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우스트·멜니코프·케라스 트리오

음악적 감흥이 빚어낸 형제애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7년 2월 1일 12:00 오전

3월, 세 연주자의 슈만 피아노 트리오 전곡을 한국에서 처음 마주할 수 있는 시간이 온다

이자벨 파우스트(바이올린)·알렉산더 멜니코프(피아노)·장 기엔 케라스(첼로)의 독주와 실내악 실력은 그간 아르모니아 문디에서 내놓은 앨범의 질만으로도 증명하기에 충분하다. 하지만 2014년 4월 사우스뱅크센터 퀸엘리자베스홀 공연에서 파우스트·멜니코프·케라스는 다듬어지지 않은 연설문을 읽듯, 예술적 방향은 제시했지만 세부는 거칠게 마감했다. 가뜩이나 쇼맨십이 없는 사람들인지라 이날의 앙상블이 어떠했는지는 커튼콜 당시 표정에 그대로 드러났다. 그런 까닭인지 2015년 12월 22일 런던 위그모어홀 공연은 단단히 벼른 기색이었다. 트리오의 조합이 단순한 상호작용을 넘어 흡사 형제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텔레그래프’지 평론가 이반 휴잇은 중간휴식 시간에 위그모어홀 로비의 음반 판매대 앞에서 평가를 시작했고, 지면에선 ★★★★을 줬다. 파우스트·멜니코프·케라스 트리오는 전반부에 슈만 피아노 트리오 3번을 연주한 데 이어, 앙코르로 슈만 피아노 트리오 2번 3악장을 뽑아냈다. 이들의 열성을 보고 있자니, 저런 감정은 ‘가족애’나 ‘형제애’가 아닐까 싶었다.

어느덧 모두 마흔이 넘었고, 각 악기에서 독주자로서 부동의 입지를 다지기까지 이들이 걸어온 길이 순탄치만은 않았다. 독일 태생의 바이올리니스트 파우스트는 ‘이자벨(Isabelle)’이라는 이름 탓에 프랑스인으로 아는 이들이 적지 않았고, 피아니스트 멜니코프(Melnikov)는 한국에서 한참 동안 ‘멜르니코프’로 불려도 제때 교정되지 않을 만큼 관심 밖이었다. 리사이틀 대관이 잡혀도 판매가 저조해 내한이 취소되기도 했다. 2013년 로테르담 필 협연자로 한국에 온 첼리스트 장 기엔 케라스(Jean Guihen Queyras)를 몰라본 건 언론만은 아니었다. 턱없이 모자란 유료 관객수가 한국 관객이 그를 대하는 크기였다.

그래도 세 음악가가 익숙해하는 공연장은 LG아트센터다. 파우스트와 멜니코프는 2012년 듀오로, 케라스는 2010년엔 알렉상드르 타로의 반주자로, 2013년엔 독주회로 LG아트센터를 찾았다. 오는 3월 7일 같은 장소에서 파우스트·멜니코프·케라스 트리오 공연이 열린다. 곡목은 슈만 피아노 트리오 전곡(1·2·3번)이다. 명민한 솔리스트인 동시에 시대악기―역사주의 관점에 경력과 실적이 충분한 이들의 슈만이다.

균형잡힌 감성과 지성, 이자벨 파우스트

1972년생 이자벨 파우스트는 크리스토프 포펜의 제자다. 케루비니 현악 4중주단 리더였던 포펜은 여러 바이올린 후진들에게 “파우스트의 자연스러움을 참고하라”고 충고하는데, 핵심은 다른 소리를 듣는 비범한 청력이다. 어린 자녀들에게 각각 비올라와 바이올린을 가르친 파우스트의 부친은 가족 구성원으로 현악 4중주단을 만들자고 할 정도였기에, 파우스트에게 음악의 시작은 특별하지 않았다. 소녀는 바이올린이 어떤 위치를 선점해야 하는지, 어려서부터 전체를 봤다.

파우스트가 포펜의 가르침에서 힌트를 얻은 건 “멀리 보라”다. 1993년 파가니니 콩쿠르에 우승했어도, 스스로 예술가로서 미흡함을 느꼈다. 그래서 향한 곳이 파리였다. 떠날 때는 “독일에만 사는 게 지겨워 이사를 간다”고 했는데, 파리에 9년 동안 살면서(현재 베를린 거주) 인생의 동반자를 만나 아들을 낳았고, 아르모니아 문디와 계약했다. 젊은 여성 현악주자가 경연에 입상하면 주변에선 ‘30대 이전’ 또는 ‘결혼 전’에 어느 정도 경력을 쌓을 것을 권유하고, 입상자들도 그런 충고를 빠듯한 연주 일정으로 이어가곤 한다. 하지만 파우스트는 달랐다. 실제로 유럽에서 그녀의 음악 활동이 대중적으로 꽃피운 건 서른 살 이후인 2000년대 중반부터다. 파우스트의 긴 호흡을 참고하라는 포펜의 가르침은 그의 제자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파우스트가 고음악에서 현대음악까지 다양한 스타일과 레퍼토리를 망라할 수 있는 건 특유의 섬세한 서정성과 작품의 본질을 꿰뚫는 직관이 이상적인 밸런스로 맞춰지기 때문이다. 특정 사조와 작품에 대한 연구가 어떤 테크닉으로 분화해나가는지, 이에 대한 파우스트의 매력은 실연에서 절정을 뿜어낸다. 뛰어난 기교 안에 감정의 고조를 숨김없이 나타내는 파우스트의 모습은 실연의 즐거움을 일깨운다. 특히 슈만의 독주곡과 협주곡, 실내악곡에서 파우스트의 감성과 지성은 맹렬한 균형을 이룬다.

40대 중반에 들어선 파우스트의 체력은 20대 남성 현악 주자 못지않다. 아시아와 유럽 사이에서 시차를 회복하는 능력도 훌륭하다. 연중 100~120회 공연을 소화해도 신체적 문제로 예술적 이슈를 놓치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대학에서 교편을 잠시 잡았다가 포기한 것도 전문 연주자로 집중할 정신적 여유를 확보하기 위함이다. 어릴 때부터 역사주의를 고려한 건반 주자와의 교류를 중시해온 그녀와 올해 하반기 선보일 포르테피아노 주자 크리스티안 베자위던하우트와의 듀오 역시, 이전의 멜니코프 듀오 급의 예술적 성취가 기대된다. LG아트센터 공연을 전후로 이어지는 아시아 투어 프로그램엔 파우스트의 바흐 무반주 소나타와 파르티타도 들어 있다.

다시 만날 건반의 빛깔, 알렉산드르 멜니코프

1973년 모스크바에서 태어난 알렉산드르 멜니코프의 교육 배경은 그야말로 환상적이다.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레프 나우모프, 뮌헨에서 엘리소 비르살라제 문하에 있었다. 어려서부터 안드레아스 슈타이어와 교류했고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테르와 특별한 관계를 이뤄 음악인들의 부러움을 샀다. 자신을 대신해 슐레스비히 홀슈타인 페스티벌에서 멜니코프가 공연을 성공적으로 마치자, 리히테르는 자신이 주관하는 러시아 및 프랑스의 축제에 그를 대동했다.

거장이 챙기는 내용들은 사실상 후계자를 대하는 후원과 다름없었다. 1990년대 초·중반 리히테르가 멜니코프와 연결한 음악가들은 첼리스트 나탈리아 구트만, 비올리스트 유리 바슈메트 같은 ‘리히테르 패밀리’였다. 20대 중반까지 멜니코프는 ‘팀 리히테르’의 일원으로 음악적 비중을 늘려나갔다. 신선한 감성으로 음악을 배우고 느끼고 통찰하는 모범적 자세는 멜니코프 특유의 소리와 빛깔로 여물었다. 무엇보다 재능을 소진하지 않는 진지함이 여러 콩쿠르 입상 이후에도 이어져 롱런은 시간문제로 여겨졌다.

겸손함과 진지함으로 세계 각지의 공연을 소화하던 1997년, 큰 버팀목이던 리히테르가 세상을 떠났다. 알렉산드르 멜니코프가 한국에 처음 모습을 나타낸 건 같은 해, 역시 리히테르의 총애를 받던 바이올리니스트 바딤 레핀의 반주자 자격이었다. 2000년대 초반부터 호암아트홀과 예술의전당, 세종문화회관에서 독주회를 가졌고, 서울시향, KBS 교향악단과 합을 맞췄지만 추후 공연은 정련되지 않았다. 리사이틀이나 협연자의 비중보다 한국에선 피터 비스펠베이, 이자벨 파우스트의 조력자로 위상이 부각됐다. 내한 공연의 궤적을 기준으로 보면 멜니코프는 서울에서 독주자로서 경력 관리에 실패한 셈이다.

리히테르 사후, 멜니코프의 음악이 크게 변한 것은 아니지만 음악의 자취는 험로를 걸었다. 2000년대 들어 한동안 멜니코프는 러시아 음악을 연주 레퍼토리에서 의도적으로 배제했고 그 재능을 다시 꺼내기까지 지휘자 플레트뇨프의 격려와 지지가 큰 몫을 했다. 그가 서른 살에 맨체스터에서 교수직을 맡은 것도 의외였다. 솔리스트로 성장할 시기에 학생을 돌보는 것이 어떤 유익을 남길지, 매니지먼트에선 예술적 미래를 능동적으로 논의하기 어려웠다. 2000년대 중반 이후 멜니코프는 영국에서의 기반이 단단해졌고, 위그모어홀 기획 공연이 꾸준한 것도 그 배경이다.

2010년대 파우스트·케라스와 아르모니아 문디 레코딩을 중심으로 듀오, 트리오 활동을 거듭하면서 멜니코프는 리히테르의 잔영에서 서서히 벗어나고 있다. 역사주의 관점의 바흐부터 자신의 혈통이 빛나는 러시아 후기 낭만 작품까지 멜니코프의 자산이 더욱 정리된 규격으로 한국의 관객들과 만날 필요가 있다. 마흔넷의 건반주자가 청중과 함께할 시간은 아직도 많다.

호기심 가득한 현의 노래, 장 기엔 케라스

1967년 몬트리올에서 태어난 장 기엔 케라스는 리옹 음악원과 프라이부르크 음대, 줄리아드 음악원을 거치며 프랑스·독일·미국식 교육을 접했다. 바로크부터 현대음악까지 성공한 첼리스트의 정형화된 해석과는 동떨어진 접근을 보이는데, 그 독창성은 앵테르콩탕포랭 수석 첼리스트 시절에 만난, 정신적 멘토인 피에르 불레즈의 영향이라는 것이 중론이다. 작곡가와 재연자, 관객이 공연을 계기로 어떻게 조화를 이루는지 관찰자로 접근한 방식인데, 불레즈의 지휘 방식과 흡사하다.

첼리스트가 협주곡으로 펼칠 카드는 그리 많지 않아 지휘자를 겸업하거나 전향하는 사례가 없지 않은데, 케라스는 그 좁은 스펙트럼에서 쇨러와 아미의 협주곡을 발견했다. 엘가·드보르자크·슈만을 비롯해 바로크 레퍼토리에서 새로 빚어낸 협주곡상에는 자신의 레이블이 지닌 정체성처럼 호기심이 가득하다.

프랑스계 연주가 중에서도 케라스가 두드러지는 건 5세 때부터 3년간 알제리에서 머물렀던 경험도 무시할 수 없다. 알제리에서 프랑스로 옮긴 곳도 인구 4천 명의 작은 프로방스 마을이었고 고등교육도 파리 대신 리옹에서 받았다. 현재 프라이부르크 음대 교수인 케라스는 프랑스어·독일어·영어로 커뮤니케이션할 수 있어 그의 실내악 협업은 수월한 편이다. 케라스의 바흐 무반주 첼로 모음곡은 음색과 울림, 템포감에서 연주자의 현재를 가장 잘 드러낸 작품이다. 세부를 신경 쓰지만 움츠러들지 않는, 순수하고 앳된 연주다. 소리는 요염하지만 기품을 머금은 첼로의 진가는 역시 케라스의 리사이틀에서 가장 빛날 것이다.

사진 LG아트센터·신나라 레코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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