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뷔시 서거 100주년-2 인상주의 음악을 꽃피운 대표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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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8년 2월 10일 4:29 오후

가곡집 ‘잊혀진 노래’ 전 6곡 (1887)

모두 80여 곡을 헤아리는 그의 가곡들 중 본격적인 시작을 알리는 곡이라고 할 수 있으며, 시어가 갖는 구체성을 강조하는 것과는 다른 방향으로 나아갔던, 다시 말해 언어적 의미와 감각을 결합시키는 것에 주력했던 작곡가의 스타일이 본격적인 궤도를 탄 작품이기도 하다. 가곡 전체를 통틀어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시인이 폴 베를렌(1844~1896)인데, 이 작품 역시 그의 시집 ‘말없는 연가’(1874)에서 선택한 시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초기작품인 만큼 아직 성악 파트가 피아노와 완전한 독립성을 띄고 있다는 느낌은 적지만 시어의 작은 음향적 뉘앙스마저 풍성하게 표현하려 애쓴 작곡가의 정성어린 손길이 여섯 곡 모두에서 느껴진다. 1곡의 제목은 ‘그것은 우울한 황홀’이다. 절정에 이른 사랑의 감각을 나른한 탄식으로 소화시켰다. 보슬비를 연상시키는 피아노 반주가 유명한 2곡은 ‘내 마음에 눈물이 흘러’이다. 달콤함과 관능이 보드라운 음상이 허용하는 한도 내에서 매력적으로 움직인다. 3곡은 ‘나무 그늘은…’이다. 감음정과 7화음이 공존하며 풀리지 않는 현대인의 불안한 감정을 드러낸다.

명랑한 분위기의 4곡은 ‘목마’다. ‘벨기에 풍경’이라는 부제가 붙어있는 이 곡은 위에 설명한 시집이 아니라 다른 소스에서 가사를 얻어 작곡가가 순서를 바꾼 것이다. 5곡은 ‘초록’이라는 제목이다. 기분좋은 바람이 부는 가운데 연인에게 선물을 건네는 풋풋함이 초록빛처럼 느껴진다. 무겁고 장엄한 기분이 드는 마지막 곡은 ‘우울’이다. 피아노 첫 머리에 등장한 주제가 여러 차례 반복해 통일성을 강조하며 성악파트도 자유로운 당당함을 지닌 채 2중주를 펼친다. “장미는 빨갛고 넝쿨은 까맣다/그대의 조그만 움직임에 나의 절망이 모두 살아난다(중략)” 베를렌의 시는 이유 없는, 그러나 끝간데 없이 충동적인 우울의 정서를 그려내고 있다.

 


영상(전2권) (1905, 1907)

피아노 곡으로 출발한 드뷔시의 인상주의를 잘 설명해주는 작품들 중 제일 먼저 언급해야 할 작품은 두 권으로 된 ‘영상’ 시리즈다. 각각 1905년과 1907년에 만들어진 이 기념비적인 작품은 소재의 묘사와 작곡가의 기분을 함께 묘사하는 수법을 피아노로 녹여낸 최초의 본격적인 걸작이다.

제1권은 인상주의 작품에서 인기있는 소재인 ‘물’을 개성있는 필치로 담은 ‘물에 비친 그림자’로 시작한다. 고여 있지만 일정한 형태가 없는 물은 처음엔 잔잔한 모습으로 비춰진 대상을 그려내지만, 이내 흔들리는 형태 속에 모든 것이 흐려진다. 혼란스러운 움직임을 지나 점차 화려하게 변해가는 물방울들의 자잘한 움직임이 치명적인 매력으로 다가온다. 2곡은 드뷔시가 바치는 자국의 위대한 선배를 위한 찬가, ‘라모를 찬양하며’이다. 바로크 후기에 활동하며 화려한 색채의 건반악기 작품들을 남긴 쟝 밥티스트 라모를 위한 장송가적인 분위기로, 바로크의 내음이 직접적으로 나타나지는 않지만 동양풍 음계와 명상적인 기분으로 시작하여 장엄한 클라이맥스를 꾸민다. 3곡은 여러 가지 의미를 담은 ‘움직임’이다. 8분음표와 셋잇단음표, 중간부에 나타나는 화려한 비르투오소적 표현과 지속되는 움직임에 더해지는 절묘한 색채 변화가 하이라이트다.

제2권은 1권의 착상을 조금 더 미학적으로 심화시킨 느낌과 음의 추상적인 표출이 더욱 두드러진다. 촉각을 포함한 오감을 매우 예민하게 표현한 1곡 ‘잎새를 흐르는 종’은 온음계를 기본 바탕으로 하여 흔들리지 않는 나뭇가지와 상대적으로 바람에 나부끼는 이파리들의 움직임, 시간이 멈춘 듯한 정적을 깨트리지 않고 조용히 울리는 종소리 등을 환상적으로 그리고 있다. 하나의 싯구와 같은 2곡의 제목은 ‘달은 황폐한 절에 걸려’이다. 명상풍의 멜로디는 오묘한 화성으로 차분하게 장식되며, 3곡은 ‘금빛 물고기’다. ‘금붕어’로 이름붙이지 않아 더욱 특별한데, 드뷔시가 영감을 얻은 쟁반 속 그림의 물고기들이 이리저리 헤엄치며 자유롭게 노는 모습을 밝은 분위기로 그리고 있다. 물고기들은 수면으로 튀어오르기도, 잠수하기도 하는데, 작곡가는 특유의 프랑스적 비르투오시티로 불규칙한 움직임을 때론 화려하게, 때론 부드럽게 탈바꿈시킨다.

 


교향시 ‘바다’

그 근원을 알 수 없는 무한한 힘, 언제나 예측 불허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바다는 두려움보다는 신비스런 존재이다. 인상주의 작곡가 드뷔시에게 이 거대한 소재가 흥미를 끌었던 것은 당연하다고 할 것이다. 흔히 ‘바다’로 알려져 있는 그의 세 악장짜리 관현악곡은 ‘오케스트라를 위한 세 개의 소묘’라는 부제가 붙어있다. ‘소묘’라는 단어가 우리에게 주는 느낌은 ‘자유로움’이다. 끝없는 하늘과 바다의 만남, 그보다 자유로운 것이 또 있을까. 거기에 드뷔시가 1905년 당시에 가졌던 음악에 대한 새로운 원칙은 이미 걸작의 탄생을 예견했다고 보여진다. “음악은 본질상 엄격하고 전통적인 형식 속에 흘러가는 것은 아닙니다. 음악은 색과 리듬을 가진 시간으로 되어 있습니다…” 작곡가가 출판업자였던 뒤랑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이다. 드뷔시의 전성기 작품인 ‘바다’는 그동안 찾아보기 힘들었던 폴리포니가 나타나는데, 파도와 물보라, 바람이 불러일으키는 바다의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미세한 움직임 등을 새로운 기법으로 나타내려 한 의지가 돋보인다. 작품이 본격적으로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은 1903년, 파리 동남쪽 약 80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비시앙이라는 곳에서였는데, 당시 드뷔시의 부인이었던 릴리의 친정이었다. 걸작은 시련을 거쳐 완성되는지, 1904년 드뷔시는 릴리를 버리고 엠마 바르다크와 저지 섬으로 사랑의 도피를 떠난다. 상상 속에서 만들어진 음표들이 섬에서의 생활로 점차 현실화된 것이라고 보아도 좋을 듯하다. 작품의 완성은 1905년 3월이었다.

‘바다 위의 새벽부터 정오까지’라는 제목의 1악장은 말 그대로 여명의 신비스러움이 찬란한 태양으로 변하는 과정 속의 바다의 흐름으로, 주제가 되는 모든 요소가 등장하는 도입부와 네 부분으로 나뉘어진 발전부, 마무리를 위해 두 부분으로 되어있는 종결부로 이루어져 있다. 복합적 선법으로 이루어진 주제는 차례대로 등장하지 않고 종횡무진해 어지러운 느낌이며, 조성 역시 여러 종류가 한꺼번에 등장해 자연스럽게 서로를 파괴하며 자유를 추구한다. 2악장의 제목은 ‘파도의 희롱’이다. 물보라가 뿜어지듯 연주되어야 한다는 지시가 되어있는 작품은 약 아홉 개의 주된 요소들이 흩어지고 뭉치는 형태로 일관된 규칙이 없이 흘러간다. 그 에너지는 부서지며 힘을 얻고 뭉친 후 다시 부서지는 ‘거대한 물’, 파도의 모습 그대로다. 3악장은 ‘바람과 바다의 대화’이다. 종전에 등장했던 주제가 금관악기 등 화려한 음색을 지닌 악기들의 솔로로 반복되며 중간중간 그 실체를 알기 힘든 ‘혼돈의 운동성’을 띈 주제들이 클라이맥스로 향하는 것을 돕는다.

 


전주곡집(전2권) (1910, 1913)

드뷔시의 피아니즘이 만개한 걸작이라면 역시 두 개의 곡집, 열 두 곡씩 모두 24곡으로 된 ‘전주곡집’ (1권은 1910년, 2권은 1913년 완성)을 들어야 한다. 여기서 드뷔시의 음악어법은 매우 상징적이면서도 절제된 것으로 발전했으며, 매우 자유로운 소재선택과 함께 모든 곡이 서로 다른 즉흥성으로 빛나고 있다는 점이 무엇보다 훌륭하다. 작품마다 제목이 있지만 이 곡들은 특이하게 제목이 악보의 마지막에 살짝 나타나 있는데, 언어가 한정하는 이미지에 고착되지 말라는 작곡가의 세심한 배려다. 그 중 전주곡 1집의 다섯 번 째 곡은 ‘아나카프리의 언덕’이다. 나폴리의 맑은 하늘과 아름다운 지중해가 연상되는 낙천적 분위기의 모티브들과 타란텔라 리듬 사이에 들려오는 나폴리 민요풍의 멜로디가 매력적이다. 여덟 번째 곡 ‘아마빛 머리의 처녀’는 스물 네 곡 중 가장 인기있는 곡이다. ‘매우 조용하고 다정하게, 표정이 풍부하게’ 연주하라는 지시어와 함께 친근한 느낌을 주는 5음 음계를 통해 이국적인 정서와 풍성한 뉘앙스를 전달한다. 2권의 피날레를 장식하는 곡은 ‘불꽃’이다. 빙글빙글 돌아가며 터지는 폭죽, 밤하늘 높이 쏘아 올려져 수만 가지의 환상을 만들어내는 불꽃놀이의 잔영을 포함해 규칙없이 자유롭게 도약하는 화려한 음의 동작을 강한 불협화음으로 표현한다.

 


바이올린 소나타 (1917)

드뷔시의 마지막 작품이라는 상징성과 아울러, 1차세계대전의 혼돈 속에서 오히려 차분함과 간결함, 내면에서 배어나오는 은유적 표현의 엑기스를 골라 음표화시키려는 노력이 빛나는 걸작이다. 그는 생의 마지막에 다양한 악기로 구성된 실내악 소나타를 계획했다. 애초의 구상은 여섯 곡으로, 첼로 소나타·플루트, 비올라, 하프를 위한 소나타·바이올린 소나타·오보에, 혼, 쳄발로를 위한 소나타·트럼펫, 클라리넷, 바순,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더블베이스를 포함한 여러 악기를 위한 소나타 등을 완성하려 했으나 1918년 끝내 마지막 세 곡은 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여섯 곡의 세트를 생각하며 만든 뒤랑 에디션 악보의 표지에서 유독 ‘프랑스의 작곡가 클로드 드뷔시에 의한’이라는 문구가 눈에 띈다. 한없이 자유로운 화성과 구성, 소나타라는 제목이지만 독일식 음악 문법에 얽매이지 않겠다는 ‘프랑스’ 작곡가의 특별한 각오는 작품의 내용으로도 여실히 증명된다.

알레그로 비보의 1악장은 첫 머리에 나오는 주제가 악장 전체를 지배한다. 약간 동양적인 아르페지오에 의한 경과부도 인상적이지만 한 음을 질질 끌며 등장하는 두 번째 주제가 후반부 첫 주제와 교묘하게 얽히면서 독특한 클라이맥스를 만든다. 2악장 간주곡은 ‘마음 내키는대로 경쾌하게’라는 지시어가 매우 잘 어울리는 자유로운 구성으로 16분 음표의 유머러스한 움직임과 각기 다른 분위기를 지닌 서정적인 모티브 두 개가 자유로운 배열로 반복된다. 신비스러운 분위기로 시작하는 3악장 첫머리의 피아노 파트는 2악장의 모티브를 배경으로 하며, 이윽고 등장하는 바이올린의 주제는 카프리치오적인 동시에 스페인의 내음도 풍긴다. 주제는 반복되며 변화와 성장을 거듭하고, 코다에서는 바이올린이 새로운 요소를, 피아노가 주제를 확대해 연주하며 불균형의 매력을 과시한다.

 

글 김주영(피아니스트·음악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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