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시립교향악단 악장 김동현

국내 최장수 악장의 25년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6년 12월 1일 12:00 오전

지휘자가 악장과 악수를 나눈다는 것은 오케스트라 전체와 악수를 나누는 것과 같다. 공연 뒤, 박수가 쏟아질 때 악장이 그대로 앉아 있는 경우는 청중의 박수를 오케스트라가 아니라 지휘자에게만 돌리겠다는 존경의 표시다. 그래서 악장은 곧 오케스트라다(이탈리아에서는 악장을 ‘오케스트라의 어깨’라고도 표현한다).

12월 14일 수원시향이 선보일 실내악 콘서트(수원SK아트리움 소공연장)는 25년 동안 올곧게 수원시향에 재직해온 김동현 악장 정년퇴임 기념 공연이다. 무대에 막이 내려오는 순간, ‘대한민국 최장수 악장’이 태어난다.

1992년 수원시향에 악장으로 입단하여 상임지휘자 금난새(1992~1999), 박은성(2001~2008) 시절을 겪었고, 현재 김대진(2008~)과 함께하고 있다. 각 지휘자마다 인상 깊었던 일들이 있을 텐데.

악단이 호시절에 입단하여 그 영예를 유지했다기보다, 발전 가능성은 있지만 막연하고 불안하던 시절에 입단하여 수준을 끌어올리는 맛에 살아왔다. 금난새는 수원시향을 널리 알렸고, 박은성은 음악적 깊이를 갖추게 했다. 이렇게 축적된 전통과 노하우를 바탕으로 세련미를 갈고닦아 잘 포장한 이가 김대진이다. 입단하던 해에 금난새와 6시간짜리 마라톤 콘서트를 했다. 1995년에는 수원시향 역사상 최초로 미국 투어를 떠났다. 박은성은 금난새와 성격이 완전 달랐다. 브루크너 같은 무게 있는 레퍼토리를 주로 선보였다. 금난새가 ‘대중’을 끌어 모았다면, 박은성은 ‘마니아’를 늘렸다. 하지만 박은성 시절에 관객과의 소통의 폭이 좁아졌다는 것을 느끼기도 했다. 김대진은 사실 지휘자보다 피아니스트로 알려져 있던 이다. 취임 전 수원시향에 협연자로 오거나 객원지휘를 할 때 단원들과의 느낌이 좋았다. 그래서 ‘스타 피아니스트’를 ‘스타 지휘자’로 만들자는 데 패를 던졌다.

그 예상이 적중했나?

김대진은 나보다 세 살 아래지만 존대하는 동생이다. 그가 예원학교에 다닐 때 나의 반주를 해주기도 했고, 내가 미국으로 유학 갔을 때 이 ‘형’을 마중 나온 동생이기도 하다. 어디를 가든 그에 대해 한없이 자랑한다. 그에 대한 자랑이 곧 악단 자랑이기 때문이다. 현재 국내의 교향악단 중 음반을 발매하는 곳은 서울시향과 우리밖에 없다. 차이콥스키·시벨리우스 교향곡 전곡을 담은 음반이 소니 레이블을 통해 유통된다. 해외 투어를 갈 때도 주최측이 제공하는 초청비를 받고 가고. 그와 해외 투어를 가면 제일 먼저 하는 말이 ‘시차를 잊고 현지 시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십시오’다. ‘한국은 지금 몇 시인데···’라며 해이해진 단원들을 꽉 조이는 거지. 독하다. 우리 두 사람이 제일 아프고 골골해야 하는데, 둘이 제일 안 아프고 생생하다. 서로 독기가 통하는 동료다.(웃음)

악장은 연습 과정과 공연을 앞두고 긴장도도 다를 것이다.

다른 오케스트라의 경우, 아마··· 연습실에서 보잉을 맞추고 통일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본격적인 연습이 시작되기 전에 통일해야 할 보잉을 악보에 미리 표기하여 나눠 준다. 예습서인 셈이다. 한경진 악장도 그렇게 하고 있고. 독주 보잉과 달리 오케스트라와 상주 홀에 맞는 보잉을 찾는 과정은 참으로 힘들다. 그래서 유튜브로 이름난 교향악단 악장의 보잉을 베끼기도 한다.(웃음) 열심히 살아왔다. 예전에 ‘김동현의 연습실에 불이 꺼지면 건물 전체의 불이 꺼진다’는 소문도 돌았다. 솔직히 가진 것보다 노력으로 견뎌왔다고 고백하고 싶다. 국내 교향악단 악장의 정년은 58세다. 단원은 70~80세가 되어도 자기 관리만 잘하면 악단 생활에는 문제가 없다. 하지만 악장은 그렇지 못하다. 마음의 정년이랄까. 교향곡 중 간혹 악장 소임의 독주 부분이 있는데, 망치면 그때는 정말···. 악장의 특권 중 하나가 대기실을 혼자 쓰는 것인데, 아마 그럴 때 혼자 울라고 그러는 것이 아닐까.(웃음)

이럴 때 차라리 단원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나?

악장의 특권 중 하나는 단원 평정 심사를 하는 것이다. 1992년에 입단했을 때 80퍼센트가 연장자들이었다. 담배 피우는 것도 눈치가 보였다. 그런데 그들을 심사하여 동료를 내보내야 한다는 생각에 가슴이 무거웠다. 결국 심사 중간에 쓰러져 넘어갔지. 스트레스성 공황장애였다. 때때로 평정에 반대하다가 권고사직을 받기도 했다.

그동안 악장으로서 스트레스가 한둘이 아니었을 텐데. 여기서 털어버리자.

악장의 역할은 단원들을 이해하고, 지휘자를 보필하는 것이다. 둘 사이가 평화로울 때는 가교와 다리라는 표현을 쓴다. 하지만 문제가 터지면 쿠션이 되어주는 게 악장이다. 문제가 생기면 서로가 일방적이다. 그 사이에서 단원들의 일방적인 의견을 지휘자에게 부드럽게 전달해야 하고, 지휘자가 몰라도 좋은 이야기는 적당히 감출 줄도 알아야 한다. 지휘자가 단원들에게 요구하는 것이 좀 강압적이다 싶을 때도 단원들에게 부드럽게 전달해야 하고. 지금은 수원시향 사무국이 행정을 전문적으로 하지만, 예전에는 사무국, 단원, 지휘자 사이에서 나는 쿠션이었다. 악장으로 입단해 쿠션으로 진화한 거지. 내 별자리가 천칭자리다. 천칭이 저울 아닌가. 내 운명대로 살았던 거지. 누구는 기회주의자라고 하는데, 사실 나는 양쪽이 시끄러운 게 지독하게 싫었던 평화주의자다.

스승인 김남윤 교수의 영향인지, 제자를 많이 길러냈다.

박지윤, 이유라, 김혜진, 지금은 고인이 된 권혁주 등 비슷한 또래인데 그 기수를 놓고 ‘10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기수라고 한다. 드레스덴 대학의 교수인 유라는 어릴 때부터 정말 특출했다. 초등학교 1학년 때 처음 만났는데 바흐의 ‘샤콘’을 연주했다. 기가 막혔다. 내가 조언하려고 어느 부분을 연주하니 옆의 엄마한테 귓속말을 하더라. 레슨 끝나고 뭐라 했는지 물어보니 ‘기돈 크레머도 그 부분을 그렇게 연주한다’고 하더라. ‘물건’이었던 거지. 금난새한테 자랑했고 그 덕에 협연도 많이 했다. 미국 이스트 캐롤라이나 대학의 교수인 혜진이는 확확 성장하는 게 무엇인지를 보여준 제자다. 중학교 2학년 때 메뉴인 콩쿠르의 주니어 부문에 입상했고, 커티스 음악원 입학 후에는 성인 부문에서 우승했다. 에셴바흐가 지휘하는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와 데뷔했다. 프랑스 페이 드 라 루아 국립오케스트라 악장인 지윤이는 대기만성형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준 제자다. 파리 국립음악원에서 사사한 로랑 도가레일 교수가 파리오케스트라 악장 출신인데, 지윤이가 어느 인터뷰에서 ‘자신이 악장의 삶을 사는 이유는 두 스승 덕에 어릴 적부터 오케스트라에 관심이 많아서’라고 하더라. 내심 뿌듯했다.

호랑이가 호랑이를 낳고, ‘악장이 악장을 낳는다’는 생각이 든다.

한경진 악장, 한아름(제2수석)을 포함하여 수원시향에도 13명의 제자가 함께한다. 더 자랑해도 되는가? (얼마든지!) 서울시향 문주영(제1수석), 대전시향 신민경(제1수석), 전주시향 김아름(제2수석), 창원시향 이리나(부악장), 청주시향 김근화(제1수석), 인천시향 한수혜(제1수석), 그리고 보스턴 심포니의 이주람(제2부수석) 등. 제자들이 입단했을 때, 나를 아는 단원들로부터 ‘네 선생처럼 행동하며 살아라’라는 이야기를 듣는단다. 역시 뿌듯하다.

젊은 장수와 노장은 같은 장수지만, 전쟁을 대하는 태도와 지략은 다르다. 젊은 김동현과 노장 김동현은 어떻게 다른가?

나 역시 젊을 때는 ‘혈기’, 그거 하나였다. 무서울 게 없었다. 사표는 언제든지 던질 태세였고. 자연의 순리에 따라 단원들이 동생이나 자식 같은 존재가 되었다. 나이가 든 악장은 장수보다는 가장에 가깝다. 초로(初老)의 가장이 바라는 것이 무엇인가. 딱 하나, 집안의 화목이다. 오케스트라는 오만 가지 사람들이 모인 곳이다. 그러니 ‘반목’이 아닌 ‘화목’만을 바랄 뿐이다.

해외 오케스트라에 단원으로 입단하여 한국의 저력을 알리던 과거와 달리, 지금은 젊은 연주자들이 세계적 교향악단에 악장·수석·부수석으로 입단하여 새로운 파워를 보여주고 있다. 지금의 노하우가 오케스트라에 걸맞은 전문적 연주가를 육성할 수 있는 환경과 잘 맞물리면 좋겠다.

퇴임 후 제2의 인생을 학교에서 시작한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의 전문사(대학원 과정) 과정에 기악과가 있다. 2년 과정은 악기별로 나뉘고, 3년 과정은 독주·반주·오케스트라 전공으로 나뉜다. 올해부터 오케스트라 전공의 객원교수를 맡고 있다. 교향곡과 협주곡 각각의 파트를 훈련시키고, 합주로 다지는 수업이다. 맨해튼 음대에 이와 비슷한 수업이 있는데, 뉴욕 필과 메트오페라 오케스트라의 단원들이 직접 가르치기에 인기가 많다. 오케스트라야말로 전문음악가들이 가질 수 있는 유일한 직장 아닌가.

함께해온 한경진 악장에게 한마디 남긴다면.

악장 이전에 훌륭한 독주자다. 이제 한창 잘할 수 있는 나이다. 단원과 지휘자 사이에서 다리 역할을 잘하고, 단원에게는 신망을, 지휘자에게선 믿음을 얻는 악장이 되기를 바란다.

퇴임 연주회가 끝난 다음 날 아침, 머릿속에는 어떤 생각이 들 것 같은가?

수원시향과 거리 두기다. 한예종 음악원의 내 연구실과 김대진의 연구실이 마주 보고 있다. 자주 찾아가야지. 객관적인 거리를 두고 더 진한 관심과 쓴소리를 하련다. 지방 교향악단마다 적합한 인재를 찾지 못하거나, 높은 연봉을 감당하지 못해 악장이 공석인 경우가 많아 객원 악장 제의가 들어오기도 한다. 올해 재창단한 현악앙상블 코리안 솔로이스츠의 활동도 적극적으로 할 예정이고.

여섯 살에 바이올린을 시작해 맨해튼 음대에서 수학한 김동현. 그는 김남윤 교수가 귀국하여 처음으로 교편을 잡았던 시절의 첫 제자 축에 속한다. 며칠 전 예술의전당에서 스승과 함께한 코리안 솔로이스츠 공연에서 김남윤은 스치듯 말했단다. “동현아. 네가 수원시향에 들어간다고 했을 때 말렸는데, 그때 네 선택이 옳았어.” 그간 후회 없이 씨 뿌리고 거둬온 김동현 악장. 이 악장(Concertmaster)이 써온 삶을 소나타에 비유한다면 그는 이제 1악장(樂章)을 끝냈다. 이제 남은 2악장과 3악장을 기대해본다.

사진 박진호(studio Bo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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