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휘자 마리스 얀손스와 바이에른 방송교향악단

영혼의 울림을 선사하다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6년 12월 1일 12:00 오전

2년을 기다렸다! 독일 오케스트라의 품격

“우리가 지난 15년 동안 성공적인 나날을 보냈고, 앞으로 2021년까지 인연을 이어간다는 것은 대단한 기쁨입니다. 저와 오케스트라는 하나의 선물과도 같습니다. 앞으로 더 큰 발전이 있기를 기원합니다. 이 선물을 이용하고 계발하고 뮌헨과 바이에른 지방, 나아가 전 세계 청중에게 보여주는 것, 이것은 영적인 영역의 문제입니다.”

2015년 5월 마리스 얀손스는 뮌헨의 바이에른 방송국 사장 울리히 빌헬름과 미팅을 가졌다. 그 자리에서 2003년부터 이어온 바이에른 방송교향악단(Bavarian Radio Symphony Orchestra, 이하 BRSO)의 상임지휘자 직을 2021년까지 연장하기로 합의했다. 이는 얀손스에게도, BRSO에게도 최상의 선택이었다.

제2차 대전 이전에 태어난 거장들이 하나둘 타계하고 있는 현재, 얀손스만큼 한 오케스트라의 포디움에 오래 머물고 있는 지휘자는 드물다. 더구나 10여 년 전부터 줄곧 세계 오케스트라 순위 5위 안에 자리매김한 BRSO는 얀손스 체제 이후 그 명성을 더욱 공고히 하고 있다.

뮌헨에는 세계적인 오케스트라가 무려 3개나 존재한다. BRSO, 뮌헨 필하모닉, 바이에른 국립 오케스트라가 그것이다. 그 가운데 가장 늦게 태동한 BRSO는 전쟁 후인 1949년 나치의 ‘뮌헨 제국 방송교향악단’이 해체된 후 재탄생했다. 이는 악단의 전권을 장악한 오이겐 요훔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방송국의 막대한 지원을 바탕으로, 재정적 부분이 타 오케스트라에 비해 자유로웠던 BRSO는 스타 연주자를 공격적으로 영입해 단숨에 일취월장한 실력을 뽐내게 되었다.

그러나 BRSO의 진정한 전성기는 체코 출신의 위대한 거장 라파엘 쿠벨리크 시대라 할 수 있다. 1961년 취임연주회에서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으로 뮌헨을 접수한 쿠벨리크는 요훔의 정통 남독일 사운드에 동구권의 어둑어둑하고 진득한 오라를 덧입혔다. 그 결과 BRSO는 밝고 세련된 서유럽 스타일에 더해, 당시 동독을 대표하는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와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의 질감 있는 현의 소리를 따라잡을 만큼 그 수준이 한 단계 격상되었다. 르네상스 시대의 음악과 현대음악에 이르는 레퍼토리 확장은 필연적이었다.

음향에 다소 문제가 있는 가스타익 필하모니홀이 오픈하기 전 뮌헨을 대표하는 콘서트 전용홀은 헤라클레스홀이었다. 푸른색 천정과 벽면, 유려한 기둥이 줄지어선 내부 장식뿐 아니라 어쿠스틱 또한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하는 헤라클레스홀에 1953년부터 입주하게 된 BRSO는 이곳에서 숱한 명연을 남겼다.

1982년 5월 14일 쿠벨리크가 지휘한 베토벤 교향곡 9번 실황 음반을 들어보라. 장엄하게 빛나는 관악기군은 명불허전이고, 현악기의 섬세함과 두터움이 공존하는 매력적인 사운드는 감탄을 자아낸다. 2악장 스케르초에서 두드러지는 팀파니의 명료함은 가히 천의무봉(天衣無縫)의 경지에 도달해 있다. 필자는 이토록 낭랑한 팀파니의 타격을 그 어떤 오케스트라에서도 들어보지 못했다.

쿠벨리크의 후계자로 낙점된 ‘모스크바 필하모닉의 전설’ 키릴 콘드라신이 1981년에 급서하자 2년 뒤 BRSO는 영국 출신 콜린 데이비스 경을 영입했다. 다소 유연하지 못한 독일 악단에게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음악을 요구하던 데이비스와 BRSO의 행복한 9년이 지나고, 뮌헨에 나타난 로린 마젤은 역시나 ‘미국식 밝음’을 추구했다. 이 결과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감정의 고양은 퇴색했고 반짝거리는 테크닉이 우위에 서게 되었다. 마젤은 일 년이란 휴식기를 통해 생각의 스펙트럼을 넓히고자 했지만, 태생적 한계로 BRSO의 지향점과 합일할 수 없었던 마젤은 결국 2003년 미국 투어를 끝으로 작별을 고한다. BRSO 사임 후 작곡에 전념하겠다던 그는 이후 뉴욕 필로 향하며 스스로 약속을 저버렸다. 그리고 마침내 1997년 마젤의 안식년에 BRSO를 지휘하며 호평받았던 얀손스가 제5대 음악감독 자리에 오른다.

새로운 거장의 탄생

마리스 얀손스! 라트비아 출신의 이 영광스러운 이름은 현재 세계 지휘계의 가장 선두에 자리하고 있다. 얀손스는 1943년 1월 14일 나치 치하의 수도 리가에서 태어났다. 예프게니 므라빈스키와 함께 레닌그라드 필하모닉을 지휘하던 아버지 아르비드 얀손스와 뛰어난 메조소프라노였던 이라이다 얀손스의 피를 고스란히 이어받은 그는 어린 시절 부모님이 일하는 극장에서 자랐다.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할아버지와 숙부, 외할아버지와 외삼촌이 나치에 살해당하는 비극을 겪고 이모가 시베리아로 추방당하는 끔찍한 일을 목도한 어린 얀손스는 또래 아이들보다 훨씬 조숙했고, 일찍이 세상을 깨달았다. 이러한 가족사는 향후 얀손스의 음악세계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고, ‘휴머니즘’을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여기는 데 일조했다.

옛 소련에 편입된 조국의 현실은 얀손스로 하여금 1956년 상트페테르부르크 유학길에 오르게 했다. 일리아 무신과 함께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 지휘학파의 양대 산맥을 이루던 니콜라이 라비노비치의 제자가 된 얀손스는 그로부터 지휘의 모든 것을 배웠다.

이후 베를린 필의 옛 소련 투어 중 선발된 12명의 젊은 지휘자 가운데 한 명이었던 얀손스는 카라얀에게 초청받아 오스트리아로 향했다. 빈 음악원에서 한스 스바로프스키를 사사한 얀손스는 러시아와 동구 스타일의 지휘법에 서유럽의 아카데믹함을 더한 지휘자로서 가장 이상적인 발판을 마련한다.

1971년 카라얀 지휘 콩쿠르에서 2등을 차지한 얀손스는 아버지에 이어 옛 소련이 자랑하는 일급 지휘자로서 세계무대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1973년에는 므라빈스키의 부름으로 꿈에 그리던 상트페테르부르크 필하모니홀에서 레닌그라드 필하모닉을 지휘하며 2대에 걸친 전설을 일궈냈다. 1979년부터 이끈 오슬로 필하모닉은 차이콥스키 교향곡 전곡을 음반으로 녹음함으로써 혁혁한 성과를 이뤘다. 40대 초반 얀손스의 열정과 그간의 삶이 그대로 반추된다.

이후 런던 심포니와 런던 필하모닉까지 지휘하며 승승장구하던 얀손스는 1996년 4월 오슬로 오페라에서 푸치니 ‘라 보엠’ 지휘 도중 갑작스레 찾아온 심장마비로 쓰러졌다. 마치 1984년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쓰러진 후에도 마에스트로의 오른손은 계속 허공을 휘젓고 있었다. 그러나 6개월 뒤 기적처럼 깨어나 카디프에서 재기를 알리는 콘서트를 가졌다. 이듬해 마젤의 후임으로 피츠버그 심포니를 맡게 된 얀손스는 가슴에 심장 박동기를 단 채 제2의 인생을 시작했다. 이후 피츠버그 심포니를 미국 일류 악단으로 도약시킨 것은 물론이다.

2003년 다시 마젤의 뒤를 이어 BRSO를 물려받은 얀손스는 2005년 세계 오케스트라 순위 1위 자리를 고수하던 로열 콘세르트헤바우 오케스트라(RCO)의 수장 자리까지 꿰차면서 최고 전성기를 맞이했다. 얀손스와 RCO의 밀월은 숱한 명연을 낳았다. ‘RCO 라이브’로 발매된 말러 교향곡 전곡 사이클과 브루크너 교향곡은 조탁된 사운드의 정밀함과 음악 전체를 바라보는 관조가 어우러져 지금까지도 명반으로 높이 평가된다.

하지만 건강에 다시금 문제가 생겼다. 얀손스는 결국 RCO와 BRSO, 두 악단 가운데 BRSO를 선택했다. 2015년 이후 RCO는 얀손스와 아쉬운 이별을 하고, 다니엘레 가티를 7대 음악감독으로 임명했다.

얀손스의 음악적 지향점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저도 므라빈스키와 친한 사이였습니다. 훌륭한 지휘자이자 위대한 인물이었죠. 그의 리허설은 실연과 같이 완벽했습니다. 그는 항상 리허설을 재미있고 알차게 진행하려 했어요. 므라빈스키는 어떤 무대든 오랜 시간에 걸쳐 꼼꼼하게 준비했습니다. 레퍼토리를 깊이 연구하고, 악보를 이해하는 데 많은 시간을 투자했습니다. 사색적이었고 사려 깊은 사람이었으며, 그 영혼의 깊이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깊었죠. 드물게 포디움에 올랐지만, 므라빈스키가 지휘하는 음악회는 항상 대사건이었습니다.”

벌써 13년 전이다. 2003년 1월 3일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자택에서 가진 인터뷰에서 얀손스가 므라빈스키에 대해 들려준 소감은 아직도 생생하다. 옛 소련 당시 러시아 대부분의 오케스트라가 거칠고 선 굵은 음악을 선호할 때 므라빈스키의 레닌그라드 필하모닉은 극도로 정제된 세련미의 극치를 달리고 있었다. 물론 특유의 대륙적 기질은 기본이었다.

여기에는 19세기에 가스파레 스폰티니가 시도한 ‘중부유럽식 오케스트라 편성’이 한몫을 했다. 제1, 제2바이올린이 무대 좌우로 갈리고 첼로와 더블베이스가 중앙에서 왼쪽 뒤로 향하게 하는 배치는 악기 간 밸런스의 극치를 보인다. 금관악기와 팀파니가 오른쪽에, 더블베이스가 왼쪽에 있으므로 대단히 균형적인 사운드가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옛 소련 시절 레닌그라드 필하모닉에 도입했던 ‘레닌그라드 편성’을 완성한 ‘므라빈스키 사운드’를 어릴 때부터 보아온 얀손스는 이를 BRSO에도 일부 적용하고 있다. 그래서 얀손스의 BRSO가 뿜어내는 현악기의 저음은 가히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금관군의 완벽함은 더 이상 말할 것도 없다.

혹자는 얀손스의 음악이 매우 서유럽 지향적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므라빈스키를 떠올리면 답은 자명하게 드러난다. 19세기 유럽 오케스트라 사운드에 가장 근접한 레닌그라드 필하모닉을 매일같이 보았던 얀손스의 근본은 BRSO가 추구하는 음악세계와 가장 많이 닮았다. 1989년 10월 25일 도쿄문화회관에서 얀손스가 레닌그라드 필하모닉을 지휘한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거’ 전주곡은 2007년 BR 클래식 레이블로 발매된 BRSO의 브람스 교향곡 1번과 너무나 닮았다. 정밀한 세공의 끝을 보는 듯 각 악기군의 절묘한 프레이징과 타오르는 정열이 끝없이 뿜어져 나오는 투티(합주)에선 탄성이 절로 나온다.

12월 4일과 5일, 세 번째 내한 무대에 오르는 얀손스와 BRSO가 선사할 음악의 향연은 올해 한국을 찾은 해외 오케스트라 가운데 정점을 찍을 것으로 기대한다. 마지막으로 2006년 빈 신년음악회에서 얀손스가 전한 신년인사를 되뇌어본다.

“신사숙녀 여러분! 음악은 삶에서 가장 아름다운 보석입니다. 음악은 영혼과 마음의 언어이며, 또한 우리의 영적인 자양분이죠. 저는 앞으로 음악이 사람들의 문화적 발전에 위대한 역할을 하게 되길 소망합니다!”

사진 빈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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