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휘자 박준성

어둠 끝에 음악이 있었네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7년 2월 1일 12:00 오전

이겨낼 수 없을 것만 같던 좌절의 시간, 불안과 시련도 박준성의 꿈을 꺾지 못했다. 그는 결국 음악이었다

2016년 6월, 박준성은 제12회 하차투리안 콩쿠르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작곡가 아람 하차투리안 탄생 100주년을 맞아 2003년부터 시작된 콩쿠르는 매년 여름, 바이올린·첼로·작곡 부문을 번갈아 심사해왔다. 12회에 처음 지휘 부문을 개최했고, 박준성은 콩쿠르 우승자이자 초대 우승자라는 영예를 안았다.

동시에 단원들의 투표로 진행되는 ‘오케스트라상’과 ‘하차투리안 해석상’, 협연 기회가 주어지는 ‘카우나스 시티 심포니 오케스트라 초청연주상’ 등 3개의 특별상도 수상했다. 긴장과 경쟁이 공존하는 무대에서 낯선 단원들과 충실하게 교감했다는 사실을 모두에게 인정받은 듯해, 그에게는 더없이 값진 순간이었다.

“콩쿠르 내내 오케스트라와 호흡이 잘 맞는다고 생각했어요. 단원들은 제 해석을 존중해줬고, 호의적으로 피드백을 주고받았죠. 콩쿠르라는 것도 잊고 함께 즐겼던 것 같아요. 시상을 마치고 호텔에 돌아가 짐 정리를 하려는데, 단원들이 보내주질 않더라고요. 무조건 맥주 한 잔 해야 한다면서.(웃음) 그래서 결국 새벽 비행기를 타기 전까지 즐거운 시간을 보냈어요.”

콩쿠르를 마치고 마음껏 마시며 웃을 수 있기까지, 사실 박준성의 나날은 험난한 경쟁의 연속이었다. 처음부터 지휘자를 꿈꾼 것도 아니었다. 4세에 피아노를 시작한 그는 선화예중 재학 도중 독일로 유학해 슈투트가르트 음대에 진학했다. 이러한 그의 성장 과정에는 아버지인 현 대구오페라하우스 예술감독 박명기의 영향이 컸다.

“아버지는 제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지휘자가 되길 바라셨대요. 피아노도 지휘 공부에 도움 되라고 시키셨고요. 자의가 아니었지만 차츰 음악에 매료됐고, 진지하게 임해보려던 때 예술의전당에서 정명훈 선생님의 무대를 보게 됐어요. 차이콥스키 교향곡 4번을 지휘하셨는데, 그날 이후 지휘를 해야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무작정 빈 국립음대 지휘과에 원서를 넣었죠. 다행히 시험을 치를 수 있었고, 합격 후 본격적으로 지휘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달콤한 꿈에 젖어 있던 스무 살의 박준성은 이후 약 10년간 (과장을 조금 더해) 콩쿠르에서 100번 정도 낙방했다. 심사위원의 눈치를 보고, 결과를 신경 쓰느라 정작 본인의 진가를 드러낼 기회를 번번이 놓쳤다. 결국 한 심사위원에게선 ‘넌 스스로를 전혀 믿고 있지 않은 것 같다’는 평을 들어야 했다. 혼란과 좌절의 반복 속에서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군 입대 통지서가 날아왔다. 군악대에 들어가 음악과의 연을 어떻게든 이어나가려 했지만, 그마저 쉽지 않았다.

“일반 병사로 입대했습니다. 음악은 물론, 음악과 관련된 그 어떤 것도 할 수 없었어요. 그보다 절망적인 때가 없었던 것 같아요. ‘제대하면 음악을 계속할 수 있을까, 이 길이 정말 내 길이 맞는 걸까’라는 질문을 수도 없이 되뇌었는데, 답을 내리지 못했어요. 꿈에 대한 확신이 사라졌고, 무기력한 생활을 이어나갔죠.”

박준성이 불안에 떨며 차츰 음악에서 멀어지고 있을 때, 기다렸다는 듯 음악 쪽으로 등 떠밀어주는 무언가가 나타났다. 잠시 신이 머물다 간 순간이었을까. 그는 제대를 얼마 남겨두지 않고 말러 콩쿠르의 공고를 접했다. 올해 빈 필하모닉의 신년음악회 지휘를 맡았던 구스타보 두다멜과 경기필의 상임지휘자 성시연을 배출한 콩쿠르였다. 경연 시작은 제대일로부터 6개월 후. 일정도 적당했다. 지원이라도 해보자는 심정으로 지원서를 제출했다. 총 600명의 지원자 중 12명만이 콩쿠르가 열리는 밤베르크로 향할 수 있었다.

“제 이름이 참가자 명단에 올라가 있는 것을 보고는 너무 감격스러웠어요. 누군가 끝없는 제 불안에 답을 내려준 것 같았죠.”

박준성에게는 이미 심사위원도, 결과도 중요치 않았다. 경연을 떠나, 다시는 없을지도 모를 밤베르크 심포니와의 협연을 위해 오로지 음악만을 생각했고, 처음으로 무대를 온전히 즐겼다. 1라운드를 마치고 나온 그에게 제2바이올리니스트는 ‘오늘 정말 훌륭했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비록 결선에 오르진 못했지만, 말러 콩쿠르는 참가 그 자체만으로도 박준성에게 자신의 길을 확고히 다지는 계기가 되었다.

“2년간의 군 생활을 모두 보상받은 것 같았어요. 절대 지휘를 포기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었죠. 지금부터 다시 시작이라는 생각으로 더 열심히 마스터클래스에 참가하고, 공부에 임했어요. 무대에서 온전히 음악에만 집중한 뒤론, 콩쿠르 결과도 달라지더라고요.”

이후 부쿠레슈티 콩쿠르 3위, 하차투리안 콩쿠르에서 우승하며 가파른 성장세를 보인 그는 지난해 여름 이탈리아에서 열린 지휘자 다니엘레 가티의 마스터클래스에 참가했다. 2차에 걸친 오디션을 통과해야 레슨 기회가 주어지는 마스터클래스에서 단 한 명에게만 주어지는 최우수 참가자 장학금의 주인공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지휘에 대한 잘못된 생각을 완전히 바로잡을 수 있는 시간이었어요. 가티는 ‘지휘자는 개인의 해석이나 감정, 시중에 널린 음반을 따라가선 안 되고 오직 악보를 통해 작곡가가 뭘 전하고자 하는지를 찾아야 한다’고 강조했어요. 지휘자는 결국 아무것도 아니어야 하며, 오로지 작곡가와 청중만을 생각해야 한다는 거죠. 많은 시간을 투자해 악보를 분석해야함은 필수고요. 그분의 자택을 방문한 적 있는데, 서재에 악보는 물론이고 작품과 관련된 온갖 자료가 쌓여 있더라고요. 10년 동안 공부 중인 악보도 있었는데, 지휘자라는 자리가 얼마나 진중한 것인지 절감했습니다. 어서 베를린으로 돌아가 공부하고 싶어요. 갈 길이 먼데, 그만큼 그 길을 오래 걸어갈 수 있다는 생각에 한편으론 설렙니다.”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해 악보를 마주하고, 작곡가와 교감하고, 청중과 소통하는 희열을 오래도록 느끼고 싶다는 박준성. 흥미로운 대상을 만난 어린 소년처럼 상기된 표정으로 이야기를 이어나가는 그를 보며 니체의 말을 떠올렸다. ‘성숙이란 어릴 때 놀이에 열중하던 진지함을 다시 발견하는 것이다.’ 처음 지휘자가 되리라 마음먹었던 때, 절망에서 비로소 희망을 찾았던 때, 꿈꾸며 웃을 수 있는 지금의 순수한 마음 그대로, 앞으로 나아가는 모든 발걸음을 진중하게 내디디는 그가 되길 바라본다.

사진 박진호(Studio Bo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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