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밍고와 정명훈의 ‘시몬 보카네그라’

아시아를 넘어 세계 최고를 꿈꾸는 중국의 대약진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5년 10월 1일 12:00 오전

중국 문화 부양정책의 성과 NCPA, 21세기 문화 콘텐츠의 시대와 함께 하다

아시아에 클래식 음악이 도입된 지 100여 년이 지난 현재, 많은 아시아인이 유럽으로 건너가 그들의 음악을 공부하며 그 세를 불리는 한편, 주목할 만한 스타급 음악가가 한둘씩 등장하고 있다. 아직 유럽 클래식 음악의 완벽한 어법 혹은 관념적인 측면이라고 일컬어지는 정신성과 악보·작곡가에 대한 아카데믹한 연구 등을 따라잡을 수준이라고 말하긴 어렵지만, 적어도 연주자의 기량은 21세기에 접어들며 일취월장하고 있다. 유럽이 500년 넘는 기간 동안 발전시켜온 것을 아시아가 100년 동안 따라잡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처럼 보이지만, 유럽 클래식 음악이 발전하기 시작한 첫 100년보다는 훨씬 수준이 높다. 일본은 클래식 음악 문화 전체가 양·질적으로 유럽과 거의 대등할 정도로 성장했다. 이를 통해 세계적으로 일본만의 문화 상품으로 인정받으며 국제 클래식 음악 비즈니스 무대에 꾸준히 진입하고 있다.

최근 10여 년 동안 중국 또한 비약적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중국에 오케스트라가 들어온 지 오래됐지만, 1990년대까지 자신들만의 노선을 걸으며 서방 세계와 교류하거나 그들의 음악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시기를 고집했다. 하지만 최근에는 국가 전체 GDP의 무려 7%가 넘는 예산을 문화에 투입하며, 매년 도시마다 오페라 하우스나 콘서트홀이 하나씩 들어서는 중이다. 형식이 내용을 결정하듯 국가주도 문화 부양정책에 따라 아낌없이 예산을 투입, 이에 걸맞은 최신 하드웨어를 마련하며 중국 클래식 음악의 위상을 세워나가고 있다. 게다가 음악을 공부하는 학생 수도 1000만 명이 넘는 만큼, 극악의 경쟁률을 뚫은 많은 중국 음악가가 최근 세계적인 스타로 떠오르며 전 세계 오페라 하우스와 콘서트홀에서 뜨거운 환호를 받고 있다. 세계 모든 클래식 음악 스타와 악단 또한 중국의 엄청난 홀에서 매일 밤 공연하며 중국 청중을 만족시키고 있다.

지난 8월 20일부터 23일까지 국가대극원(National Centre for the Performing Arts, 이하 NCPA)에서 베르디 ‘시몬 보카네그라’가 무대에 올랐다. 주연은 노익장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강력한 에너지를 발산하는 플라시도 도밍고가 맡았고, 지휘는 오랜만에 그와 함께 무대에 오른 정명훈, 연출은 일라이자 모신스키였다. 한마디로 드림팀이다. 이 정도 팀을 섭외해 프로덕션을 만들 수준이었는지 의아한 동시에 중국의 제작 능력과 음악 환경 또한 오래전부터 몹시 궁금했던 터, 8월 23일 공연에 참석하기로 마음먹었다. 물론 2011년 국립오페라단에서 정명훈이 지휘한 ‘시몬 보카네그라’에 깊은 감동을 다시 한 번 만끽해보고자 하는 개인적인 욕심도 컸다. 결론적으로 베이징에서 경험한 모든 것은 상상 이상이었다.


▲ 국가대극원(NCPA)의 전경 ©JINGNANFANGSTAINLESS STEEL

우선 톈안먼 서쪽에 자리한 NCPA의 건물 자체가 엄청났다. 열흘 후 열릴 ‘항일전쟁 및 세계 반(反) 파시스트 전쟁 승전 70주년(전승절)’ 기념행사 준비가 한창이어서 지하철과 거리 입구마다 철통같은 검문검색이 펼쳐지고 있었는데, 무려 세 번의 검사를 거친 뒤에야 입구를 통과할 수 있었다. 오리알 모양의 은색 돔이 지평선에 펼쳐져 있는 NCPA. 독립적 문화 공간으로 세계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은색 돔 안에 오페라 하우스, 연극용 극장, 세 개의 콘서트홀 건물이 들어서 있다. 중국 정부가 2008년 베이징올림픽을 염두에 두고 추진한 프로젝트의 하나로, 2001년 착공해 6년 뒤인 2007년에 개관했다. 설계는 프랑스 건축가 폴 앙드뢰가 담당했으며, 약 2만 개 티타늄 패널과 1200여 개 유리판이 거대한 오리알 모양의 돔에 투입됐다. 인공호수에 떠 있는 형상으로서 해자로 둘러싸여 있다.

돔으로 들어선 후 홀까지 가는 여정 또한 만만치 않게 멀고도 길다. 세 개의 거대한 공간을 지나야 하기 때문이다. 우선 계단을 걸어 내려온 뒤, 약 10개 티켓 부스를 지나 일직선의 주작대로로 진입해야 한다. 천장은 유리인데, 돔을 둘러싼 호수 바로 밑이라 햇빛이 투과된 물의 이미지가 통로에 고스란히 비친다. 오른쪽에는 지금까지 NCPA에서 공연한 모든 오페라 프로덕션의 축소 모형이 전시돼 있는 박물관이 있고, 통로에는 음악을 주제로 한 다양한 조각물이 전시돼 있다. 걷다가 지칠 정도가 돼야 오페라 하우스 1층 진입문과 연결된 작은 로비가 등장한다. 여기서 오페라 하우스의 다른 층과 극장 및 콘서트홀로 분산된다. 은하철도 999에 등장하는 듯한 철길을 연상케 하는 높고 긴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면 메인 로비가 등장한다.

메인 로비는 세 개의 건물이 모여 있는 공간이다. 정면에 오페라 하우스(2416석)가 있고 오른쪽에 연극용 테아터(1040석), 왼쪽에 콘서트홀(2017석)이 나란히 서 있다. 건물을 덮고 있는 돔에는 커피숍, 식당, 갤러리, 기념품 가게, 음반·악보 상점, 사무 공간, 자료관, 지난 오페라 프로덕션 전시장이 있다. 5층 높이인 오페라 하우스 옥상에는 NCPA 기념관이 설치돼 있어 홀을 다녀간 거장급 연주자의 핸드 프린팅과 사진, 각종 의상과 기념물이 방대하게 전시돼 있다. 거장들을 한 자리에 모아놓은 상상의 대형 그림이 있는데, 지휘자 정명훈의 위상을 서열 두 번째 정도로 전면에 크게 부각해 그려놓아 일말의 자긍심이 밀려들기도 했다. 건물 전체를 짧은 시간 내에 보긴 어려운 까닭에 연주회 다음 날 40위안을 내고 다시 입장했다. 두 시간 반 동안 구경을 한 뒤에야 비로소 NCPA 전체의 구성과 방향을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었다. 어마어마한 대륙의 스케일이다.


▲ 오페라 하우스 내부 ©Xiao Yi

정작 오페라 하우스 내부는 좌석 수에 비해 크지 않다. 음향을 위한 것 같다. 장식 없는 둥근 원형 천장과 큰 무대가 인상적인 정도. 청중의 관람 태도는 듣던 대로 좋지 않았다. 공연 내내 시종일관 속닥거리고 큰 소리로 전화 받거나 공연 중간에 좁은 좌석을 비집고 들락거리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재밌는 것은 청중이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거나 동영상을 촬영하고자 하면 뒤에서 어셔가 붉은 레이저 포인트 광선을 기계에 발사해 행동을 제지한다는 점. 그런데도 중국 청중은 방해에 굴하지 않는 듯했다. 한편 오페라 하우스 음향은 대단히 좋았다. 2층 중간 자리에서 관람했는데, 가수들의 작은 딕션까지 정확하게 들리고, 음질도 스피커에서 바로 튀어나오는 듯 생생하고 가까웠다. 중역대의 에너지감도 넘쳤고, 대역의 폭도 무척 넓었으며 잔향과 배음도 적절하고 깨끗했다. 심지어 오케스트라 단원의 악보 떨어지는 소리까지 들릴 정도였다.


▲ ‘시몬 보카네그라’의 공연 장면 중 플라시도 도밍고 ©Xiao Yi

바리톤으로 등장한 도밍고의 연주는 환상적이었다. 70세를 넘긴 나이임에도 두터운 오케스트라 사운드를 뚫고 소용돌이치며 전달되는 폭발적인 음량과 특유의 귀티 나는 음색, 귀에 꽂히는 완벽한 딕션, 영화배우급 연기력과 압도적인 무대장악력을 선보였다. 나이에서 비롯되는 짧은 호흡과 가끔 불안정한 음정에도 마치 배역이 원래부터 자기 것인 양 양극을 이끌어가는 도밍고의 타고난 승부사 기질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딸을 만나는 장면이나 죽어가는 마지막 대목에선 여기저기서 탄식이 들려올 정도로 베이징 시민을 극에 몰입하게 했다. 모신스키의 연출 또한 대단했다. 얇은 막에 영상을 비춰 막의 이미지를 상징하고, 무대 뒤 조명 때문에서 기인한 세트의 그림자를 오버랩하는 방식으로 오페라 하우스의 큰 화면을 가득 채우며 강렬한 인상을 주었다. 국립오페라단의 ‘돈 카를로’와는 차원이 다른 엄청난 디테일과 미장센, 엄격한 형식미와 구도가 돋보였다.


▲ 커튼콜에서의 정명훈 ©Xiao Yi

NCPA 콘서트와 오페라를 모두 소화하는 NCPA 오케스트라는 전체 앙상블이나 음악적 표현력에서 아직 서울시향 혹은 일본의 메이저 오케스트라 수준에는 미치지 못하는 것 같다. 그런데도 정명훈은 특유의 집중력과 독보적 디테일을 보여주며 치밀한 음향과 극적 다이내믹을 성공적으로 만들어냈다. 이 프로덕션 성공의 절반은 의심할 바 없이 정명훈 덕으로 커튼콜 때 도밍고에 버금가는 수준의 환호와 우레 같은 박수를 받았다. 객석에 앉아 있던 몇 안 되는 한국 사람으로서, 중국인으로부터 격한 존경을 받는 정명훈의 존재감 덕에 가슴이 벅차오른 순간이었다.

NCPA의 오페라 하우스는 1년에 총 22개 프로덕션을 무대에 올리고 100회 정도 공연을 연다. 이 가운데 9개가 뉴 프로덕션이다. 중국인의 취향에 맞게 제작한 창작 오페라의 비율도 전체 약 5분의 1 정도로 높은 편. 그동안 도밍고가 등장한 ‘나부코’와 오페라 갈라를 담은 두 개의 DVD와 로린 마젤이 신년 음악회와 바그너의 말 없는 링을 지휘한 두 장의 CD를 제작하기도 했다. 아직 오케스트라의 음악적 완성도가 높지 않고 프로덕션 완성도도 고르지 않지만, NCPA가 세계 최고 오페라 하우스와 콘서트홀로 자리 잡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고 있음은 자명하다. 초대하는 아티스트들도 세계적 수준이고 청중의 호응도 높으며, 무엇보다 안정적인 지원과 최고의 홀을 갖고 있다. 시간이 지나면 완성도는 자연히 높아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세상의 모든 오페라 레퍼토리를 아우른 뒤 본격적으로 유럽 메이저 오페라 하우스에 필적하는 공연 횟수와 연출 수준, 더 많은 스타급 아티스트 영입을 통해 중국의 자존심을 완성하고, 중국인에게 세계 최고 프로덕션을 보여주고자 하는 대국적 야망이 내비쳐졌다. 21세기는 문화 콘텐츠의 시대임을 미리 내다본 중국 정부가 주도한 문화 부양정책의 엄청난 성과가 바로 NCPA에 담겨 있다. 불과 8년 만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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