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동반 내한, 리카르도 무티와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

창단 125주년 맞은 ‘중전차’ 시카고 심포니. 수장 리카르도 무티와 함께하는 첫 내한 무대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6년 1월 1일 12:00 오전

 
 

▲ ⓒTodd Rosenberg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CSO)의 첫 내한공연은 지난 2013년 2월 6·7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열렸다. 음악감독 리카르도 무티가 급성 독감으로 아시아 투어를 포기하면서 갑작스레 로린 마젤이 대타로 섰다. 당시 122년 역사의 시카고 심포니와 마젤의 연주에서 기교적인 정확성이나 견고함은 이견의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악단의 개성과 지휘자의 자의적 해석이 강조되다 보니, 때때로 작품이 지닌 원초적 에너지가 약화되기도 했다.

첫날, 마젤은 어둡고 묵직한 음색으로 모차르트 교향곡 41번 ‘주피터’를 풀어냈다. 단색조의 흑백사진 같은 모차르트였다. 브람스 교향곡 2번 역시 ‘브람스의 전원 교향곡’이라는 기존 별칭이 무색할 만큼 느리고 비극적이며 메마르게 그려졌다. 그러나 큰 스케일로 포효하는 튜바를 비롯한 금관악기에서 시카고 심포니의 매력을 느낄 수 있었다.

이튿날 베토벤 교향곡 3번 ‘영웅’에서, 마젤은 시카고 심포니의 저력을 가장 선명하게 드러냈다. 그는 템포를 한껏 늦추고 부분적인 뉘앙스 전달에 집중했다. 연주자가 빠르기를 임의로 바꿔가며 연주하는 루바토를 빈번히 구사하기도 했다. 또한 원곡의 프레이징과 아티큘레이션을 낱낱이 해체한 뒤 주관에 따라 재구성했다. 논란의 여지가 있는 해석이었지만, 시카고 심포니의 위력을 느끼기에는 충분했다. 양일간 바그너 ‘로엔그린’ 3막 전주곡과 브람스 헝가리 춤곡 1번을 앙코르로 연주했다.

3년이 지나 제대로 된 라인업이 내한한다. 시카고 심포니 창단 125주년을 기념해 리카르도 무티와 시카고 심포니의 첫 무대가 펼쳐진다. 1월 28일 베토벤 교향곡 5번 ‘운명’과 말러 교향곡 1번 ‘거인’, 1월 29일 프로코피예프 교향곡 1번 ‘고전’, 힌데미트 ‘현과 관을 위한 협주음악’, 차이콥스키 교향곡 4번을 연주한다. 
 
 
 
시카고 심포니, ‘빅 5’의 수위를 다투다
 
1958년 ‘뉴스위크’지에서는 뉴욕 필·보스턴 심포니·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를 미국 ‘빅 3’ 오케스트라로 다루었다. 그러나 조지 셀/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와 프리츠 라이너/시카고 심포니가 비평가와 청중의 격찬을 받으며 1965년 후로 ‘빅 5’ 오케스트라의 전통이 수립됐다. 이후 세계의 잡지·신문·서적들에 ‘빅 5’라는 용어가 많이 쓰이게 됐으며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다섯 오케스트라를 설립 순서대로 보면 뉴욕 필(1842), 보스턴 심포니(1881), 시카고 심포니(1891),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1900),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1918) 순이다. 그러나 최근 발매되는 음반이나 내한 공연에서 다소 퇴색한 연주력을 보인 뉴욕 필과 재정 문제를 노출한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 등을 고려했을 때 현재 ‘빅 5’ 오케스트라 가운데 시카고 심포니의 연주력은 수위를 다툴 만하다.
 
 
 
125년, 시카고 심포니가 걸어온 길
 
시카고 심포니는 음반을 남긴 최초의 미국 오케스트라다. 초대 음악감독 시어도어 토머스에 이어 1905년부터 1937년까지 재임한 제2대 음악감독 프레더릭 슈토크가 1916년 녹음한 음반에는 멘델스존 ‘결혼행진곡’, 비제 ‘카르멘’ 중 두 곡과 바그너 ‘로엔그린’ 전주곡 등이 실렸다. 슈토크는 1929년 슈만 교향곡 1번 ‘봄’을 녹음했고, 1936년 라비니아 페스티벌을 정식으로 출범시켰다. 시카고 북부 테마 파크 자리에서 11주 동안 열리는 이 페스티벌은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여름 음악제다. 아르투르 로진스키·게오르그 숄티·장 마르티농·프리츠 라이너 등 시카고 심포니 지휘자들이 이 무대를 거쳤고, 1960년대 중반부터는 독자적으로 페스티벌만을 위한 음악감독을 두었다. 현재 제임스 콘론이 오자와 세이지·이슈트반 케르테스·제임스 러바인·크리스토프 에셴바흐에 이어 라비니아 페스티벌의 음악감독을 맡고 있다.

1949~1950년 빌헬름 푸르트벵글러의 객원지휘가 예정됐지만, 나치와 그를 관련시킨 미국 측의 강한 반감으로 시카고 심포니 지휘대에 오르지 못했다.
1950년 라파엘 쿠벨리크는 음악감독에 취임한 후 동시대 음악의 연주 횟수를 늘렸다. 그가 1951년 녹음한 무소륵스키 ‘전람회의 그림’(Mercury)은 음질도 훌륭한 명반으로 남았다. 
프리츠 라이너가 음악감독이던 1953~1963년의 10년간은 시카고 심포니의 수업 시대였다. 무시무시한 지휘대의 독재자였던 그는 이 기간에 시카고 심포니를 정확하고 유연한 오케스트라로 키워냈다. 지금도 라이너/시카고 심포니의 음반을 들어보면, 정확성과 저돌적인 어택, 부드러운 선율이 생생하게 다가온다. 림스키 코르사코프의 ‘셰에라자드’와 같이 색채감을 드러내야 하는 작품이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돈키호테’ 등 R. 슈트라우스의 화려한 작품에서 라이너의 손길이 특히 돋보였다. 
1963년 라이너가 사망하자 후임 음악감독에 오른 프랑스 출신의 장 마르티농은 독일의 고전 레퍼토리 대신 닐센을 비롯한 동시대 음악을 많이 연주했다. 
게오르그 숄티는 1969~1991년 음악감독으로 재임한 22년 동안 시카고 심포니를 세계인의 관심과 주목을 받는 오케스트라로 성장시켰다. 영국의 데카 레이블에서 수많은 음반을 녹음하기도 했다. 말러·브루크너·베토벤·모차르트·차이콥스키·하이든·브람스 등 숄티/시카고 심포니의 레퍼토리는 특별한 약점이 없었다. 단원들의 처우를 개선해 환영받았고, 숄티와 수석 객원 지휘자 카를로 마리아 줄리니의 노력으로 시카고 심포니의 명성이 올라가자 마이클 틸슨 토머스·앙드레 프레빈·레너드 슬래트킨을 비롯한 유명 지휘자들이 시카고 심포니의 녹음에 참여했다. 1988년 번스타인은 시카고 심포니를 지휘해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1번과 7번을 녹음했는데, 이는 번스타인의 명연 중 하나로 손꼽힌다. 
숄티는 유럽 투어를 통해 레코딩에서의 인기를 실연으로 선보였다. 숄티는 22년 동안 시카고 심포니와 1000번이 넘는 연주회를 이끌며 100장이 넘는 음반을 남겼고, 그래미상을 29회나 수상했다. 시카고 심포니측은 숄티가 음악감독 자리에서 물러난 이후에도 1997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명예 음악감독으로 예우했다. 
후임 음악감독은 1991년부터 2006년까지 재임한 다니엘 바렌보임이었다. 바렌보임이 재임 중이던 1997년, 오케스트라홀과 리허설을 위한 번트록홀, 사무실, 레스토랑 등을 구비한 복합 음악 공간 심포니 센터가 재개관했다. 네메 예르비·마리스 얀손스·정명훈 등 객원 지휘자가 등장했고, 수석 객원 지휘자로 활동한 피에르 불레즈는 바렌보임 사임 후 계관 지휘자로 남았다. 바렌보임은 스무 작품이 넘는 현대곡을 초연했지만, 단원들과의 사이는 그리 좋지 않았다. 그는 음악 외적인 업무가 많다는 이유로 2005/2006 시즌이 끝나고 사임했다.
시카고 심포니의 트럼펫 수석 아돌프 허세스는 1947년 아르투르 로진스키가 음악감독일 때 입단해 다니엘 바렌보임이 음악감독이던 2001년까지 53년 동안 시카고 심포니의 중전차 같은 화려한 금관을 이끌었다. 
이후 음악감독직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2006년 베르나르트 하이팅크를 수석지휘자로 영입하고 4년 계약을 맺었다. 하이팅크 시대의 시카고 심포니는 독자적인 레이블인 CSO 사운드를 발족했으며, 활발한 연주 활동을 펼쳤다. 이어 2010년에 리카르도 무티가 새로운 음악감독으로 부임했다. 
 
 
 

 
무티, ‘중전차’를 이끄는 뜨거운 힘
 
리카르도 무티는 라 스칼라 극장에서 19년 동안 음악감독직을 수행했다. 자신과 사이가 좋지 않던 극장장 카를로 폰타나를 해임한 것이 계기가 되면서 단원들과의 갈등이 증폭됐다. 단원과 직원들은 무티가 라 스칼라를 개인의 전유물로 만든다고 고발했고, 불화로 인해 몇 차례 음악회가 연기됐다. 결국 일련의 사건들은 2005년 무티의 사임으로 이어졌다.

무티는 시카고 심포니로부터 음악감독직을 제의받았을 때부터 ‘세계 최고의 오케스트라’라며 시카고 심포니를 추켜세웠다. 3년 전 뉴욕 필 음악감독 제의를 거절했을 때와는 온도차가 있었다. 1973년 라비니아 페스티벌에서 시카고 심포니를 처음 지휘한 무티는 2007년에는 시카고에 한 달 간 머물기도 했고, 1980년부터 1992년까지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의 음악감독을 지낸 경험도 있어 미국 오케스트라의 생리에 대해 속속들이 알고 있다는 강점을 지니고 있었다.
 
무티는 빈 신년음악회를 네 차례(1993·1997·2000·2004)나 지휘했다. 이탈리아 남부 나폴리 출신으로, 1967년 귀도 칸텔리 지휘 콩쿠르 우승 이후 1969년 피렌체 5월 음악제 오케스트라, 1973년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수석지휘자, 1980년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 음악감독, 1986년부터 라 스칼라 필하모닉 음악감독을 거치며 이탈리아·영국·미국의 오케스트라를 두루 경험했다. 
“지휘할 때 오케스트라 단원들을 지배하려 해선 안 된다. 단원들에게 진심으로 대해야 한다. 지휘자와 솔리스트, 가수들의 차이점이 무엇인지 아는가. 가수는 악기를 몸속에 지니고 있다. 솔리스트는 악기를 손가락 아래에 지닌다. 지휘자는 분명한 음악적 아이디어를 단원들에게 공급해야 한다. 단원들은 그것을 간직하고 손가락과 호흡을 통해 청중과 의사소통 한다. 그들에게 음악적 아이디어가 납득이 가며, 가능성 있다고 믿게끔 해야 한다. 앙상블을 만들고 100여 명의 마음을 하나로 만들어야 한다. 군사적인 규율을 통해서가 아니라 예술적인 방식을 통해. 그래서 지휘자란 어려운 직업이다.”
2004년 9월 고양어울림극장에서 라 스칼라 필을 이끌고 내한 공연을 가졌을 때 리카르도 무티가 한 말이다. 무티의 지휘에는 남부 이탈리아 사나이만이 가능한 뜨거운 태양 같은 정열이 스며 있다. 열정의 지휘 아래 시카고 심포니는 ‘중전차’라 불릴 만큼 금관악기가 불을 뿜는다. 무티의 장기인 독일·러시아 레퍼토리를 골고루 들고 내한하는 시카고 심포니의 이번 내한 공연은 지휘자의 열정과 오케스트라의 가공할 화력이 결합하여 듣는 이를 압도할 것이다. 
 
 
 

▲ CSOR9011501 (2CD, DDD)
 
리카르도 무티/시카고 심포니의 베를리오즈 ‘환상 교향곡’ 외
 
리카르도 무티의 시카고 심포니 음악감독 취임 기념 콘서트 실황. 2010년 9월 심포니 센터 오케스트라홀에서의 연주다.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 루이지 케루비니 유스·이탈리아 유스 합동오케스트라의 음반에 이은 무티의 세 번째 베를리오즈 ‘환상 교향곡’ 음반이다. 시카고 심포니의 금관군은 명불허전이다. ‘환상 교향곡’ 4악장 ‘단두대로의 행진’과 5악장 ‘마녀들의 밤 향연의 꿈’에서 고성능 십자포화를 내뿜는다. 굵직한 궤적을 그리는 정교하고 모던한 피날레에 감탄하게 된다.

서정적 멜로드라마 ‘렐리오, 삶으로의 귀환’은 ‘환상 교향곡’과 더불어 ‘어떤 예술가의 생활 에피소드’ 2부작을 작곡가의 의도대로 완성한다. ‘환상 교향곡’의 귀에 익은 고정 악상이 그대로 등장하는 이 작품은 이야기의 내레이션이 중요하다. 무티 지휘 ‘렐리오, 삶으로의 귀환’에 단골로 출연한 프랑스 출신 배우 제라르 드파르디외가 명배우답게 다양한 감정을 연기했다. 
 
 
사진 빈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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