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곡가 황호준

새로운 형식을 위하여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6년 9월 1일 12:00 오전

국립창극단 ‘오르페오전’의 음악을 통해 이 시대 창극의 또 다른 길을 제시하려 한다

연인 에우리디체를 찾아 지하세계로 내려간 남자, 무슨 일이 있더라도 절대 뒤를 돌아봐선 안 되는 이 남자 오르페오의 이야기는 유명하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몬테베르디의 오페라 ‘오르페오’로, 글루크의 오페라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체’로 세상에 나오기도 했다. 국립극장 2016/2017 레퍼토리 시즌 개막작이자 국립창극단(예술감독 김성녀)의 신작이기도 한 ‘오르페오전’은 이러한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의 애정 서사를 담은 작품이다.

하지만 오페라의 이야기를 창극이라는 그릇에 고스란히 담진 않는다. 2015년 국립창극단 ‘적벽가’를 연출한 이소영과 작곡가 황호준은 남다른 방식으로 작품을 빚고 있기 때문이다. 2012년 국립창극단의 ‘배비장전’을 시작으로, 2013년 ‘메디아’, 2015년 ‘아비. 방연’에 이어 네 번째 창극에 도전하는 황호준은 “창극은 이렇다”와 “창극은 이래야 한다”는 현실에 ‘왜 꼭 그래야 하는가’라는 의문을 품고 음표를 그리고 있다. 기존과 다른 각도를 품은 그의 시선. 돌아오는 대답에서도 역시 남다른 각도의 시선이 느껴졌다. 다음은 황호준과 일문일답.

새롭게 선보이는 ‘오르페오전’에서 이소영이 연출 외에 대본 집필을 맡았다. 보통 대본이 나온 뒤에 움직이는 게 작곡가인데, 대본이 나오기도 전에 음악을 구상했다고 들었다.

대본이 완결된 후 작곡하는 것에 익숙하다. 하지만 장면 구성을 놓고 이소영 연출가에게 음악적 구상을 먼저 제안하기도 하고, 이를 바탕으로 대본 작업이 이뤄지기도 했다. 이것은 처음부터 합의된 창작 과정이었다. 이런 과정은 음악이 더 적극적으로 극적(劇的) 기능을 해야 한다는 이소영 연출가의 의도가 반영된 것이기도 하고. 음악적 서사에 대한 고민을 집중적으로 해볼 수 있는 소중한 경험이었다.

국립창극단의 ‘배비장전’ ‘메디아’ ‘아비. 방연’을 작곡했다. 이러한 방식으로 작업한 작품이 있었나?

없다. ‘오르페오전’이 처음이다.

그럼 함께 장면을 구성해나간다는 점에서 곡만 쓰던 예전과 달리 더 넓은 작가적 시선이 필요할 것 같은데. ‘오르페오전’은 창극임에도, 작품 주제를 드러내는 방식에서 무대미술과 이미지의 역할이 크다. 이소영 연출가 역시 시각적 이미지를 통해 서사를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역량이 뛰어난 사람이고. 예전에 음악극·창극·오페라를 작곡할 땐 작곡가로서 오로지 대본만 붙들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엔 아니다. 무대미술이 담고 있는 상징과 그 성격들을 고려하여 음표를 그려야 하고, 때로는 나의 음악들이 디자이너들의 초안에도 영향을 주었다. 한마디로 연출가·작곡가·안무가·무대디자이너가 함께 구축해나가는 방식이다. 내게 작곡가로서 주어진 임무이자 특권이 있다면 이러한 다양한 요소를 음악적·음향적으로 통일성 있게 구축하는 것이다.

어떤 음악이 나올지 궁금하다.

창극은 일반적으로 상황을 묘사하고 이야기를 전달하는 데 집중한다. 그런 점에서 소리꾼은 한편으론 이야기꾼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흥보가 중 ‘제비노정기’ 대목에서 제비가 지나오는 지역의 풍광을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는가. 극적 전개는 다소 느슨해도 이러한 이야기가 갖는 재미가 창극의 힘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오르페오전’에선 이처럼 상황 묘사를 위한 설명조의 사설을 배제했다. 극 중 인물도 ‘올페’(오르페우스)와 ‘애울’(에우리디체)을 제외하곤, 캐릭터가 강한 등장인물도 없다. 이들이 사후세계에서 돌아온다는 줄기에, 설명조의 언어를 ‘추가’하기보단 ‘배제’하는 방식을 택했다. 게다가 두 사람의 대사와 사설들도 은유적이고 함축적인 시적 언어다. 따라서 ‘오르페오전’은 기존 창극의 문법에서 탈피한 대본이기 때문에, 나는 ‘말맛’을 살리는 방식과는 전혀 다른 방식을 찾아야 했다. 다시 말해 소리의 이면(裏面)을 안으로 가져가면서 우리말이 가진 운율을 살리는 가락 구성이 아니라, 이면을 판소리·기악음악·음향을 통해 드러나게 하는 방식들을 모색해야 했다.

어떤 악기들을 사용하는가?

편성은 다양한 가능성을 열어두고 고민을 거듭했다. 전통악기인 대금·피리·가야금 등을 사용하고, 거문고가 중요한 이미지들을 그리기도 한다. 눈 대목에 준하는 장면에선 깔끔하게 북만 사용하기도 하고. 현악 4중주와 바순 등의 서양 연주 형식과 악기를 사용하기도 한다. 바순은 바소 콘티누오처럼 낮은 음을 지속할 때 쓸 것이다. 지금까지 창극에서 기악의 역할은 ‘반주’에 그쳤다. 수성가락(노래 소리를 따라서 반주하는 가락)이라 불리는 음악은 소리꾼(배우)의 시김새와 성음을 강조하거나 그것을 극대화하는 반주 양식이다. 최근 창극의 음악양식이 많이 바뀌고 있는 가운데 화성을 적극적으로 사용하곤 하지만, 기악은 여전히 박자를 짚는 장단의 틀 속에서 반주의 역할을 벗어나진 못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서사를 풀어가는 역할 역시 소리꾼과 그들의 소리에 의존하고. ‘오르페오전’에서 기악 앙상블은 두 개의 역할을 담당한다. 이야기, 즉 극적 서사를 풀어내는 역할과 기존처럼 음악을 담당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음악 역시 소리꾼 못지않게 어떤 배우로서 이야기를 끌고 가는 ‘제3의 역할’을 한다는 것인가?

그렇다. 생명과 삶, 죽음 등의 이미지를 음향적으로 구현하기 위해 다양한 ‘소리’를 사용한다. 이러한 소리들은 서사적 정보를 제공하는 가사를 갖지 않는다. 올페가 애울을 만나러 간 사후세계를 표현하는 소리는 합창을 이용한 음향으로 그 공간을 표현한다. 현재 머릿속엔 음악과 소리로 그린 스케치가 많다. 하지만 이러한 작업 과정은 늘 어렵다. 절망과 희망이 교차되곤 한다.

신화 속 오르페오도 수금(작은 하프)을 연주하는 것으로 묘사되곤 한다.

‘오르페오전’에선 피리를 연주하는 것으로 설정했다. 그 소리가 들릴 때 관객들이 어떤 악기인지 단번에 맞히기보단 “어떤 악기일까?”라며 상상력을 부추길 수 있는 소리였으면 했다. 멀리서 들려오는 피리 소리··· 이 정도? 이번에는 리코더 계열의 민속 목관악기를 사용했다.

2013년 서재형(연출)·한아름(극본·작사)과 함께한 국립창극단 ‘메디아’에서 송 스루(song-through)라는 방식을 택했다. 무대에선 어떠한 일이 벌어지지 않아도, 음악이 처음부터 끝까지 중단 없이 흐르는 형식이었다. ‘오르페오전’의 대본을 보니 올페와 애울의 대화가 함축적이고 그 사이로 여백이 많아 이런 방식을 택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90분 분량의 작품인데, 음악은 계속 흐른다. 주인공들의 심리와 공간을 묘사하는 음악과 음향은 이 작품에서 대단히 중요하다. 하지만 ‘음향’을 위해 ‘음악’이 잠깐 멈추는 부분이 있다. 예를 들어 항아리 두드리는 소리, 손으로 그 안의 물을 만질 때 나는 소리 등의 음향을 어떻게 음악으로 끌어안아야 하는지, 많은 고민을 하고 있다.

요새 황호준은 양식에 대한 실험에 집중하고 있는 것 같다.

오늘날의 창극은 다양해야 하고, 이를 위한 각각의 실험은 모두 의미 있다고 본다. 앞에서 말한 작업 방식이 기존의 창극을 위한 비판적 대안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이런 시도들이 의미를 갖길 원하고, 새로운 창작 욕망과 재능을 지닌 서양음악 종사자들도 새로운 창극을 만들었으면 한다. 기존의 길보다 더 좋은 길을 내겠다는 생각보단 기존의 길도 걸어보고, 새 길도 개척하는 것이다. 국립창극단은 ‘국립’이기 때문에 공신력을 얻을 수 있다. 이번 ‘오르페오전’ 같은 작업 방식과 양식적 실험이 계속되려면 많은 사람이 납득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가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사진 국립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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