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미유 생상스

‘전통’과 ‘프랑스’라는 두 기둥 위에 우뚝 섰던 거장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7년 2월 1일 12:00 오전

1835 프랑스 파리 출생
1848 파리고등음악원 입학
1861 니더마이어 음악학교 교수 역임
1871 국민음악협회 결성
1874 교향시 ‘죽음의 무도’ 작곡
1877 오페라 ‘삼손과 데릴라’ 작곡
1886 ‘동물의 사육제’ 작곡
1921 사망

방학이 되면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한 음악회가 여기저기서 열리곤 한다. 이런 음악회에 단골 레퍼토리로 카미유 생상스(1835~1921)의 ‘동물의 사육제’만 한 것이 없다. 동물을 재미있게 묘사한 이 모음곡은 음악에 대한 흥미를 일으키기에 충분하다. 그런데 생상스는 탄탄한 형식미를 갖춘 진지한 음악을 작곡하던 19세기 프랑스 음악 최고의 거장 중 한 사람으로, 그에게 ‘동물의 사육제’는 매우 뜻밖의 작품이었다.

타고난 음악가의 행보

생상스는 친척으로부터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으며, 불과 6세에 작곡을 시작했다. 그의 재능을 알아본 가족들은 7세 때 정식으로 피아노를 배우게 했다. 9세까지 여러 피아노곡과 노래를 작곡했지만 이후 작곡을 중단하고 연주에 집중하여, 그 결과 1846년 11세가 되기 전에 공식적인 데뷔 무대를 가지게 되었다.

2년 후 파리고등음악원에 입학하여 피아노와 오르간을 공부했으며, 1851년부터는 오늘날 발레곡 작곡가로 잘 알려진 프로망탈 알레비에게 작곡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생상스는 파리고등음악원에 입학한 후부터 이미 합창과 오르간을 중심으로 여러 작품을 작곡했다. 여기에는 생상스가 오르간 연주에도 특출한 재능을 보였던 것과 관계가 있는데, 1853년 음악원을 졸업하자마자 생마리 교회의 오르가니스트로 임명될 만큼 그 실력이 뛰어났다. 그로부터 4년 후에는 파리의 중요한 교회 중 하나인 마들렌 교회의 오르가니스트로 활동했다. 리스트는 이곳에서 생상스의 오르간 즉흥연주를 듣고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오르가니스트’라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생상스는 음악에 대한 교회의 간섭이 심해지자 20년 후인 1877년에 교회를 나와 작곡과 연주에 몰두했다.

음악원 시절에 작곡한 작품 중에서 눈에 띄는 곡은 교향곡 A장조(1850)다. 생상스는 바로크와 고전에 상당한 관심을 갖고 공부해왔는데, 베토벤의 영향이 강하게 느껴지는 이 곡에서 이미 고전에 경도된 모습을 보여준다. 이뿐 아니라 그가 작곡가로서 출사표를 던지며 당당하게 번호를 붙인 교향곡 1번(1853)이 있다. 금관의 팡파르와 많은 타악기가 사용되어 영웅적인 인상을 주는 것은 1년 전 나폴레옹 3세가 집권한 것과 관계가 있어 보인다.

이후 대규모 수작들이 줄줄이 이어졌다. 두 번째 교향곡 ‘로마’(1856)가 완성되었으며, ‘크리스마스 오라토리오’(1858)는 그동안 갈고닦은 합창 작곡 기술의 결정체였다. 오늘날엔 생상스의 관현악곡들이 주로 연주되지만, 사실 그의 작품 목록은 대부분 성악과 합창이 차지하고 있다. 1858년에는 피아노 협주곡 1번과 바이올린 협주곡 2번도 완성하며 협주곡에도 손을 뻗기 시작했다. 이듬해에도 교향곡 2번과 바이올린 협주곡 1번으로 거침없는 행보를 이어갔다. 특히 교향곡 2번은 정련된 관현악과 높은 응집력, 뛰어난 푸가 등으로 인정받았다.

1861년에는 고전과 종교음악 작곡가 양성을 목적으로 설립된 니더마이어 음악학교에서 피아노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비록 4년 후인 1865년에 그만두기는 했지만, 짧은 기간 동안 포레와 메사제를 제자로 두고 가르쳤다. 특히 포레는 가족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평생 가까운 친구로 지냈다.

교수 시절 작곡한 곡 중에는 생상스의 대표적인 바이올린 소품 ‘서주와 론도 카프리치오소’(1863)가 있다. 당대 유럽을 호령하던 스페인의 바이올리니스트 사라사테를 위해 작곡되어 난이도가 높다. 빠르기와 조성이 끊임없이 바뀌며 아르페지오와 반음계적 진행, 도약 등으로 곡을 마칠 때까지 요동하며 긴장을 늦추지 않는다.

19세기 작곡가들은 오페라로 성공하기를 열망했다. 생상스도 예외는 아니었다. 30세였던 1865년에 4막 규모의 ‘은종’으로 오페라 장르에 당찬 도전장을 내밀었다. 하지만 이 곡을 위촉한 테아트르 리리크가 자금 상의 문제로 초연을 미루었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프랑스-프러시아 전쟁(보불전쟁)이 발발하여 초연을 기약할 수 없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이 기간 동안 생상스는 음악극 규모의 이 곡을 대규모 오페라로 개작해두었다. 1877년에 오른 초연은 초판본으로 이루어졌으며, 대규모 오페라 버전은 1913년에야 무대에 올랐다.

1868년과 1869년에는 10년 동안 손을 놓고 있던 피아노 협주곡 작곡에 매진하며 피아노 협주곡 2번과 3번을 연달아 내놓았다. 특히 오늘날에도 자주 연주되는 2번은 작곡가 지그문트 스토요프스키로부터 “바흐로 시작하여 오펜바흐로 끝난다.”는 평을 들을 정도로 바로크부터 현대음악까지 섭렵한 그의 역량이 집결되어 있는 걸작이다. 이후 플루티스트들의 꾸준한 사랑을 받고 있는 ‘로망스’ Op.37(1871)과 첼로 연주자들의 필수 레퍼토리로 자리 잡은 첼로 협주곡 1번(1872) 등 콘서트 레퍼토리들이 연이어 탄생했다.

환경에 굴하지 않는 거침없는 음악 여정

1870년, 프랑스에는 제3공화정이 들어서면서 피의 바람이 불었다. 마들렌 교회의 상관도 폭도들에 의해 살해당하는 일이 벌어졌다. 나폴레옹 3세를 위한 교향곡을 쓰고, 보불전쟁 때 호위병으로 복무했던 생상스는 생명에 위기를 느껴 즉시 영국으로 도피했다. 그런데 오히려 영국에서 리사이틀을 열면서 자신을 알릴 기회가 되었다. 이후 영국과의 관계가 호의적으로 유지되어 교향곡 3번 ‘오르간’(1886)과 오페라 ‘헨리 8세’(1883), 그리고 여러 합창곡을 위촉받았다.

이듬해 귀국하자마자 생상스는 독일 음악으로부터 프랑스 음악을 보호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국립음악협회를 발족했다. 생상스는 부회장을 맡았으며 포레·프랑크·마스네 등과 같은 음악가들이 참여했다. 이 협회는 젊은 작곡가들이 프랑스적인 음악을 쓰도록 지원했다. 하지만 점차 바그너의 영향을 받은 젊은 작곡가가 많아지자, 생상스는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1886년에 협회를 탈퇴했다. 이렇게 생상스는 ‘고전’과 ‘프랑스’라는 패러다임에 사로잡혀 있었다.

교향시 ‘옴팔레의 물레’(1872)는 이즈음에 탄생했다. 음악사에서 생상스가 중요한 점은 바로 프랑스 출신 작곡가로서 최초로 교향시를 작곡했다는 사실이다. 교향시를 썼다는 것만으로도 그렇지만 옴팔레·헤라클라스·파에톤 등 그리스 로마신화를 소재로 사용하고 있다는 데에서 영웅적이고 장렬한 리스트의 교향시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음을 엿볼 수 있다. 옴팔레는 리디아의 여왕으로, 노예 신분이 된 헤라클레스를 사서 여장을 시키고 곁에 두었다. 헤라클레스는 3년 동안 리디아를 지켜주었다. 일반적으로 옴팔레는 사자 가죽을 입고 헤라클레스의 몽둥이를 들고 있는 남성다운 모습을 하고 있으며, 헤라클레스는 그 옆에서 여장을 하고 물레에서 실타래를 뽑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생상스의 이 교향시는 이렇게 서로 교차된 남녀의 모습을 그린다.

안타깝게도 그의 교향시들은 오늘날 거의 연주되지 않는다. 극적 구성에 치중한 나머지 음향적 효과가 평이한 리스트의 과오까지 답습한 까닭이다. 그래서 장 라호르의 시를 바탕으로 작곡한 두 번째 교향시 ‘죽음의 무도’(1874)만이 교향시 작곡가로서의 생상스를 잊지 않도록 해주고 있다. 이 곡은 교향시라 하기엔 극적 내용이 단순하지만 독주 바이올린의 메시지가 분명한 선율, 관현악의 특징적인 음향과 리듬으로 강한 인상을 남긴다.

생상스는 ‘은종’(1865)부터 ‘데이아네이라’(1910)까지 무려 13편의 오페라를 썼다. 오페라 작곡가로 크게 성공했던 마스네를 라이벌이라고 생각했을 정도로 오페라에 대한 열망이 남달랐고, 나름 성공을 거두기도 했지만 스스로의 기대에 미치지는 못했다. 지나치게 진지한 탓이었다.

같은 수인 13편의 오페라를 썼지만 오늘날 ‘루살카’ 한 곡만이 상연되는 드보르자크처럼, 생상스의 경우도 단 한 곡, 세 번째 오페라인 ‘삼손과 데릴라’(1877)만이 오늘날까지 무대에 오르고 있다. 당시 파리에서는 성경의 내용을 무대에 올리는 것을 기피했기 때문에 바로 초연될 수 없었다. 다른 곳도 마찬가지여서 런던·뉴욕·브뤼셀에서 콘서트 형식으로 연주되는 것에 만족해야 했다. 그러던 중 리스트의 권유로 이러한 경향이 비교적 덜한 바이마르에서 1877년에 초연을 올릴 수 있었고, 프랑스에선 1892년이 되어서야 파리 오페라극장에서 상연되어 생전에 파리 초연을 볼 수 있었다.

비극 너머에서 만난 걸작


▲ 브베에 위치한 한 호텔 라운지에 음악가들과 함께 있는 생상스(맨 오른쪽)


생상스는 40세였던 1875년에 19세의 마리 트뤼포와 결혼하여 두 아들을 얻었다. 그런데 마치 운명의 장난인 듯 1878년에 첫째는 4층 창문에서 떨어져, 그리고 불과 6주 후에 둘째는 폐렴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생상스는 첫째에 대한 부인의 부주의를 질책했고, 부부의 관계는 심각하게 소원해졌다. 그러던 1881년 함께 떠난 오베르뉴에서 생상스가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는 편지를 남기고 사라지면서 별거에 들어갔다. 하지만 이혼은 하지 않았다.

생상스는 사라사테를 위해 또다시 펜을 들었다. 그렇게 1880년에 그의 가장 대표적인 협주곡인 바이올린 협주곡 3번이 작곡되었다. 풍부한 악상과 인상적인 표현, 완벽한 구성 등 음악적인 완성도를 높이는 데 집중하여 기교와 서정적 표현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1886년에는 런던 필하모닉 소사이어티의 위촉으로 교향곡 3번 ‘오르간’이 탄생했다. 교향곡 2번 이후 27년 만에 내놓은 다섯 번째 교향곡은 생상스 최고의 걸작 중 하나로, 피아노 협주곡 4번(1875)과 바이올린 소나타 1번(1885)처럼 네 악장이 둘씩 묶인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생상스가 최고의 오르가니스트였던 만큼 오르간의 풍부한 음향과 화려한 음색을 구사하며, 대편성의 관현악단과 어우러져 거대한 하모니를 만들어낸다. 코랄풍 오르간 연주는 언뜻 합창을 대체한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오늘날 생상스의 이름을 자주 듣게 하는 데에는 실내악곡 ‘동물의 사육제’(1886)만큼 기여한 곡도 없다. 잠깐 교수생활을 할 때 제자들과 함께 연주하기 위한 작품으로 구상했지만, 20여 년이 지난 후에야 현실화된 것이다. 유래를 알 수 없는 특이한 편성에 동물을 그림 그리듯 묘사했다는 점에서 진지한 고전주의자답지 않은 작품이 아닐 수 없다. 사실상 음악적 장난에 가까운데, 그래서 생상스는 이 작품을 카니발에서 사적으로 연주했을 뿐, 독자성이 가장 강한 ‘백조’ 이외에는 사후에 출판해야 한다고 못 박았다. 실제로 ‘동물의 사육제’는 생상스가 세상을 떠난 후 2개월이 지나서야 공개 연주됐고, 4개월 만에 출판되면서 생상스를 대표하는 작품으로서 어린이 음악회의 단골 프로그램이 되었다.

정체성을 지키려는 노력, 그리고 이별

생상스는 1870년대부터 겨울이면 추위를 피해 알제리의 수도 알제나 이집트의 여러 곳에서 지내곤 했다. 그는 작곡가답게 이곳에서의 인상을 피아노와 관현악을 위한 환상곡 ‘아프리카’(1891)와 피아노 협주곡 5번 ‘이집트’(1896)에 그렸다. ‘이집트’는 이집트 룩소르에서 나일 강 뱃사공의 노래를 듣고 썼다고 알려져 있다. 휴가 중에 작곡해서인지 두 작품은 전원적인 평온함과 즐거움으로 가득하다. 첼로 협주곡 2번(1902)도 특기할 만한데 이 곡은 교향곡 3번 ‘오르간’처럼 두 악장이 네 부분으로 나뉘는 구조로, 1번에 비해 매우 어려워서 생상스 자신도 자주 연주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이후에도 그는 많은 작품을 썼지만 기억에 남을 만한 곡들을 내놓지 못했다. 그러나 1921년에 작곡한 오보에 소나타, 클라리넷 소나타, 바순 소나타 등 3곡의 목관 소나타는 특기할 만하다. 특히 바순 소나타는 오늘날 바수니스트들의 필수 레퍼토리로 자리 잡았다.

생상스는 1913년 피아니스트로서 은퇴연주회를 가졌다. 하지만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다시 연주 활동을 재개했으며, 1921년 11월까지 연주회를 가졌다. 86세의 나이라고 볼 수 없을 정도로 활력 있고 정확한 연주였다고 전해진다. 그러고 나서 한 달 후, 여느 때처럼 겨울을 지내기 위해 알제로 떠났으나, 예상치 못한 심장발작으로 그곳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다.

생상스는 리스트와 바그너가 빛처럼 내리쬐던 시기에 살았고, 그들의 새로운 음악에 큰 관심을 가졌다. 특히 교향시는 리스트로부터의 강한 영향을 받은 결과물이었다. 그럼에도 바그너를 위시한 독일음악을 거부하고 고전을 지키며, 프랑스 음악의 정체성을 강화하고자 노력했다. 이러한 경향으로 말년에는 드뷔시와 쇤베르크, 스트라빈스키 등 새로운 음악을 혐오했고, 심지어 제자인 포레의 후기 작품까지 이해하지 못할 지경이 되었다.

오늘날에는 생상스의 프랑스 음악이라는 정체성보다는 고전주의자로서 측면이 많이 부각되는 편이다. 그것은 교향곡과 협주곡이 자주 연주되는 데 반해, 그의 작품 목록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오페라, 실내악, 피아노, 성악 등을 위한 작품들이 외면받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 생상스의 감춰진 보석들을 찾아볼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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