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자혜 & ‘여기는 당연히, 극장’

관습을 회의(懷疑)하는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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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8년 8월 6일 12:01 오전

우리 시대의 연출가_10우리 시대의 연출가_10‘오늘’의 연극을 행하는 연출가와 극단을 만나다

©SayQ studio

2012년 ‘웨이팅 룸’(작·연출)2012년 ‘여기는 당연히, 극장’(작·연출)2014년 ‘모래의 여자’(각색·연출)2014년 ‘일회공연_선돌 편’(구성·연출)2014년 ‘일회공연_대학로예술극장 편’(구성·연출)2015년 ‘디스 디스토피아’(작·연출)2015년 ‘곡비’(작·연출)2015년 ‘가난한 자들에 대하여’(각색·연출)2015년 ‘오늘의 4월 16일, 2015.8’(구성·연출)2015년 ‘commercial, definitely-마카다미아, 표절, 메르스 그리고 맨스플레인’(작·연출)2015년 ‘일회공연_아카이브 봄 편’(구성·연출)2016년 ‘commercial, definitely-마카다미아, 검열, 사과 그리고 맨스플레인’(작·연출)2016년 ‘연극실험실 혜화동1번지’(공동극작·연출)2016년 ‘킬링 타임’(연출)2016년 ‘코끼리’(연출)2017년 ‘가해자 탐구_부록:사과문작성가이드’(작·연출)2017년 ‘윤리의 감각’(작·연출)2017년 ‘그로토프스키 트레이닝’(작·연출)2018년 ‘BankART Studio NYK kawamata Hall’(공동극작·연출)2018년 ‘사물함’(연출)2018년 ‘셰익스피어 소네트’(구성·연출)2018년 ‘미아리고개 예술극장’(공동극작·연출)

 

푹푹 찌는 여름의 어느 주말, 왁자지껄한 대학로의 한 카페에서 연출가 구자혜와 마주 앉아 나눈 동시대 연극에 대한 맴도는 대화 끝에 나온 단어는 ‘인식’이었다. 어떤 이야기를 무대에 올릴 것인가, 관객이 얻을 수 있는 건 무엇인가, 연극의 의미와 가치는 무엇인가, 본질적인 질문 앞에 고심하던 젊은 연출가는 어쩌면 평범한 단어 앞에 멈춰 섰다.

“지난 6월에 올린 ‘세월호2018_셰익스피어 소네트’는 무대가 네 개의 구역으로 나누어져 있고, 네 명의 배우가 출연한다. 일부러 객석 어디에 앉아도 전체를 다 볼 수 없는 구조를 취했다. 관객이 꼭 모든 걸 다 봐야 하는가, 꼭 몰입해야 하는가, 작품을 통해 정서적인 무언가를 반드시 가져가야 하는가, 최근 들어 이런 고민을 하고 있다.”

동시대 사회적 이슈를 ‘픽’해서 ‘힙’한 방식으로 무대에 올리고, 관객은 이를 바라본다… 연극의 과정을 그는 다소 회의적 태도로 자문(自問)했다. 구자혜의 ‘연극하기’는 아마도 현 사회를 인식하는 행위 그 자체에 방점을 찍고 있는 듯하다.

인터뷰 내내 구자혜는 ‘소위’라는 단어를 가장 많이 썼다. 마치 세상이 당연하게 생각하는 모든 말에 의문을 품고 있는 사람처럼. 솔직하고, 세고, 거칠어 보이지만, 지나치게 신중하고, 때로는 소심하기도 한, 우리 시대 연출가 열 번째 주인공은 젊은 연출가 구자혜와 그가 이끄는 극단 ‘여기는 당연히, 극장’이다.

 

이중·삼중의 마이너리티

여기는 당연히, 극장은 지난 7월 제1회 페미니즘 연극제에 ‘미아리고개 예술극장’이라는 작품을 올렸다. 이 작품은 지난해 ‘연극실험실 혜화동1번지’라는 제목으로 초연했고, 올해 2월 일본의 TPAM에 초청되어 공연했다. 여기는 당연히, 극장의 멤버인 배우 이리와 구자혜가 공동 극작한 1인극이다.

혼자 사는 마흔한 살의 성소수자 여성이자 연극배우인 주인공은 커다란 여행가방을 끌고 다니며 자신이 설 곳을 찾는다. 타의로 선택된 종교, 배우로서의 삶을 이어나가기 위해 해내야 하는 노동, 애인과 사랑을 나누기 위해 애써야 하는 것 등 마이너리티로 살아가는 삶을 진솔하고 호탕하게 고백한다.

“처음 작품을 쓸 때부터 페미니즘과 퀴어 이슈를 염두에 두고 있었지만, 당시에는 한 사람의 삶 자체에 초점을 맞춘 채 발랄하게 터치하는 수준이었다. 일본 TPAM에서 공연하고, 미아리고개 예술극장까지 오면서 본격적으로 페미니즘과 퀴어 이슈를 강화했다. ‘이중, 삼중의 마이너리티를 건드리고 있다’는 일본에서 받은 평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단순히 사는 게 힘들다고 토로하는 게 아니라, 한 여성 배우가 자신의 몸을 빌려 이 땅에 다양하게 존재하는 마이너리티를 대변하고 있구나, 라는 생각을 재공연을 거듭하며 새삼 하게 되었다. 연출인 나조차도 발견하지 못했던 결들을 다시 한번 들여다보게 되었다.”

 

고유의 언어를 찾아서

1982년생인 구자혜는 이화여대에서 국문학을 전공하며 인문대극회에서 활동했다. 신입생 때부터 연출을 장려(?)하는 분위기에서 작가와 연출의 포지션을 오가며 자유롭게 연극의 언어를 체득했다. 사회비판적 시각이 강한 작품을 주로 올리는 현재와는 달리 당시에는 드라마와 고전에 집중했다.

“대학 생활 동안 캐릭터와 플롯이 강한 작품을 원 없이 했기 때문에 관심 분야를 넓힐 수 있던 것 같다. 배우가 한 인물에 몰입해 연기 혼을 펼칠 수 있는 작품, 드라마가 뚜렷한 작품을 모두 낡았다고 여기는 건 결코 아니다. 다만 그 분야를 이해하고 인정하면서, 깨부수고 새로운 이야기를 하고 싶은 욕구가 있다. 연극반에서 보낸 시간을 통해 나 자신이 아닌 주변의 다른 이야기들에 시선을 돌리게 되었다.”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공모하는 신작희곡페스티벌에 ‘먼지섬’(2010)이라는 작품을 써내 등단한 구자혜는 이후 국립극단에서 조연출 활동을 하며 현장을 경험하기 시작했다. ‘3월의 눈’(연출 손진책), ‘벌’(연출 김동현), ‘니 부모 얼굴이 보고 싶다’(연출 김광보), ‘칼집 속에 아버지’(연출 강량원)에 참여했다. 한 극단에 소속된 채 하나의 연출 스타일만 오랫동안 배운 것이 아닌, 여러 연출법을 경험한 걸 구자혜는 스스로 잘한 일이라 여긴다.

“조연출보로 처음 일했던 작품이 故 장민호 선생님이 출연한 ‘3월의 눈’이었다. 좋은 극장에서 부족하지 않은 예산으로 훌륭한 배우가 출연하는 작품을 수십 번씩 모니터하며 보고 있으니 내가 만든 작품이라는 착각을 하게 되더라. 결과물은 빼어나지만, 나의 연극이 아니고, 나의 언어도 아니라는 각성을 하면서 ‘여기는 당연히, 극장’이라는 작품을 썼다.”

 

자조적 태도, 단단한 언어

디스 디스토피아(2015) ©김도웅

commercial, definitely(2016) ©이강물

연극실험실 혜화동1번지(2016) ©김도웅

가해자탐구(2017) ©이강물

 

 

 

 

 

킬링타임(2017) ©김도웅

셰익스피어 소네트(2017) ©김도웅

 

 

 

 

 

 

‘여기는 당연히, 극장’(2012)을 시작으로 동명의 극단을 꾸려 ‘디스 디스토피아’(2015), ‘commercial, definitely’(2015), ‘킬링 타임’(2016), ‘윤리의 감각’(2017), ‘가해자 탐구_부록:사과문작성가이드’(2017) 등을 올렸다.

그중에서도 ‘마카다미아, 표절, 메르스 그리고 맨스플레인’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던 ‘commercial, definitely’은 이듬해 남산예술센터에서 ‘마카다미아, 검열, 사과 그리고 맨스플레인’이라는 새로운 부제로 공연되어 동아연극상 새개념연극상·두산연강예술상 공연 부문을 수상했다. 평단과 대중의 사랑을 받은 극단의 대표작이다. 문화예술계 검열사태, 땅콩회항사건 등 한국 사회를 폭로하지만, 내용과 형식 면에서 진정성이나 당위성은 찾을 수 없다. ‘있어 보이기 위해’ 불필요한 영어자막을 삽입하거나 독일의 예술감독 토마스 오스터마이어를 끌어들이는 등 한국 공연계를 향해 뻔뻔하게 도발한다.

“나에게 상업성은 관객을 많이 들여 돈을 버는 것이 아니다. 그건 애초에 불가능하다고 본다. 연극계에서 활동하다 보니 연극이 ‘힙’해질 수 있는 공식이 눈에 보이더라. 다원이나 시각예술, 무용 쪽에서 등장하는 몇 가지 클리셰를 차용해 그럴듯한 포장지로 감싼 다음 좋은 공연장에 올리면 된다. 이러한 ‘관습’에 정면 승부해 보자는 마음으로 작품을 만들었다. 연극계를 비판하면서도 그 안에서 인정받고 싶은 욕망이 뒤섞여 있다.”

구자혜와 여기는 당연히, 극장은 이 작품을 시작으로 ‘킬링 타임’ ‘윤리의 감각’ ‘가해자 탐구_부록:사과문작성가이드’까지 무대 중심에 가해자를 세우는 작업을 이어왔다. “동시대 핫한 인물을 통해 이슈를 적당히 건드리면 관심을 끌기에 좋으니” 시작한 가해자 탐구 시리즈는 특유의 감각, 피해 당사자를 결코 전시하지 않는 신중한 표현 방식으로 여기는 당연히, 극장만의 언어를 만들어냈다.

 

여기는 당연히, 극장은 현재 어떻게 운영되고 있나?

인원은 열한 명이다. 2012년에 ‘여기는 당연히, 극장’이라는 작품을 올리면서 모였던 멤버들이 다른 작업도 함께 이어가다 보니 자연스럽게 극단의 성질을 갖게 됐다. 극단이라는 선언 대신 협력체라는 설명을 덧붙이고 있는데, 운영 방식에 대해 여태껏 고민하고 있다. 여러 사람이 모인 집단에서는 권력이 발생할 수밖에 없고, 가족적인 분위기가 형성되곤 한다. 백퍼센트 민주적인 방식으로 공적인 관계만 맺는다는 건 불가능하지 않나. 어떤 형태로든 여기는 당연히, 극장이 나의 연극 활동을 발전적으로 이끄는 것은 분명하다.

‘킬링 타임’에서는 공동 창작 방식도 취했다. 작품을 완성하는 과정에서 고집스러운 연출은 아닌가 보다. 

단원들에게 들은 이야기 중 ‘구자혜는 연습실에 들어가면 작가 구자혜와 연출 구자혜가 분리된다’는 말이 가장 기분 좋았다. 극작과 연출을 겸하지만 텍스트를 쓸 때와 실제 무대를 만들어갈 때 마음가짐이 다르다. 이는 우리 단원들에 대한 신뢰에서 비롯된 것이다. 뒤에 이어질 모든 장면을 다 바꾸는 한이 있더라도 한 장면을 배우·스태프들과 끝까지 밀어 붙여보는 순간에 행복감을 느낀다. 또한 현재 진행 중인 작품을 만들면서 얻은 새로운 영감을 다음 작품에 반영할 수 있다는, 연속성이 주는 자기 발전이 내게는 매우 소중하다.

그동안 허구가 아닌 사실을 바탕으로 한 작품을 선보여 왔는데, 이 과정에서 여러 의미의 ‘두려움’이 있을 것 같다.

단원들과 연습실에서 끝까지 하는 걱정이 ‘책임질 수 있는가’ 하는 문제다. 정치적으로 올바른가, 피해 당사자를 무대에서 소비시키고 있진 않은가 늘 경계한다. 또한 아무리 연극이라도 가하는 배우, 당하는 배우가 고통스럽지 않은지 면면히 확인한다. 우리 작품이 세고 거칠다는 평가를 받지만, 사실을 결코 재현하는 일은 없다. 무언가에 빗대어 구현한다.

가장 만족도가 높은 작품은 무엇이었나?

지난 6월에 ‘셰익스피어 소네트’를 공연했는데 60분 내내 배우들이 긴장해 떨었다. 신인배우가 무대를 낯설어하는 그런 감정이 아니었다. 세월호 피해 당사자들과 연극을 통해 연대하는 게 실제로 가능한 일인가 하는 근원적 질문을 오랫동안 공유했고, 그로부터 비롯된 긴장이었던 것 같다. 외부의 평가는 잘 모르겠지만, 내부적으로는 의미가 컸다.

과거 여러 연출의 조연출을 경험하면서 체득한 것 중 현재까지 기억에 남는 일이 있는가?

故 김동현 연출이 어떤 배우에게 디렉션을 주면서 이런 말을 했다. ‘그러니까, 그런 순간이 있지 않아? 한 사람이 자신의 그림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시간.’ 당시에는 연극적이지 않은 디렉션이라는 생각만 잠시 하고 스쳐 지나갔는데… 그런 순간이 삶 속에도, 연극에도 정말 있더라. 지금까지도 종종 생각이 난다.

연출가로서 미학적으로 고려하는 부분은?

음… 없어 보이고 싶지 않다. 특히 작은 극장에 작품을 올릴 때는 가난함을 노출하지 않는 게 가장 중요하다. 가난하니까 우리의 진정성을 들어줘, 라고 말하는 작품이 되고 싶지 않다. 그러기 위해 가난함을 포장하는 그럴듯한 음악, 조명, 의상 등을 지양하고, 텍스트에 명시된 꼭 필요한 조명이나 음악을 꼭 필요한 자리에 배치시키는 전략을 취한다.

마지막으로, 앞으로 구상하고 있는 작품이 있다면.

8월 말에 혜화동1번지 가을 페스티벌에 참여한다. 작품은 미정이다. 11월에는 레이먼드 카버의 소설 ‘대성당’을 바탕으로 ‘시각장애인의 언어’라는 키워드를 풀어내 볼 생각이다.

 

‘객석’은 2017년 가을부터 2018년 여름까지 ‘오늘’의 연극을 행하는 연출가와 극단을 만났다. 성기웅&제12언어연극스튜디오를 시작으로 장우재&극단 이와삼, 이경성&크리에이티브 VaQi, 문삼화&공상집단 뚱딴지, 류주연&극단 산수유, 최진아&극단 놀땅, 부새롬&극단 달나라동백꽃, 윤한솔&극단 그린피그, 김재엽&드림플레이 테제21, 구자혜&여기는 당연히, 극장까지 ‘경험’과 ‘가능성’ 사이의 균형을 이루고 있는 총 10명의 연출가와 10개의 극단을 기록했다. 서사의 재현이라는 전통적인 연극 만들기에서 벗어나 세상을 다르게 들여다보기 위해 애쓰고 있는 젊은 창작 집단에 대한 열 번의 기록은 점점 더 많은 것들이 가능해지는 새 시대를 위해서도 유용하게 읽힐 것이다. 

 

김호경(공연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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