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미 헨드릭스- 낡은 사상을 불태운 기타리스트

그의 왼손에서 울려 퍼지던 혁명적 음악은 이상과 현실을 연결하는 시대의 언어가 되었다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5년 2월 1일 12:00 오전

지미 헨드릭스

낡은 사상을 불태운 기타리스트

그의 왼손에서 울려 퍼지던 혁명적 음악은 이상과 현실을 연결하는 시대의 언어가 되었다

젊은이들이 정체성을 드러내는 적극적인 표현 방식 중 하나는 티셔츠에 누구의 얼굴을 새기고 다니느냐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티셔츠 프린트의 주인공은 누구일까? 체 게바라, 이소룡도 아닌 바로 지미 헨드릭스다. 그가 죽은 지 45년이 흐른 지금도 전 세계 젊은이들의 가슴에 새겨진 이미지로, 또 표상으로 영원함을 누리는 지미 헨드릭스는 1942년 11월 27일, 미국 시애틀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났을 때 어머니는 17세의 식당 종업원이었고, 아버지는 군인이었다. 지미의 본명은 자니 알렌 헨드릭스로, 휴가를 나온 그의 아버지가 이름을 제임스 마셜 헨드릭스로 개명했다.

지미 헨드릭스는 그의 나이 아홉 살 때 부모의 이혼을 겪었고, 탭댄서로 생계를 이어가던 아버지의 보호 아래 유년기를 보냈다. 빗자루를 들고 TV 속 기타 연주자를 흉내 내던 그의 첫 번째 악기는 열네 살 때 아버지가 구해온 우쿨렐레다. 알코올 의존자인 어머니의 사망 소식은 16세 소년이 기타리스트로서 꿈에 집중하는 계기가 되었다. 고교 재학 중 록 밴드를 결성해 기타에 심취한 그는 교내에서 공공연하게 약물을 복용하면서 퇴학 조치를 받고 쫓겨났다. 학교를 떠나 낙하산병으로 입대해 복무하는 동안에도 ‘The King Casuals’라는 밴드를 조직했지만, 훈련 도중 부상을 입고 스무 살에 의병제대했다. 이후 1965년까지 리틀 리처드·아이크&티나 터너·샘 쿡 등의 록·팝·R&B 보컬 밴드의 기타리스트로 활약했다. 하지만 3년여의 세션 기간 동안 그는 왼손으로 기타를 연주하는 것만이 특별할 뿐 그의 음악적 자질에 대해 별다른 평가를 얻지 못했다.

화염에 휩싸인 기타

1966년, 지미 헨드릭스는 ‘지미 제임스&더 블루 플레임스’라는 밴드를 결성하면서 서서히 주목받기 시작했다. 지미 헨드릭스를 처음 눈여겨본 사람은 영국 록 그룹 애니멀스의 베이시스트 체스 챈들러였다. 챈들러는 지미 헨드릭스의 음악적 천재성을 발견하고, 그의 음악이 영국과 유럽에서 인기를 끌 것이라는 판단 아래 매니저와 프로듀서를 자청했다. 때마침 프랑스의 엘비스 프레슬리라 불리던 가수 조니 알리데는 지미 헨드릭스에게 파리에서 개최할 공연에 오프닝 밴드로 출연할 것을 제안했다. 지미 헨드릭스는 평소 친분이 있던 노엘 레딩(베이스)과 미치 미첼(드럼)과 함께 3인조 록 밴드를 결성한다. 이 팀이 바로 ‘지미 헨드릭스 익스피리언스’다.

지미 헨드릭스 익스피리언스는 1966년 10월, 조니 알리데의 프랑스 투어에 오프닝 밴드로 참가하면서 유럽의 록 팬들에게 신선한 파문을 일으켰다. 블루스에 기반을 둔 록 사운드, 폭발적인 기타 솔로의 화염이 내장된 밴드의 음악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다. 싱글로 발표한 ‘Purple Haze’와 ‘Hey Joe’는 브리티시 차트에서 각각 3위와 6위를 차지했다. 1967년 초, 곧장 영국의 메이저 레이블 폴리도르에서 팝 음악 역사상 가장 충격적인 데뷔 앨범 중 하나인 ‘Are You Experienced’를 공개했다.

그들의 첫 음반에 담긴 음악은 종전에 없던 새로운 형식의 록 음악이었다. 지미 헨드릭스의 연주에는 반전과 자유, ‘히피즘’이 뿌리를 내리던 동시대 젊은이의 절규와 저항 정신이 사이키델릭 사운드로 표현되어 있었다. 1967년 6월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열린 몬터레이 인터내셔널 팝 페스티벌의 공연은 지미 헨드릭스를 전설과 신화의 존재로 공표하는 시간이 되었다. 지미 헨드릭스는 ‘Wild Thing’을 연주하던 중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펜더 스트라토캐스터 기타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러고는 신성한 종교의식을 거행하듯 기타를 매만진 뒤 기름을 부어 자신의 기타를 불태웠다. 이 역사적인 장면은 록의 가장 충격적 사건으로 꼽히며 ‘그 순간 록의 전설이 탄생했다’는 비평이 더해졌다. 영국에서만 발매된 그들의 데뷔 음반은 그해 8월 미국에서도 발매됐고, 여기에 수록된 곡들은 금세 록 음악의 고전이 되었다.


▲ 1967년 몬터레이 인터내셔널 팝 페스티벌에서 기타를 불태우는 지미 헨드릭스

과격하게 편곡한 미국 국가로 파문을 일으키다

몬터레이 인터내셔널 팝 페스티벌에서의 기타 화형식과 데뷔 음반의 폭발적 반응은 1967년 12월, 지미 헨드릭스 익스피리언스의 두 번째 음반 ‘Axis: Bold As Love’의 발매를 촉진했다.(미국에서는 1968년 1월에 발매됐다) 지미 헨드릭스의 기타 솔로에는, 더욱 뜨거운 화염과 폭격이 강렬한 디스토션·딜레이·피드백 효과, 와와 사운드와 밴딩 주법이 도드라졌고 3인조 편성에서 발현할 수 있는 최대치의 에너지와 과격한 조직력이 담겨 있었다. ‘Spanish Castle Magic’ ‘Wait Until Tomorrow’ ‘Little Wing’ ‘If 6 Was 9’ 같은 곡이 많은 사랑을 받았다.

1968년 10월에는 자신의 음악에 영감을 준 아티스트라고 칭한 밥 딜런의 곡 ‘All Along The Watchtower’를 재해석한 싱글을 발표했다. 그리고 며칠 뒤 미국과 영국에서 녹음한 음반 ‘Electric Ladyland’를 발매했다. ‘Voodoo Chile’ ‘Crosstown Traffic’ ‘All Along The Watchtower’ 등이 수록된 이 음반은 미국 차트 1위를 차지한 지미 헨드릭스의 첫 번째 음반이 되었다. 지미 헨드릭스 익스피리언스의 마지막 음반이 된 이 앨범은 그들이 뜻하던 사이키델릭 록의 완결편이라고 할 수 있는, 완성형의 음악적 성과가 찬연하게 기록된 명작이다.

지미 헨드릭스는 1968년 11월, 지미 헨드릭스 익스피리언스의 해체를 발표했다. 음악 외적으로 집중되는 과도한 관심과 유명세, 약물 복용, 고단한 공연 활동을 이유로 더 이상 음악적 변화와 성장을 기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해체를 결정하게 된 것. 1969년 2월, 지미 헨드릭스 익스피리언스는 런던의 로열 앨버트홀에서 영국에서의 마지막 공연을 치렀고, 그해 6월 미국의 덴버 팝 페스티벌에 참가하는 것을 마지막으로 록 음악의 가장 뜨거운 순간을 저술했던 그룹의 역사를 일단락했다. 지미 헨드릭스 익스피리언스의 해체 이후 지미 헨드릭스는 자신의 스튜디오 일렉트릭 레이디 스튜디오스의 설립과 이곳에서의 전위적인 레코딩에 헌신하며 은둔 생활을 했다.

1969년 8월 15일부터 17일, 우드스톡 뮤직 앤드 아트 페어가 열렸다. 록과 포크, 사이키델릭 사운드와 반전 음악, 마리화나와 약물, ‘히피즘’이 혼재한 1960년대 말, 자유와 저항의 항거가 일시에 폭발하는 시공간이었다. 더 후·제니스 조플린·라비 샨카르·제퍼슨 에어플레인·존 코커·슬라이&더 패밀리 스톤 등이 참가한 이 용광로 같은 축제의 주인공 또한 지미 헨드릭스였다. 그는 우드스톡 뮤직 앤드 아트 페어의 마지막 날 무대에서 미국 국가 ‘The Star Spangled Banner’를 디스토션·피드백 효과에 의한 전기적 소음으로 덧칠해 총격과 포성이 난무하는 베트남전의 전장으로 옮겨냈다. 이는 미국 보수주의의 전통과 권위를 탐욕과 폭력으로 변주한, 혁명적 파문이었다. 


▲ 지미 헨드릭스 익스피리언스

불꽃같은 짧은 생을 마감하다

지미 헨드릭스는 ‘집시 선&레인보스’라는 이름으로 우드스톡 뮤직 앤드 아트 페어에 참가했다. 이는 지미 헨드릭스의 새로운 밴드 ‘밴드 오브 집시스’의 예고였다. 우드스톡 뮤직 앤드 아트 페어가 끝난 후 지미 헨드릭스는 빌리 콕(베이스)·버디 밀레(드럼)와 함께 3인조 록 그룹 밴드 오브 집시스를 출범했다. 1969년의 마지막 날과 1970년의 첫날 사이에 밴드 오브 집시스는 뉴욕의 라이브 앳 더 필리모어 이스트에서 공연을 했다. 지미 헨드릭스의 사후인 1997년 세상에 공개한 음반 ‘First Rays of the New Rising Sun’에서는 재즈 드러머이기도 한 버디 밀레가 작곡과 보컬에 참여하면서 지미 헨드릭스의 음악에 변화가 생겼다. 흑인 음악의 그루비한 리듬감이 특화됨과 동시에 세 명의 연주자가 즉흥적인 감각으로 주고받는 ‘날것’으로서의 라이브 연주에 초점을 맞춘 작업이었다. 1970년 4월에는 미치 미첼이 드러머로 복귀했고, 그해 여름 ‘The Cry Of Love’라는 제목의 밴드 오브 집시스의 전미 투어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했다. 


▲ 1967년 집에서 레니 브루스의 레코드를 들고 있는 지미 헨드릭스

1970년 8월, 지미 헨드릭스는 자신이 직접 디자인한 일렉트릭 레이디 스튜디오스를 개소했으며, 곧바로 영국과 독일에서 라이브 공연을 진행했다. 유럽 일정 중 대부분의 시간을 런던에서 보낸 지미 헨드릭스는 1970년 9월 18일, 런던에 소재한 호텔 ‘사마르칸트’에서 알코올과 수면제 과다 복용으로 의식불명 상태에 이르렀고, 병원으로 이송하던 중 구토에 의한 질식사로 불꽃같은 28년의 짧은 생을 마감했다. 훗날 그의 죽음은 보험금 사기를 목적으로 한 그의 매니저 마이클 제퍼리에 의한 타살이라는 설이 강하게 제기되었다.

2003년과 2011년. 21세기의 시점에서 대중음악 전문지 ‘롤링 스톤’지가 선정한 ‘역대 최고의 기타리스트 100인’ 중 지미 헨드릭스는 변함없이 맨 위 자리를 점령했다. 미국 블루스 록 기타의 명인 마이클 블룸필디는 “지미 헨드릭스의 연주를 접하고 좌절에 빠져 한동안 기타를 연주할 수 없었다”고 회고했다. 마일즈 데이비스가 퓨전 재즈를 창시할 당시 절대적 영향과 자극이 된 인물도 지미 헨드릭스였다. 그만큼 지미 헨드릭스의 등장은 종래의 음악적 질서를 일시에 바꾸는 충격적이고, 진보적이고, 혁신적인 사례다. 그의 왼손에서 장엄하게 울려 퍼지던 기타 연주는 이상과 현실을 소리로 연결하는 시대의 언어가 되었다. 등 뒤, 머리 위에서 기타를 연주하거나, 이로 기타 줄을 물어뜯거나, 기타를 부수고 불태운 과격한 퍼포먼스는 20세기 음악사, 아니 예술사, 문화사의 가장 화려한 혁명적 순간이었다. 그의 전위적 음악을 표현하는 예술적 재킷과 패션 스타일은 현대미술사의 한 부문이 되기도 했다. 그로 인해 지미 헨드릭스는 피카소에 비견되는 위대한 예술가로 숭상되며, 체 게바라에 버금가는 혁명가로 평가되는 온전한 자격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추천 앨범

Are You Experienced

가장 혁명적 데뷔 음반이라는 수식만으로는 이 음반에 숨어 있는 음악적 완성도와 파격적 실험을 설명할 수 없다. 이 음반에는 종래의 음악이 바라보지 못했던 사이키델릭 록의 숙명과 비전이 찬연하게 기록되어 있다. 다채로운 리듬의 변환과 코드 워크 사이에서 종횡무진으로 속사하고 화염을 뿜는 지미 헨드릭스의 기타는, 지미 헨드릭스 이후의 록 음악을 위한 계시였다.

 

Electric Ladyland

혹자는 방종한 음반이라 평하지만, 이는 오류다. 지미 헨드릭스 익스피리언스의 마지막 음반이지만 오히려 신선한 음악적 모색이 숨어 있다. 중용의 기타 사운드는 지미 헨드릭스의 성숙을 뜻하고, 다양한 입장으로 기술되는 일렉트릭 사운드와 기타 주법은 ‘진화’를 의미한다. 팝과 블루스의 영향을 주체적으로 수용한 균형감 있는 음반이다.

 

People, Hell & Angels

2010년에 발표한 또 다른 사후 음반 ‘Valleys Of Neptune’이 지미 헨드릭스 익스피리언스 시절의 옮김이라면, 이 음반은 밴드 오브 집시스 이후의 활동과 연결되어 있다. 정규 그룹이 아닌 다양한 뮤지션과의 협연이 담겨 있어 광의의 입장에서 지미 헨드릭스를 읽을 수 있다. 곡마다 편성과 표정 그리고 지향하는 것이 달라, 그가 만약 더 오랫동안 활동했다면 어떤 음악이었을까 하는 추측과 가설을 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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