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치아노 베리오, 이탈리아 근대 음악을 이끌다

이탈리아 근대 음악을 이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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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8년 7월 27일 12:13 오후

불꽃 튀었던 20세기 중반의 실험적인 음악을 뒤늦게 접한 루치아노 베리오(1925~2003)는 앞선 세대에 유럽을 달구었던 음렬 음악과 전자음악을 빠르게 습득했다. 그리고 인성과 악기에 대해 깊이 탐구하고 인용기법과 부연기법 등의 작곡 방법을 도입하여 개성적인 음악 세계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이러한 가운데 애정 어린 마음으로 포용한 민속 음악의 자취는 모두를 감동시켰다.

 

베리오의 등장

종교음악과 오페라가 중심을 이루었던 이탈리아의 음악 역사에서 기악은 대체로 힘을 얻지 못했다. 그렇다고 해서 작곡가들이 완전히 외면한 장르는 아니었다. 로시니의 ‘현을 위한 소나타’는 잘 알려진 곡이며 도니체티는 몇 곡의 교향곡을 남겼고, 베르디의 현악 4중주곡은 오늘날에도 종종 연주된다. 이렇듯 이탈리아의 기악은 몇몇의 작곡가를 통해 소심하게 그 맥을 이어갔다. 그러다 근대에 이르러 레스피기와 말리피에로 등에 의해 르네상스를 맞았으며, 그 뒤를 이어 등장한 마데르나와 노노는 이탈리아를 현대 기악음악의 중요한 거점으로 만드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이러한 흐름에 동참한 또 하나의 작곡가에는 루치아노 베리오가 있다. 그는 역사적으로 이탈리아가 성악의 종주국이면서, 자신이 활동하던 시기의 이탈리아 창작 음악이 기악 분야에서 맹위를 떨치고 있다는 이중성을 잘 인지하고 있었다. 이탈리아 작곡가로서 성악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던 베리오가 첫 부인으로 소프라노이자 음악적 동료였던 캐시 버버리언을 맞은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며, 또한 둘이 함께 만들어낸 음악적 성과는 베리오의 음악 세계를 이루는 하나의 중요한 기둥이 되었다. 이와 함께 ‘세차’ 시리즈로 대표되는 악기에 대한 깊은 탐구 역시 그의 여러 작품 안에 깊이 녹아있다. 이렇게 베리오의 음악 안에는 성악과 기악이 음악을 만드는 소재로써 장르에 구애받지 않고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있다.

 

루치아노 베리오

12 음에 매료되다

베리오는 이탈리아 북부의 작은 도시인 오넬리아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와 아버지 모두 오르가니스트였으며 그들로부터 피아노를 배우면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하지만 작은 도시였던 만큼 고향에서 접할 수 있는 음악은 작품이나 규모 면에서 한정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전통적인 음악 교육만을 받고 자란 그에게, 밀라노 음악원을 다니면서 접한 음악들은 상당히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이러한 가운데 베리오가 새로운 음악의 가능성을 발견한 것은 1951년에 다름슈타트 하기 신 음악 레슨에 참여하여 메시앙의 ‘음가와 강세의 모드’를 들었을 때였다. 이 곡은 쇤베르크에 의해 고안된 12음 기법에서 출발했다. 12음 기법이란 한 옥타브의 열두 음을 임의로 배열한 후 그 순서로 음정을 선택하는 것인데, 이 음렬은 거꾸로 사용할 수도 있고(역행), 위아래를 뒤집어서 사용할 수도 있으며(전치), 뒤집은 후 거꾸로 사용하는(전치역행) 등, 어느 정도의 자유도가 부여되어있다. 그런데 메시앙은 이 곡에서 이러한 음정 선택 방법을 음정뿐만 아니라 음의 길이와 강세에도 적용했다. 이 획기적인 생각은 슈토크하우젠과 불레즈가 이 작품을 듣고 곧바로 각각 ‘앙상블을 위한 교차 연주’(1951)와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구조 Ia’(1951)를 만들었을 정도로 굉장한 이슈가 되었다. 이러한 음악은 모든 요소에 음렬 기법을 적용한다는 의미로 ‘전음렬 음악’ 혹은 ‘총열 음악’이라고 불렸다.

당시 베리오는 아직 음렬 음악에 익숙하지 않았음에도, 메시앙의 이 곡을 듣고는 과감히 이 분야에 뛰어들었다. 이탈리아에서는 이미 달라피콜라(Luigi Dallapiccola)가 서정성이 가미된 음렬 음악을 쓰고 있었기 때문에, 베리오는 쇤베르크보다는 달라피콜라를 모델로 삼았다.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두 개의 소곡(1951)으로 달라피콜라 풍의 음렬을 탐구한 그는, 피아노곡 ‘다섯 개의 변주곡’(1953)에서 13음렬(열두 음 중의 하나가 반복된다.)을 사용하며 자신만의 음악을 시험했다. 그리고 같은 해에 이 시기의 중요한 작품으로 손꼽히는 ‘실내음악’(1953)을 완성했다. 특히 1악장은 12 음렬을 기본 골격으로 하면서 선율적인 서정성이 넘치는 수작으로, 이미 부인이 되어 있었던 버버리언을 위해 음성을 편성했다. 음렬 작곡법은 이후 그의 음악의 중심에서 밀려나기는 하지만, 음정을 선택하는 하나의 방법으로써 사용되곤 했다.

 

비틀즈의 폴 메카트니, 작가 배리 마일스와 베리오

음에 기술을 더하다

미국인인 부인 버버리언과 함께 미국으로 여행할 기회가 있었던 베리오는 1952년에 뉴욕에서 실험적인 전자음악을 듣고 음렬음악 이상으로 또다시 큰 충격에 휩싸였다. 베리오는 귀국하자마자 이미 밀라노에서 전자음악 작업을 하고 있던 마데르나에 뒤이어 RAI 방송국에서 전자음악을 만들기 시작했으며, IRCAM에서 전문적으로 수학한 후 직접 피렌체에 ‘템포 레알레’(Tempo Reale)라는 전자음악 연구소를 설립하는 등 전자음악 분야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베리오는 미국에서 귀국한 후 미뮤직 1번(Mimusique No. 1: 1953)을 시작으로 ‘나란한 노래’(1975)까지 꾸준히 테이프를 위한 전자음악을 만들었다. 이러한 와중에 작곡된 ‘차이’(1959)는 주목할 만하다. 이 곡은 플루트와 클라리넷, 하프, 비올라, 첼로 5중주를 녹음한 후, 전자적인 변형을 거친 사운드를 재생하면서 같은 편성의 5중주가 함께 연주하도록 한다. 즉, 특정 소리를 녹음한 후 가공하는 프랑스의 ‘구체음악’ 기법이 사용되었다는 점, 그리고 전자음악과 어쿠스틱 연주가 공존한다는 점 등 여러 파라미터가 추가되어 복잡도가 확연히 높아진 곡이었다.

 

네델란드의 베아트릭스 여왕과 남편 클라우스 , 그리고 베리오 (1972)

‘세퀜차’에 대하여

무대 위의 연주자들은 연주를 녹음했다는 점에서 자신의 왜곡된 과거의 기억과 일상적인 현재의 모습이 공존하는 특이한 체험을 하게 된다. 그리고 연주를 하고 있다는 점에서 연주자의 입장과, 전자음악을 온전히 수용해야 한다는 점에서 감상자의 입장에 동시에 서는 낯선 경험으로 이끈다. 그리고 ‘라보린투스 II’(1965)는 전자음악과 함께 연기자가 편성된 시청각 작품으로서의 음악을 선보여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후 전자기기의 연산 능력이 급속히 향상되면서 ‘생 전자음악’(live electronics)이라는 형태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미리 제작된 소리를 단순히 재생하는 테이프 음악과는 달리, 현장에서 합성되는 실시간성을 지닌다. 콘솔을 실시간으로 조작하여 소리를 만들거나 어쿠스틱 악기의 연주를 마이크로 받아 실시간으로 변조하기도 한다. 이렇게 전자음악 장치는 하나의 앙상블 악기로서 완벽히 수용된다. 베리오도 ‘오파님’(1988, rev. 1998)이나 ‘또 하나의 목소리’(1999)에서 생전자음악을 사용했다.

베리오의 이름이 보다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독주 악기들을 위한 ‘세퀜차’(Sequenza) 시리즈가 주목받기 시작하면서였다. 플루트를 위한 세퀜차 I(1958)부터 첼로를 위한 세차 XIV(2002)까지 이어지는 이 장대한 독주 연작은 그의 음악 인생 전반에 걸쳐 완성되었다. 세차는 ‘연속’이라는 뜻으로, 제시된 일련의 화음이 연속적으로 변화하고 발전하며 진행한다는 의미로 붙여졌다. 베리오는 여기에 멜로디도 제시하여 화음과 멜로디가 서로 ‘대화’하도록 했는데, 전체적으로는 화음이 중심에 있으면서도 선율을 고려하는 것은 베리오의 음악이 근본적으로 성악적인 것과 무관하지 않다.

여기서 베리오는 전체적으로 다성부로 들리도록 의도했다는 점도 중요하다. 독주 악기로 다성부 효과를 낸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지만, 바로크적인 다성부 구조와 현대적 연주법 등 시대를 아우르는 요소들이 배합되어있는 것은 ‘최고의 독주자’에 대한 그의 생각도 한몫했을 것이다. “현대적인 지성을 갖고 있고 기술적으로 안정되어있는 우리 시대의 최고의 독주자는 폭넓은 역사에 대한 시각을 갖고 있어야 하며, 과거와 현재의 창조적인 요구에 대한 갈등을 연구와 표현의 수단으로서의 악기를 통해 해결할 수 있어야 한다.”

지정된 악기의 개성을 최대한 발휘하는 것이 세차가 갖는 또 하나의 의도였다. 베리오는 악기의 연주법을 하나의 ‘언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지정된 악기의 언어가 최대한 발휘되도록 작곡했으며, 그래서 이 곡들은 악기의 고유한 음색과 함께 초절적인 기교를 통해 색다르고 다양한 음색을 만들어, 악기 자체가 갖는 가능성과 연주자의 능력을 최대로 끌어올린다. 따라서 다른 악기로 편곡해서 연주하는 것은 그다지 의미가 없다. 여기에는 클라리넷을 위한 ‘세퀜차 IX’(1980)를 연주법이 비슷한 알토색소폰을 위해 베리오가 직접 편곡한 ‘세퀜차 IXb’(1981)가 유일한 예외이다. 그래서 번호상으로는 모두 14곡이지만, 작곡자에 의한 편곡을 더해 모두 15곡이 된다. 그럼에도 여러 연주자가 연주법이 비슷한 악기로의 편곡을 감행하기도 했다. 오보에를 위한 ‘세퀜차 VII’(1969)는 소프라노 색소폰으로, 클라리넷을 위한 ‘세퀜차 IX’(1980)는 베이스클라리넷으로, 첼로를 위한 ‘세퀜차 XIV’는 더블베이스로 편곡되어있다.

그렇다고 세차가 기교적인 화려함만을 취하는 것은 아니다. 음악적 내용을 충실히 갖추고 있을 뿐만 아니라, 특히 목소리를 위한 세퀜차 III(1965)과 트롬본을 위한 세퀜차 V(1966)와 같이 독특한 시청각적인 제스처로 연주자와 악기가 하나가 되는 경지에 이르게 한다. 이러한 내용적인 완성도 덕분에 세차 시리즈는 최고의 현대음악 연주자들이 도전하는 레퍼토리가 되었다.

베리오는 ‘세퀜차’에 관현악의 옷을 입혀 새로운 곡으로 재탄생시키기도 했다. ‘케민스’(Chemins: 프랑스어로서 ‘길’이라는 뜻이지만, 일반적으로 이탈리아식 독음으로 표기된다. 그다지 옳아보이지는 않지만, 여기서도 이 표기를 사용했다.) 시리즈와 ‘코랄레’(1981)가 그것인데, 총 아홉 곡의 ‘케민스’ 시리즈는 모두 ‘세퀀차’의 독주 파트를 거의 그대로 재사용하고 있으며, 이를 확장하고 보완하는 관현악 혹은 실내악의 다양한 음향으로 덧입혔다. 이러한 작곡 방법은 주석을 달아 부연 설명을 하는 것과 같다고 하여 ‘부연 기법’이라고 말한다.

부연 기법이라면 ‘교향곡’(1969)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이 곡은 베리오의 음악적 근간인 인성에 대한 깊은 탐구와 전방위적인 기악 사운드가 결합된 베리오의 대표작으로, 특히 3악장은 말러의 교향곡 2번 ‘부활’의 2악장을 거의 그대로 연주하면서 여러 작곡가들의 단편들을 인용하여 덧입혔다. 이렇게 ‘교향곡’은 인용 기법과 부연 기법이 복합적으로 적용되어있어 베리오의 예술이 극치에 이른 작품으로 평가 받고 있다.

 

 

지휘자 주빈 메타와 베리오

모든 장르를 품다

베리오는 민요에도 큰 애정을 갖고 있었다. 만약 메조소프라노와 앙상블을 위한 ‘포크송’(1964)을 아무런 정보 없이 듣는다면, 감미로운 민속 선율에 색채감 있는 앙상블의 옷을 입힌 아름다운 작품으로 기억하게 될 것이다. 이 곡은 이탈리아와 프랑스,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미국 등 여러 지역의 민요에 앙상블 반주를 붙인 것으로, 베리오의 작품 중에서 낭만적인 접근이 돋보이는 가장 독특한 작품에 속하며, 오늘날에도 자주 연주되고 있다. 그리고 20년 후에 비올라와 관현악을 위한 ‘목소리’(1984)를 완성하고 ‘포크송 II’라는 부제를 붙였다. 부제를 보면 ‘목소리’가 ‘포크송’의 연장처럼 보이지만, ‘포크송’이 세련된 편곡이라면 ‘목소리’는 베리오의 음악 언어로 재해석되어있다는 점에서 두 곡 사이에는 큰 간극이 있다. 비올라와 타악기를 위한 ‘자연’(1985)은 실레지아 민요의 육성 녹음을 재생하면서 연주하는 작품으로, 민요의 원전과 예술적 재해석을 마주 보게 한다. 이것은 ‘차이’의 전자음악과 실연의 관계를 뒤바꾸어놓은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고전과 현대, 성악과 기악의 결합을 보여주었던 그가 후기에 이르러 민속 음악에 대한 관심을 표면화한 것에는, 음악의 역사 전체를 융화시키고 인간 본연의 모습을 담아냄으로써 우리 모두를 위한 음악을 추구하는 그의 이상이 바탕에 있다.

QR코드에 담긴 베리오 곡목입니다

두 개의 소곡 Due Pezzi (1951) 다섯 개의 변주곡 Cinque variazioni (1953)

실내음악 Chamber Music (1953) 차이 Differences (1959)

라보린투스 II Laborintus II (1965) 세퀜차 I Sequenza I (1958)

세퀜차 III Sequenza III (1965) 세퀜차 V Sequenza V (1966)

세퀜차 XIV Sequenza XIV (2002) 세퀜차 VII Sequenza VII (1969)

케민스 IV Chemins IV (1975) 교향곡 3악장 Sinfonia (1968-69)

포크송 Folksongs (1964) 자연 Naturale (1985)

글 송주호(음악 칼럼니스트)

기고와 해설, 강의 등 여러 활동으로 우리를 위한 음악으로서의 클래식을 나누고 있다. 서울시향의 프리렉쳐를 진행하고 있으며, 화음쳄버오케스트라 자문위원, 현대음악앙상블 ‘소리’ 프로그래머로서 흥미로운 음악회도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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