, 불멸의 음악을 남길 수 있는 존재로 남고 싶다. 그런데 음악가가 되었더라면 작가가 되었어야 했는데라며 가지 않은 길을 후회하지 않았을까.

‘슈만, 내면의 풍경’에서 발췌

사진 Jean-Baptiste Mill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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