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니스트 안종도, 예술과 기술의 그 지점

예술과 기술의 그 지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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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8년 7월 9일 5:48 오후

피아니스트와 피아노 제작자와 조율사가 함께 모여 ‘진정한 소리’를 찾는 클랑아카데미가 함부르크에서 펼쳐진다

2012년에 파리 롱티보 크레스팽 콩쿠르 우승 이후 안종도는 잘츠부르크를 거쳐 함부르크에서 살고 있다. 평소에 그가 보내오는 이메일에는 음악과 함부르크 문화에 대한 진지한 이야기들뿐만 아니라, 모 주간지에 연재하는 함부르크의 음악이야기를 읽다 보면 마치 함부르크가 음악만을 위해 태어난 도시처럼 느끼게 한다. 지난 5월, 베를린에서 함부르크로 향하는 기차에서 안종도에게 연락을 취했다. 그런 그와 함께 함부르크를 돌아보며 그가 마셨던 음악의 공기를 함께 맛보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는 연주 차 러시아에 있었고, 여행은 혼자만의 몫이 되었다. 며칠 뒤, 그는 좀 특별한 아카데미를 준비한다는 소식을 담아 이메일을 보내왔다.

“2015년 8월 함부르크의 독주회 때, 저의 피아노를 조율한 이는 안드라스 쉬프의 전속조율사이자 영국스타인웨이의 책임자인 울리히 게르하르츠라는 분이었습니다. 리허설이 오전 11시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7시부터 나와 프로그램을 확인하고 피아노를 조율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제 리허설을 2시간 동안 듣더니 피아노에 대해 더 원하는 게 있는지 물어왔고, 저의 터치를 이해했으니 그에 맞게 피아노를 더 손봐야겠다며 3시간 동안 조율을 진행했습니다. 후에 들은 바로는 고전기의 작품이 요구하는 소리가 워낙 까다로운지라 예정보다 일찍 와서 공연장과 저의 연주를 체크했다고 하시더군요. 이날 연주 때 제가 느낀 ‘느낌’은 이 편지에 굳이 설명 드리지 않아도 짐작하실 거라 생각합니다.”

음악가들은 자신의 악기를 직접 조율한다. 현악연주자는 현을 조이고 풀어서, 관악연주자는 관의 이음새를 조절하여서, 타악기연주자는 가죽을 당기거나 풀며 느슨함과 팽팽함 사이에서 제 소리를 찾는다. 이러한 조율은 연주의 보이지 않는 시작이며, 연주 전에 연주자와 악기가 약속의 손가락을 거는 행위와도 같다. 하지만 피아노의 조율은 피아니스트의 몫이 아니다. 그는 조율된 피아노 앞에 그저 앉을 뿐이다. 따라서 악기의 내력을 모른 채 연주를 진행하는 경우가 많다.

7월 16일부터 22일까지 함부르크에서 열리는 클랑아카데미(www.klangakademie-hamburg.de)는 앞서 말한 그 ‘느낌’을 공유하는 장으로, 피아노의 소리가 피아니스트와 피아노기술자, 피아노와 공간의 울림이 함께 만드는 종합예술이라는 것을 알아가는 시간이다. 이 아카데미의 예술감독을 맡은 안종도와 레미 제니에의 피아노레슨, 피아노기술자인 얀 키틀의 조율과 제작세미나, 그리고 피아니스트와 조율사의 소통을 위한 세미나가 펼쳐진다. 몇 개의 질문을 담아 함부르크로 이메일을 보냈다. 이하 안종도가 보낸 답장.

 

함부르크에서 가장 먼저 방문한 곳이 미술공예박물관이었습니다. 오랜 시간을 머금은 수많은 건반악기들이 전시된 곳이었습니다. 전시장 한쪽에선 어느 교수가 학생들에게 진열된 피아노로 레슨을 하고 있었습니다. 작품도 악기도 1700년대의 것이었습니다. 수업을 위한 연주였지만 1700년대의 음악풍경이 이런 식으로 다가온다는 사실에 너무나 감동을 받았습니다. 이어서 브람스박물관으로 향했습니다. 피아노를 공부한다는 어린 중국방문객이 브람스가 사용했던 피아노를 쳐볼 수 있냐는 농담에 관장이 좋다는 답변을 하는 순간 그 좁은 공간은 소녀가 기억을 더듬으며 연주하는 브람스의 울림으로 가득 찼습니다. 오래되어 삐걱거리는 마루의 잡음조차도 꾸밈음처럼 들려온 오후였습니다. 이방인인 저에게 이렇게 다가온 함부르크는 안종도씨에게 어떤 삶의 공간인가요?

이 도시에 정착한지도 6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습니다. 한 사람을 에워싸고 있는 환경은 끊임없이 그와 교감하며 영감을 제공하고, 그것은 그의 음악 인생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함부르크에서 겪은 바도 바로 그렇습니다. 흔히 유럽의 2대 항구도시로 알려져 있는 이곳은 과거에 낯선 세계와의 빈번한 교류 탓이었던지 전통만을 고집스럽게 지키는 것이 아니라 외부의 문물을 열린 자세로 수용하고 그들의 방식으로 승화시키는 것이 정체성이 되었습니다. 바로크시기인 16~17세기에는 ‘독일 30년 전쟁’을 피해갔기에 정치·경제적으로 번영할 수 있었고, 음악적 위상 또한 대단해 1678년에 독일어권의 첫 오페라극장이라 할 수 있는 함부르크 오페라극장이 문을 열기도 했습니다. 헨델과 텔레만을 비롯하여 북스테후데,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하스, 마테손 등의 거장들은 이 특유의 국제적이고 자유로운 분위기와 풍족한 환경을 거름삼아 활동했고 카를 필립 엠마누엘 바흐마저도 이곳을 찾았죠. 이들의 음악에 볼 수 있는 독일·프랑스·이탈리아 양식이 고루 혼합된 국제적 양식은 어쩌면 함부르크의 정체성과 닮아 있을지도 모릅니다. 제가 클랑아카데미를 제안했을 적에도 새로운 시도임에도 불구하고 함부르크 음악계에서 상당한 호응과 지지를 해주었는데, 이러한 도시의 음악적 전통과 분위기가 한 몫 하지 않았겠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클랑마뉴팍투어 워크숍의 공방과 연습실

울리히 게르하르츠와 그날의 경험 이후 무대 위의 피아노를 대하는 태도와 조율에 대한 생각이 바뀌었으리라 봅니다.

그 이후 ‘조율’이란 어떤 의미로 다가왔나요? 어느 하나의 방해도 없이 소리가 그대로 전달된 경험은 태어나서 그때가 처음이었습니다. 소리의 완성은 연주의 완벽함에서만 오는 게 아니라, 피아니스트의 영감, 조율사의 기술, 장소의 울림이 만나 만들어진다고 생각하게 되었죠. 그러던 중 2016년 말에 함부르크 스타인웨이 공장에서 20년 넘게 일한 유명제작자 다섯 명이 ‘클랑마뉴팍투어(Klangmanufakur)’라는 워크숍과 공방을 열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소리의 한계를 넘고 잠재된 소리를 깨운다는 그들의 창립정신이 무척 흥미롭게 느껴졌고, 공정과정에서 최종 소리를 점검하는 얀 키틀과의 만남은 제가 클랑아카데미를 만드는 데에 큰 기여를 했습니다. 소콜로프·키신·폴리니·아르헤리치·브렌델 등과 20년 넘게 작업해온 그와 함께 어떻게 해야 피아니스트와 기술자의 협업이 최상의 소리를 만들어내는지, 어떻게 해야 피아니스트는 공연장에서 처음 만난 악기를 통해 ‘최상’의 소리를 끌어낼 수 있는지에 대한 많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가 말하는 ‘최상’의 의미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어디에도 기울지 않는, 다시 말해 피아노 본연에 내재되어 있는 훼손되지 않는 상태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상태를 그는 ‘Medium’이라는 단어로 표현했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결국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 좋은 것처럼 피아니스트와 피아노의 관계에서도 이러한 ‘균형’을 지향해야 한다는 것이죠.

 

클랑마뉴팍투어의 홈페이지(www.klangmanufaktur.de)를 살펴보았습니다. 연주 중심의 교육과 활동이 주를 이루는 국내 상황에서 볼 때, 이러한 워크숍은 독특하고 낯설기까지 합니다.

이 공방에서 생산되는 피아노는 저마다의 개성이 강합니다. 창단을 주도한 올리버 게니우스는 제작자나 기술자의 마음도 피아노와 그 소리에 반영되기 때문에 제작 시 감정이 치우치지 않도록 ‘Medium’의 자세로 임한다고 합니다. 위대한 음악가들은 훌륭한 제작자들과 아이디어를 많이 교환했습니다. 쇼팽과 세바스티앙 에라르(1752~1831), 베토벤과 존 브로드우드(1732~1812), 리스트와 뵈젠도르퍼(1794~1859) 등등 말이죠. 이들의 교류가 피아노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친 것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현대사회에 이르러 직업이 세분화되고 전문화 되는 과정을 거쳐 이러한 예는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습니다.

 

클랑아카데미의 일정에 연주 레슨 외에 조율 레슨이 있습니다. 참가자들이 이를 통해 배우는 것은 무엇인가요.

음악에 대한 해석과 표현인 ‘예술적 언어’와 피아노의 메커니즘과 구조를 이해하기 위한 ‘기술적 언어’를 가르칠 예정입니다. 학생들은 2~3평 남짓의 연습실에서 작은 사이즈의 그랜드피아노로 연습을 합니다. 이러한 환경이 무대 위에서 발현할 소리예술을 위한 적합한 연습환경인지 의심할 필요가 있고, 자신과 무대에서 함께 할 피아노의 구조를 이해하고 그로부터 어떻게 소리를 이끌어내야 하는지에 관한 실습은 매우 부족한 상황입니다. 예를 들어 고음현의 길이는 피아노 크기에 따라 별로 큰 편차가 없지만, 저음현은 피아노마다 차이나는 현의 길이에 따라 편차가 심해집니다. ‘클랑좀머(Klangsommer) 2018’이라는 음악페스티벌도 열어 수료생들이 깨달은 느낌을 관객과 공유할 예정입니다.

 

그렇다면 피아니스트와 악기제작자나 조율사가 함께 만드는 ‘최상의 소리’는 피아니스트나 기술자의 머릿속에 딱 그려져 있는 것인가요, 아니면 음악가와 제작자가 함께 하면서 우연적으로 발견하는 매번 다른 그 무엇인가요?

이른바 ‘Medium’의 상태는 상황마다 다릅니다. 제 경험상 기술자와의 작업은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악기의 구조를 잘 알지 못하는 피아니스트들은 소리에 대해 기술자에게 설명할 때 ‘날카로운’ ‘따뜻한’ ‘부드러운’ ‘밝은’ ‘어두운’ 등의 형용사를 많이 사용합니다. 여기서 문제는 이러한 표현들을 기술자마다 각기 다르게 이해하기 때문에 이해와 공유를 위한 ‘균형’을 잡아가는 과정은 힘들죠. 이를 위해서라도 피아니스트가 피아노의 구조와 메커니즘에 대해 객관적인 지식을 갖는 것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피아니스트뿐만 아니라 기술자에게도 이러한 자세가 필요하다는 게 얀 키틀의 생각이고요.

 

클랑아카데미를 계기로 피아니스트이자 교육자로서 안종도씨의 삶과 예술의 방향이 또 다른 분기점에 놓일 것이라 생각합니다.

클랑아카데미를 통해 함부르크 작곡가들과 작품도 지속적으로 발굴할 예정입니다. 바로크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함부르크에서 활동한 이들의 작품으로 구성한 무대가 클랑좀머2018의 하나로 준비되어 있습니다. 지난 몇 년간 바로크음악에 심취하여 하프시코드작품을 피아노로 연주해보며 피아노와의 울림에 대해 생각해보았고, 이런 호기심으로 인해 올해 브렌멘음대에 하프시코드과에 입학하여 카르스텐 로프 교수 밑에서 프로베르거, 쿠프랭, 라모 등의 작품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8월에 파리의 피아노페스티벌(LES PIANOS FOLIES DU TOUQUET)의 초청을 받아 쇼팽의 발라드와 쿠프랭의 클라브생 모음곡을, 슬로바키아의 브라티슬라바에서 개최하는 훔멜페스티벌의 개막공연에서 훔멜의 피아노 협주곡 4번을 협연할 예정입니다.

 

글 송현민(음악평론가) 사진 KLANGAKADEMIE HAMBU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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