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림포스 최고의 여신, 헤라

유형종의 MYTH+MUSIC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6년 10월 1일 12:00 오전

결혼을 수호하기 위해 제우스의 주변 여성들에게 저주를 퍼부은 그녀의 이야기


▲ 프란츠 크리스토프 야넥 ‘유피테르(제우스)와 유노(헤라)’

카발리, 헨델, 바그너, 드뷔시의 오페라와 홀스트의 음악, 유럽 문학에 담긴 헤라와 그 자식들

헤라(로마신화의 유노)는 올림포스 여신 중 최고의 자리에 앉아 있다. 제우스의 아내이기 때문이다. 그리스 신의 계보를 정리한 헤시오도스는 헤라를 메티스, 테미스에 이은 제우스의 세 번째 아내라고 기록했다. 그러나 제우스는 첫 아내인 메티스가 낳을 아들이 자신을 최고신의 자리에서 끌어내릴 것이란 신탁을 접한 후, 화근을 없애기 위해 그녀를 삼켜버렸다. 두 번째 아내인 테미스의 경우는 제우스와의 사이에서 여러 자식을 낳았지만, 자신과 자식들 모두 올림포스 12신에 포함되지 못한 육두품 신세였다. 헤라 자신은 물론 두 아들인 전쟁의 신 아레스와 대장장이 신 헤파이스토스가 올림포스 12신에 포함됐다. 따라서 헤라는 제우스의 실질적 본처로서, 또 최고 여신으로서 모든 권위를 누릴 수 있었다. 문제는 헤라나 아레스, 헤파이스토스 모두 그리스신화에서 진정한 사랑을 받는 주인공은 되지 못했다는 점이다.

사그라지지 않는 여신의 질투심

사실 헤라는 제우스와 남매지간이다. 제우스가 부친 우라노스에게 구토하는 약을 먹여 배 속에 갇혀 있던 형제와 자매들을 탈출시킬 때 헤라도 함께 나왔다. 근친혼에 대한 터부가 희박하던 시절, 제우스의 남매로는 대지의 여신 데메테르와 화롯불의 여신 헤스티아도 있었건만 헤라가 간택된 것을 보면 헤라의 미모가 가장 뛰어나지 않았나 싶다. 헤라는 ‘흰 팔의 헤라’ 또는 ‘암소 눈을 가진 여왕’으로 표현되기도 하는데, 이는 아름다움에 대한 찬사로 쓰이기도 한다. 게다가 헤라는 ‘헤라 카타노 크림’이라는 화장품도 있듯, 해마다 ‘청춘의 샘’으로 불리는 카타노 샘에서 목욕을 함으로써 처녀의 젊음을 유지할 수 있었다. 파리스의 심판에서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 제우스가 가장 사랑한 딸 아테나와 아름다움을 겨룰 수 있는 비결이 여기 있었다.

헤라는 그리스신화가 성립되기 이전의 토착 신화에서도 이미 존재했다. 그 이름이 영웅을 뜻하는 ‘Heros’의 여성형인 것을 보면 처음부터 굉장한 권능을 지닌 여신으로 추앙받았음을 추측해볼 수 있고, 그렇기에 올림포스 최고신인 제우스의 배필로 헤라보다 적절한 상대는 없었으리라.

신화 속에서 헤라는 질투심 강한 여신으로 묘사된다. 남편인 제우스가 사랑한 수많은 여신과 인간 여인, 그리고 그 자식들을 향해 저주를 내리곤 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헤라는 ‘결혼의 여신’이라는 직분도 가지고 있었다. 제우스의 외도는 결혼의 신성함을 해친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에 그 가치를 지키고자 더욱 안간힘을 쓸 수밖에 없던 것이다. 예를 들면 아폴론과 아르테미스 쌍둥이를 임신한 여신 레토가 해산할 곳을 찾지 못해 떠돌아다니게 만들었고, 디오니소스를 임신한 공주 세멜레를 설득해 인간이 보아서는 안 될 제우스의 참모습을 보게 해 번갯불에 불타 죽게 했다. 또 님프인 칼리스토가 제우스의 사랑을 받아 아르카스를 낳자 그녀를 곰으로 변신시켜 아들의 화살에 맞아죽게 했고(누가 곰으로 변하게 했는가에 대한 이견이 있음), 밀회를 들킬까 염려해 아름다운 이오를 암소 모습으로 바꾼 제우스로부터 암소를 빼앗아 백 개의 눈이 달릴 괴물 아르고스의 감시를 받게 하기도 했다. 제우스가 알크메네를 통해 얻은 헤라클레스가 비범한 영웅임을 알고 갓난아이에게 뱀을 보내는가 하면, 성인이 된 다음에는 광기를 불어넣었으며 인간이 감당하기 힘든 과업을 12개나 헤쳐 나가야 했을 때에도 그 배후에는 항상 헤라가 있었다.

이런 일화들 때문에 헤라는 오페라에서도 질투의 화신으로 분한다. 카발리의 ‘라 칼리스토(1651)’, 헨델의 ‘세멜레(1744)’가 그 예다. 오페라에서 헤라는 로마식 이름인 유노 혹은 주노로 표기된다.

‘세멜레’의 경우, 원래 신화에 변형을 가해 주노가 세멜레의 언니인 이노로 변신하여 세멜레에게 접근하는 것으로 등장한다. 에로스와 프시케 이야기의 일부를 세멜레에 적용한 것이다. 바그너의 ‘니벨룽의 반지’ 4부작 중 첫 두 작품인 ‘라인의 황금’과 ‘발퀴레’에선 최고신 보탄의 아내로 프리카가 등장하는데, 헤라와 흡사한 인물이다. 보탄이 에르다 여신으로부터 아홉 명의 여전사인 발퀴레를 얻은 것을 질타하고, ‘발퀴레’의 2막 1장에서 인간 여인과의 사이에서 얻은 지크문트와 지클린데 남매의 사랑을 무산시키려는 프리카의 모습은 마치 제우스를 추궁하는 헤라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하는 듯하다.

최고신을 부모로 둔 조금 모자란 자식들

헤라는 두 아들인 아레스와 헤파이스토스와 딸인 헤베, 에일레이티이아까지 네 명의 자식을 뒀다. 모두 제우스와의 사이에서 낳은 것으로 전해지지만, 헤파이스토스의 경우 헤라 혼자 힘으로 낳았다는 설도 존재한다. 누가 형, 누나이고 동생인지에 대해서도 사실 명확하게 구분되어 있지 않다.

헤파이스토스는 대장장이의 신이며 절름발이 신으로 묘사된다. 태어날 때부터 절름발이였다는 설도 있고, 제우스와 헤라가 부부싸움을 하던 중 헤파이스토스가 헤라의 편을 들자 화가 난 제우스가 올림포스 산 아래로 집어던지는 바람에 다리를 다쳤다고도 한다. 어쨌든 부모의 관심에서 멀어진 절름발이 신은 타지에서 성장하면서 대장장이 기술을 익혔고, 올림포스 12신의 반열에 오른 뒤에도 신들을 위한 다양한 무기, 장신구 등을 만들었다. 헤파이스토스의 로마신화에서의 이름인 ‘불칸(Vulcan)’은 화산을 뜻하는 ‘Volcano’와 같은 어원을 갖고 있기도 한데, 대장간이 뜨거운 불을 다루는 곳이다 보니 신화에선 주로 화산을 그의 작업장으로 묘사하곤 했다. 시칠리아의 활화산인 에트나가 대표적이다. 헤파이스토스는 올림포스 신임에도, 장애를 가지고 있다 하여 낮은 서열 혹은 서민적인 이미지로 그려지곤 하며 신으로서는 드물게 동정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또 다른 아들인 아레스는 전쟁의 신이다. 이복누이인 아테나가 전략가이자 상대방의 공격을 지혜롭게 방어할 줄 아는 전쟁의 여신인 반면, 아레스는 오로지 무지막지한 폭력과 파괴로 전쟁을 이끌었다. 제우스는 이런 아레스의 폭력적인 기질을 못마땅해했다. 오죽하면 “나는 올림포스 신 가운데 네가 가장 밉다. 전쟁과 싸움질밖에는 모르는구나!”라고 탄식했을까. 그렇다고 무적의 싸움꾼은 아니어서 몇 번이나 큰 패배를 경험하기도 했다. 트로이 전쟁에서는 주로 트로이 편에서 싸웠는데 그리스군에서 싸운 아테나와 겨루다 굴욕을 당했으며, 용사 디오메네스의 창에 찔려 큰 소리를 지르며 올림포스로 달아난 적도 있다. 난폭한 강도로 이름 높은 아들 키크노스가 헤라클레스에게 죽임을 당하자 분풀이로 창을 던졌다가 오히려 본인의 넓적다리를 다쳤는가 하면, 거인 형제에게 붙잡혀 13개월이나 청동 항아리에 갇혀 있기도 했다.

헤파이스토스와 아레스는 형제 사이라기보다는 라이벌의 측면이 강하다. 우선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를 사이에 둔 삼각관계가 그러하다. 아프로디테는 가장 아름다운 여신이었지만, 남편은 신 중에서 가장 못생기고 절름발이기까지 한 헤파이스토스였다. 이 결혼은 헤라가 직접 주선했는데, 아프로디테의 아름다움을 시기한 책략일 수도 있고, 못난 아들에게 아름다운 부인을 만들어주고 싶은 모정이라 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정작 아프로디테가 사랑한 상대는 남편이 아닌 그의 형제 아레스였다. 아레스는 머리를 쓸 줄은 몰랐지만, 변강쇠처럼 힘이 좋고 잘생긴 남신이었기 때문이다. 아프로디테는 헤파이스토스가 집을 비우면 몰래 아레스를 불러 사랑을 나누곤 했는데, 낮에 지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내려다보는 태양신 헬리오스가 보다 못해 헤파이스토스에게 고자질하기에 이른다. 이에 헤파이스토스는 대장장이의 기술을 발휘해 아내의 침대에 보이지 않는 그물을 설치했고, 사랑을 나누려다 그물에 걸린 아레스의 모습을 여러 신들에게 보여주며 망신을 주기도 했다.

그럼에도 헤파이스토스가 아레스나 아프로디테에게 그 이상의 복수를 했다는 이야기는 전해지지 않는다. 오히려 포세이돈의 중재로 용서했다고 하니 순박한 신이라 할 수 있겠다. 두 신이 직접 경쟁하진 않았지만, 태양계의 화성에 아레스의 로마식 이름인 ‘마르스(Mars)’가 붙은 점을 보면 ‘불’이라는 속성도 결국 아레스가 빼앗은 것이 아닌가 싶다. 화성은 한자대로 ‘불의 별’인데, 불을 다루는 대장장이의 별로 여겨야 했음에도 피를 상징한다 하여 전쟁신의 이름을 붙이게 됐다. 홀스트의 관현악 모음곡인 ‘행성’의 제1곡은 ‘전쟁의 신 마르스’인데, 압도적인 리듬 속에 대군의 행진을 묘사하고 있다.

헤라를 닮은 작품 속 인물들


▲ 루브르 박물관 소장 ‘종을 든 헤라’

‘남편이 있는 여인과 남편 측근 간의 금지된 사랑’이라는 이야기 소재는 아프로디테가 남편 헤파이스토스 대신 아레스와 남몰래 사랑하는 것과 흡사하고, 중세의 로망을 비롯해 현대물에 이르기까지 여러 문학 작품에 다뤄진 바 있다. 다만 그리스신화에서는 아내를 빼앗긴 헤파이스토스에게 독자의 초점이 맞춰지는 데 반해, 문학에서는 불륜의 대가로 희생당하는 연인에게 일반적으로 더 주목하고 있다.

‘아서왕의 이야기’의 랜슬롯,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트리스탄, ‘리미니의 프란체스카’의 파올로, ‘펠리아스와 멜리장드’의 펠리아스가 그렇다. 이 중 ‘트리스탄과 이졸데’는 독일에서 바그너에 의해, ‘펠리아스와 멜리장드’는 프랑스에서 드뷔시에 의해 오페라로 작곡되었다. 비슷한 이야기이면서도 작곡가가 속한 국가적 배경에 맞는 양상으로 극이 진행되는 점을 발견할 수 있다.

‘리미니의 프란체스카’는 이탈리아 동쪽 해안도시인 리미니가 이야기의 배경이며, 단테의 ‘신곡’에 언급되어 있기도 하다. ‘펠리아스와 멜리장드’의 원작자는 프랑스인이 아니지만 프랑스어를 쓰는 벨기에 출신의 모리스 마테를링크다. 원작 자체가 프랑스어의 뉘앙스를 잘 살렸다.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배경은 아일랜드, 영국의 콘월, 프랑스의 부르고뉴 등 켈트족 지역이지만, 바그너에게는 게르만 민족을 포함하는 광의의 북유럽 신화로 받아들여졌다.

한편 헤라의 두 딸은 두 아들보다도 더 알려진 바가 없다. 이복자매인 아테나, 아프로디테, 아르테미스와 달리 올림포스 12신에 들지도 못했다. 헤베는 ‘청춘’을 의인화한 젊음의 여신이지만 제우스에게 술이나 따르는 시녀 역할에 머물렀고, 그나마 그 일도 훗날 제우스가 납치해 온 미소년 가니메데스에게 빼앗긴다. 헤라클레스와 화해한 헤라에 의해 그의 세 번째 아내가 되지만, 여신인 헤베 입장에선 인간계 출신인 헤라클레스의 신분에 다소 서운했을 듯싶다. 또 다른 딸인 에일레이티이아는 ‘출산의 여신’으로서 결혼의 여신인 헤라의 보조자로 등장할 뿐, 독립적인 일화는 존재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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