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주희의 하프시코드 특강

찬란하게 빛나는 그리고 우아한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5년 12월 1일 12:00 오전

찬란하게 빛나는 그리고 우아한

고음악에서 결코 빠질 수 없는 ‘약방에 감초’ 하프시코드의 매력 탐구

대학 시절, 과방 바로 옆에 하프시코드 연습실이 있었다. 한번은 무슨 일인지 연습실에 아무도 없었고, 방문마저 빠끔 열려 있는 것이다. 몰래 들어가 처음으로 하프시코드의 건반을 눌러보았다. 손끝으로 전해오는 미묘한 감촉! 순식간에 방 안을 유럽의 어느 궁전으로 바꿔놓는 찬란한 음색에 ‘아!’ 하고 탄성이 절로 나왔다.

하프시코드의 매력에 빠지게 된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며, 하프시코드를 탐구하기 위해 서울 연희동에 자리한 오주희의 자택으로 향했다.

국내 1세대 하프시코드 연주자인 오주희는, 피아노를 전공하던 대학 시절 하프시코드로 전공을 바꾸고 독일 베를린 음대와 미국 줄리아드 음악원에서 공부했다. 1994년에 귀국하여 서울바로크합주단과 한국페스티발앙상블의 단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그 밖에도 다양한 실내악 무대와 독주 무대에서 활발한 연주를 이어가고 있다.

“1979년, 하프시코드 전공으로 유학을 고민하던 당시에는 하프시코드가 거의 알려지지 않은 상태였어요. 국내에 악기도 몇 대 없었고 음반도 쉽게 구할 수 없었죠. 그런 상황에서 하프시코드로 전공을 바꾼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무모한 선택이기도 했어요. 돌이켜보면 그때의 선택이 제게는 행운이었던 것 같아요. 다른 연주자들과 함께 음악적 교감을 나누며 음악을 만들어나가는 앙상블을 선호하는 편인데, 독특한 음색으로 다른 악기들과 어우러지며 앙상블의 색을 다채롭게 해주는 하프시코드는 제게 정말 잘 어울리는 악기죠. 하프시코드는 바로크 음악에서 없어서는 안 될 ‘약방에 감초’ 같은 존재입니다.”

오주희의 방은 마치 하프시코드만을 위해 꾸며진 듯했다. 검정색과 빨강색이 고풍스럽게 섞인 악기와 서재에 가득 꽂혀 있는 하프시코드 관련 서적들. 오주희는 책을 꺼내 수많은 종류의 하프시코드 사진을 보여주며 악기에 대해 친절하게 설명해주었다.

오주희와 함께 하프시코드의 매력 속으로 빠져 보자.

하프시코드의 여러 명칭

하프시코드는 나라마다 다른 이름을 갖고 있다. ‘하프시코드(Harpsichord)’는 주로 영어권에서 부르는 명칭이며, 독일에서는 ‘쳄발로(Cembalo)’, 프랑스에서는 ‘클라브생(Clavecin)’, 이탈리아에서는 ‘그라비쳄발로(Gravicembalo)’ 등으로 부른다. 그렇다면 한국은? “우리나라에서는 ‘하프시코드’와 ‘쳄발로’라는 명칭이 함께 쓰이고 있어요. 반반 정도로 혼용되고 있죠.”

하프시코드가 걸어온 길

중세의 손가락으로 뜯는 현악기인 살터리에 건반을 달아 만든 형태가 하프시코드의 전신이다. 하프시코드의 전성기는 16~18세기로 당시 가장 인기 있는 건반악기였으며, 합주뿐 아니라 독주 악기로도 널리 사용됐다. 18세기 중엽부터는 피아노가 상용화되면서 하프시코드의 입지가 점차적으로 밀려나기 시작했다. 19세기 초반에 이르자 대부분 오페라의 레치타티보 반주로만 사용됐다. 이후 19세기 말에 음악학의 발달과 함께 학문적 이유에서 복원되기 시작했고, 1960년경부터 니콜라우스 아르농쿠르·구스타브 레온하르트를 필두로 한 고음악 부흥운동의 붐을 타고 많은 연주자가 배출됐다.

나라의 문화를 품은 음색

바이올린에 스트라디바리우스 가문이 있다면, 하프시코드에는 플랑드르 지방의 루커스 가문이 있다. 16세기 후반부터 18세기까지 명성이 높았던 루커스 하프시코드는 당대와 후대 제작자들의 모델이 됐다. “하프시코드는 악기를 만드는 나라의 음악적·문화적 특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어요. 일찍이 성악이 발달한 이탈리아의 악기는 밝고 분명한 소리가 나지만 음이 오래 지속되지 않고 성악 반주에 어울리죠. 반면 프랑스 악기는 부드럽고 섬세한 음색, 풍요로운 테너 음역 사운드와 오래 지속되는 울림으로 독주 악기에 어울려요. 루커스로 대표되는 플랑드르 지방의 악기는 이탈리아 악기와 프랑스 악기의 장점을 절충한 음색을 지닙니다. 명료한 음색과 풍부한 사운드를 지니고 있어 독주와 반주에 모두 사용할 수 있죠.”

독특한 외모의 사촌들

버지널과 스피넷은 하프시코드의 사촌인 악기들이다. 버지널은 소형 하프시코드의 한 종류이며, 직육면체 외형이 특징이다. 16~17세기 영국에서 주로 제작됐고, 버지널을 위한 음악도 다수 작곡됐다. 스피넷은 오각형이나 사다리꼴, 또는 날개 모양을 한 소형 하프시코드다.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 선생님도 스피넷을 소유하고 있어요. 1997년에 함께 비발디 ‘사계’ 연주로 전국 투어를 할 때 제가 그 악기를 연주했죠. 제가 하프시코드를 가져가겠다고 해도 ‘아니야, 나는 이 소리가 좋아’라며 스피넷의 소리를 고집하셨던 기억이 나네요.(웃음) 소리는 작지만 매력적인 음색을 지닌 악기랍니다.”

화려한 외관

프레임은 하프시코드의 몸통이다. 그 안에는 건반과 현 그리고 소리를 내기 위한 여러 중요한 기관이 모여 있다. 덮개는 열고 닫을 수 있으며, 덮개를 열면 큰 음량과 풍부한 공명을 얻을 수 있다. 하프시코드는 화려하고 우아한 외관을 자랑하는데, 특히 프레임이나 덮개에 명화를 그려 넣거나 다양한 장식을 새긴 경우가 많다. 루커스 악기 중에는 덮개에 루벤스나 얀 브뤼겔 등의 화가가 그림을 그려 넣은 것도 있다.

건반의 색

하프시코드 중에는 흰 건반과 검은 건반의 색이 피아노와 반대로 구성된 악기가 있는 한편, 피아노와 똑같이 배치된 악기도 있다. 나뭇결의 아름다운 자연색을 그대로 사용한 경우도 있다. 표준형 하프시코드는 주로 두 단의 건반을 갖추고 있다. 하단에는 기본 음높이인 8피트 현과 그보다 한 옥타브 높은 4피트의 현이 장착된다. 상단에는 8피트 현이 장착되는데 ‘콧소리’와 비슷한 음색을 지닌다. 음역대는 낮은 F(파)음에서부터 높은 F음까지 5옥타브가 일반적이다.

피아노처럼 치면 안 돼요!

특별히 허락을 구하고 조심스럽게 건반의 ‘도’ 음을 눌러보았다. 피아노의 건반에 비해 하프시코드 건반은 상당히 가벼운 편이어서 조금만 힘을 주어도 쉽게 눌렸다.

“하프시코드를 연주할 때는 손가락을 건반과 최대한 가까이 두고 손가락 끝의 감각으로 건반을 지그시 누르듯 연주해야 해요. 팔에 힘을 뺀 상태에서 말이죠. 피아노와는 소리 내는 구조가 다르기 때문에 피아노를 치듯 하프시코드를 연주하면 좋은 소리를 낼 수가 없어요.”

다이내믹을 표현하는 방법

하프시코드의 또 다른 장치로는 ‘스톱’이 있다. 스톱은 주로 하단 건반에 적용되는데, 스톱을 조작함에 따라 8피트의 현 하나만을 연주할 수도 있고, 그보다 한 옥타브 높은 4피트의 현과 동시에 연주할 수도 있다. 오주희가 직접 소리의 차이를 들려주었다. 스톱을 사용하여 하단 건반에 두 현이 동시에 울리도록 한 후, 같은 연주를 상단 건반에서 되풀이했다. 음색뿐만 아니라 음량에서도 차이가 느껴졌다.

“잭에 부착된 플렉트럼이 현을 뜯어 소리를 내는 구조이기 때문에, 피아노와는 달리 건반을 누르는 힘 조절을 통해서는 음의 강약을 표현할 수 없어요. 건반을 세게 누르든 약하게 누르든, 같은 크기의 소리가 나기에 건반 자체로는 크레셴도나 데크레셴도를 표현할 수 없죠. 대신 이러한 스톱의 사용으로 다이내믹을 표현할 수 있어요.”

하프시코드의 핵심, ‘잭’

피아노와 하프시코드의 가장 큰 차이는 바로 소리를 내는 방식이다. 건반에 연결된 해머로 현을 ‘때려서’ 소리를 내는 피아노와는 달리, 하프시코드는 기타나 하프처럼 현을 ‘뜯어서’ 소리를 낸다. 이때 가장 중요한 역할은 ‘잭’이 담당한다. 잭은 건반과 연결된 직사각형 모양의 나무 막대이며, 잭의 한 쪽 끝에는 기타의 피크와 같은 역할을 하는 작은 ‘플렉트럼’이 붙어 있다. 플렉트럼은 새의 깃촉이나 플라스틱으로 만든다. 건반을 누르면 잭이 올라오고, 이때 플렉트럼이 현을 뜯으면서 소리가 난다. 건반에서 손을 떼면 잭은 다시 내려오고 잭에 달린 천 소재의 댐퍼가 현에 닿아 울림을 막는다.

하프시코드에서 류트 소리가?!

스톱 중에는 ‘류트 스톱(버프 스톱)’이라는 이름의 독특한 장치가 있다. 현과 수직 방향으로 장착된 막대에 가죽 조각이 부착되어 있는데, 스톱을 조작하면 가죽 조각이 현에 닿아 공명을 방해하여 류트와 유사한 음색이 난다.

함께 움직이는 위아래 건반

하나의 건반을 눌렀을 때, 두 개의 잭을 움직여 두 현을 동시에 연주할 수 있도록 연동시키는 장치를 ‘커플러’라고 한다. 2단 건반의 하프시코드에서 상단 건반을 살짝 밀어 넣으면 하단 건반과 ‘커플링’ 완료! 이때 하단 건반을 연주하면 자동으로 상단 건반의 같은 음이 연주된다.

예민한 악기

하프시코드를 위한 다양한 부속품 중 좌측 상단의 긴 플라스틱은 잭에 부착되어 현을 뜯는 플렉트럼이다. 연주자가 직접 자르고 다듬어서 사용한다. T자 모양의 망치는 하프시코드를 조율하는 튜닝 해머다. “하프시코드는 매우 예민한 악기예요. 주변 환경에 민감해 수시로 조율을 해줘야 하죠. 연주회장에서도 조명의 빛이나 에어컨의 바람, 내부의 습도, 심지어 사람들의 입김에도 반응하기 때문에 연주 직전까지도 조율해야 합니다.”

추천 음반

오주희는 추천 음반으로 세월의 흔적이 담긴 두 장의 LP를 꺼내왔다. 무지카 안티콰 쾰른의 음반과 구스타브 레온하르트의 루이 쿠프랭 음반이었다.

“이 두 음반은 모두 베를린 유학 시절에 구입한 것들입니다. 무지카 안티콰 쾰른의 음반은 저를 바로크 실내악 음악에 완전히 매료시킨 음반이에요. 성 마태 성당에서의 공연을 보고 감동을 받아서 곧장 구입했죠. 하프시코디스트 헨크 바우만의 연주가 무척 인상적이었어요. 레온하르트의 음반은 형편이 넉넉지 못하던 유학생 신분으로 거금을 들여 구입한 신보였습니다. 음반에서 레온하르트는 특히 루이 쿠프랭의 ‘마디 없는 프렐류드’를 감동적으로 연주했어요. 지금까지도 굉장히 아끼는 음반입니다. CD로 복각된 음반도 가지고 있어요.”

사진 박진호(Studio Bob)

 

Back to site top
Translat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