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대연주의 오늘을 말하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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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8년 9월 10일 12:00 오전

Part 2 한국의 당대연주가 걸어온 길, 걸어갈 길

 

당대악기 연주자 3인 대담

수백 년 전 유럽에서 연주하던 음악의 원형 그대로 21세기 한국에서 연주하는 사람들. 바로크 바이올리니스트 김지영과 쳄발리스트 김희정, 리코디스트 조진희와 함께 한국의 고음악 현장을 논했다. 당대악기 연주가 흔치 않던 1980~1990년대에 진로를 결심한 순간부터, 한국 음악계에서 어려움을 겪으며 ‘고음악 붐’을 맞이했던 때와 더불어, 한국 고음악 현장의 발전을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들어보았다.

왼쪽부터 쳄발리스트 김희정, 리코디스트 조진희, 바로크바이올리니스트 김지영

한국에서 고음악 하기, 그 낯선 시작

당대악기 연주를 시작하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아직 한국에 ‘고음악’이 익숙지 않던 시절에 공부를 시작했는데.

조진희(리코더)_ 1989년, 플루트로 대학교를 졸업한 후 29세의 늦은 나이에 리코더로 유학을 떠났다. 음반 표지에 있던 리코디스트가 오스트리아 빈에 있다고 해서 무작정 빈으로 갔다.

김희정(쳄발로)_ 원래는 피아노를 전공했는데, 어느 날 음반에서 쳄발로로 연주하는 바흐 브란덴부르크 5번을 듣고 너무 좋아서 전공을 바꾸기로 결심하고 1987년 독일 유학길에 올랐다.

김지영(바로크 바이올린)_ 원래는 모던 바이올린으로 유학을 갔다. 1996년 독일로 유학 가서 첫 학기에 앙상블에 참여했는데, 거기서 피아노 대신 쳄발로를 연주하더라. 학교에 바로크 바이올린이 있으니 한번 연주해보지 않겠냐고 권유를 받아서 시작하게 됐다. 처음에는 모던 악기를 연주할 때 바흐를 잘 이해하기 위한 도구로서 접근했는데, 점차 바로크 바이올린의 매력에 빠졌다.

공부를 마치고 귀국했을 때 힘든 점은 없었나?

김희정_ 2000년에 귀국하고서 처음 2년은 울면서 다닌 것 같다. 왜 돌아왔을까 싶었다. 10년 넘게 지났으니 환경이 나아졌을 줄 알았는데 너무 열악한 거다. 헨델 ‘메시아’ 연주를 해달라고 해서 갔더니 쳄발로 대신 신디사이저를 쳄발로 소리로 맞춰놓고 연주해달라고 해서 충격을 받은 적도 있다. 그래도 최근에는 많이 나아졌다.

김지영_ 2003년에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서 당대연주의 필요성을 알려야겠다는 사명감이 타올랐다. ‘활털을 이 책에 나온 것처럼 갈아달라’ ‘한국에 없는 건 내가 직접 해외에서 사오겠다’ 등 악기사 사람들에게 하나하나 알려주면서 해나갔다. 방학 때마다 해외 대학도서관에 가서 악보를 열심히 복사해왔다. 유럽에서 한국으로 배편으로 악보를 보냈는데 몽땅 젖어서 도착한 바람에 악보를 붙들고 울기도 했다.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그래도 2~3년 안에 한국예술종합학교 등에서 바로크 바이올린 수업을 제안 받았다. 당대연주 분야의 선배 연주자들이신 오르가니스트 곽동순·오자경, 바이올리니스트 김민 등 물리적·심리적 응원을 해준 선생님들의 도움이 컸다.

조진희_ 나 때는 복사기도 없던 시절이라 손으로 사보했다.(웃음) 습식 복사기도 쓰고 건식 복사기도 쓰고. 1994년에 귀국했는데, 리코더로 정식 음악회를 한다는 것 자체를 의아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결혼해서 아이도 있던 때라 ‘어떻게 먹고 살 거냐’는 주위의 걱정도 많았다. 완구 취급을 받던 악기였지만, 그래도 공연으로 들어보니 좋다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2002년에 한예종에서 리코더 전공을 뽑게 된 것이 한국에서 리코더 영역이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한 계기였던 것 같다.

한국에서도 당대연주의 필요성은 느끼고 있었지만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던 상황에서, 선생님들처럼 한 템포 빨리 움직이신 분들이 2000년대 초부터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것 같다. 아울러 2000년을 전후로 존 엘리엇 가디너/잉글리시 바로크 솔로이스츠, 바이올리니스트 레이첼 포저, 첼리스트 아너 빌스마 등 당대연주 연주자와 단체들이 본격적으로 내한하기 시작하며 한국에서도 본격적인 관심이 시작됐다. 당시 피부로 느낀 변화가 있었다면?

김지영_ 음반시장에서 먼저 불씨가 일어났다. 강남역 신나라레코드에 갔는데 고악기 연주단체가 연주하는 비발디 ‘사계’가 흘러나와서 반가운 마음에 음반을 집었다. 직원이 그 음반을 가리키며 ‘지금 우리나라에서 제일 잘 팔리는 음반’이라고 말해 깜짝 놀랐다. 바로크악기로 연주한 비발디 음반이 현대악기로 연주한 것보다 훨씬 잘 팔린다고 하더라. 풍월당 등에서도 고음악 애호가들이 정보를 공유하고 있었다. 2002년 즈음 한 모임에서 고음악 특강 요청을 받아서 갔는데, 이미 10~15년씩 음반을 들으며 쌓인 내공들이 어마어마했다. 내가 독일에서 바로크 음악을 공부하던 현장에서 들었던 말들이 오갔다. ‘악보 보여달라’ ‘악기소리 들려달라’는 요청이 줄을 이었다. 우리나라에서도 당대연주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다는 게 신기하더라.

음반으로만 듣던 것을 눈앞에서 실제로 마주하는 흥분이 있었던 것 같다. 2005년 서울국제바흐페스티벌과 서울국제고음악페스티벌 등이 열리면서 국내 음악가들의 당대연주가 본격적으로 활성화됐다. 조진희 선생님이 1998년 창설한 춘천리코더페스티벌도 2005년부터 춘천고음악제로 명칭을 변경했고.

조진희_ 여기 계신 김지영·김희정 두 선생님들처럼, 2000년대 초반 고음악 연주자들이 속속 모여들기 시작했다. 이참에 리코더만의 축제가 아니라 고음악 연주자들이 다 모이는 페스티벌로 발전시켜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만 해도 공공기관의 지원이 없어서 여기저기 쫓아다니며 후원기금을 얻었다. 몇 년 전부터 춘천시에서 예산이 나왔다. 고음악계의 신예 연주자들을 위한 무대를 마련하고, 여러 연주자들과 앙상블을 이루고, 당대악기 마스터 클래스를 개최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추진했다.

 

척박했던 토양에 내린 뿌리, 이제는 깊어질 시간

이러한 기세가 200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기세가 다소 꺾였다고 보는 시선도 있다. 한국고음악협회도 2002년 발족했지만 현재는 활동이 미비하다.

김희정_ 2000년대 초는 다방면으로 폭발적이었다. 뉴페이스들이 대거 등장했고, 서울대·연세대·한예종·한양대 등 고음악에 관심 있는 학교들도 열정적으로 움직였다. 한양대 강해근 교수님이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바이올리니스트 김진 선생님도 고음악페스티벌 첫해에 자비를 털어가며 애를 쓰셨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이 결실을 맺으려면 개인의 힘만으로는 역부족이다. 기획사·연주자·학교 등 다방면의 협력이 필요하다. 당대연주를 좋아하는 청중도 공연이 꾸준하게 공급되지 않으면 마음이 식기 마련이다.

김지영_ 다르게 생각하면, 그때는 몰랐던 것에 대한 호기심이 충족되니까 사람들이 열광했고, 그에 따른 논란과 이슈가 일어나기도 했던 것 같다. 지금은 마치 그런 열정이 수그러든 것처럼 보이지만, 한편으로는 당대연주가 이제는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존재가 된 것이라고 본다. 환경과 개념이 한 차례 정리된 것이다.

과거에는 흔치 않았던 것들이 이제는 익숙해진 것인가? 윌리엄 크리스티/레자르 플로리상, 르네 야콥스/프라이부르크 바로크 오케스트라, 파비오 비온디/에우로파 갈란테 등 당대연주 관련 내한공연이 과거에는 희소했지만 이제는 자연스럽게 꾸준히 열리는 것처럼?

김지영_ 그렇다고 생각한다. 초반에는 안 하던 걸 하기 위해 투쟁이 필요했다. 예컨대 합창음악계에서 공연 관련 예산을 신청할 때 ‘왜 일반 교향악단이 아니라 당대연주 전문단체를 따로 써야 하나’ 하는 질문이 많았고, 학교에서는 ‘기존 바로크 음악 수업이 있는데 왜 바로크 바이올린 수업이 따로 있어야 하나, 어차피 똑같이 바흐를 가르치는 것 아니냐’며 필요성에 공감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다. 공연장에서는 ‘고음악 연주단체는 온·습도 조절이나 음향을 가지고 까다롭게 군다’며 불편해하기도 했다. 이들을 치열하게 설득해야 했다. 기존에 없던 것을 ‘있어야 한다’고 요구하는 과정이었다. 지금은 합창음악계에서 너무나도 당연하게 바로크 곡을 바로크 스타일로 연주해야 한다는 관념이 자리 잡았다. 당대연주 관련 수업도 주요 음대들에 여러 개 개설됐다. 처음에 생소하고 귀했던 것이 이제는 당연해진 것이다. 열정적인 시간을 거치면서 안정화되고 자연스러워졌다.

연주자로서 체감하는 현장의 온도는 어떠한가?

김희정_ 제자들과 학부모들이 쳄발로 전공을 시작할 때 항상 묻는 질문이 있다. ‘졸업하면 뭐 하나요?’ ‘이걸로 먹고 살 수 있나요?’하고 묻는다. 여기에 난 이렇게 대답한다. ‘교수 자리를 원한다면 할 말은 없지만, 제가 지금 연주자로 너무나 바쁘게 살고 있는데 앞으로는 훨씬 더 나아지지 않을까요’라고. 일본과 비교하면 좀 부족하겠지만, 그래도 활동 무대가 결코 적지는 않다.

김지영_ 카메라타 안티콰 서울을 2005년 창단해 현재까지 활동하고 있는데, 과거에 비해 바로크 음악 전문 연주단체의 필요성이 확실히 자리 잡았다. 당대연주 전문단체의 기량과 개성, 경쟁력을 인정받은 것이다. 바로크 레퍼토리를 바로크 전문단체가 연주해야 한다는 인식이 이제는 안착했고, 바로크 악기를 쓰든 현대악기를 쓰든 ‘당대연주 스타일을 공부한 전문가들이 연주하는 것이 가지는 의미’를 이제는 현장에서 많이 인식하고 있다.

말씀하신 대로, 당대악기로 연주하는 것만으로 ‘고음악을 연주한다’고는 할 수 없는 시대다. 어떤 해석과 어떤 스타일로 연주하느냐가 중요해지면서 더욱 세밀하고 세련된 접근이 필요하다.

김희정_ 피아노의 경우, 바흐를 연주할 때 그냥 바흐를 피아노적으로 접근하는 것과 옛 이론을 알고 연주하는 것은 완전히 다르다. 많은 연주자들이 바흐를 연주할 때 무작정 스타카토나 논 레가토로 연주했던 때가 있었다. ‘바흐는 페달 없이 연주하는 것’이라는 인식 아래 말도 안 되는 터치로 연주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론 공부를 통해 ‘어떻게 왜’를 알고 연주하는 것이 중요하다.

김지영_ 지금 해외 콩쿠르와 연주 현장에서는 무슨 악기로 연주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스타일’로 연주하느냐에 집중한다. 거트현으로 어필하는 건 아주 초기였고, 지금은 시대에 따른 완벽한 고증을 하고 있는 시대다. 연주자의 역량과 개성이 거기에 합쳐져서 더 업그레이드된 연주를 선보이고 있다.

 

한국 당대연주의 미래를 위해 필요한 것들

고음악 연주를 위해서는 공연장 환경도 중요할 것 같은데.

김희정_ 공연장에 기본적으로 있어야 하는 악기들도 중요한데, 주요 공연장들에서 아직까지 부족한 점들이 많다. 그랜드 피아노처럼 쳄발로의 종류와 상태도 신경써주면 좋겠다. 몇 가지 기본적인 악기들만 마련해줘도 훨씬 자유롭고 다양한 연주를 할 수 있다.

김지영_ 고음악에 적합한 음향을 가진 공연장도 늘어야 한다. 예술의전당 콘서트홀과 IBK챔버홀, 롯데콘서트홀, 금호아트홀 등 좋은 공연장들도 있지만 대관료를 감당하기 쉽지 않다. 규모가 작아도 편안하게 연주할 수 있고, 청중도 부담 없이 찾을 수 있는 홀들이 많아지면 좋겠다.

같은 동아시아 국가이지만 일본의 고음악은 상당한 수준으로 발전해 있다. 스즈키 마사아키와 바흐 콜레기움 재팬 같은 연주자와 연주단체는 일본을 넘어 서구에서도 그 실력을 인정받는다. 도쿄예술대학 음악학부 기악과에는 고음악 전공이 독립적으로 존재할 정도다.

김지영_ 일본은 유럽에서 당대연주 운동이 시작될 때 그 흐름을 곧바로 받아들였다. 거의 같이 시작해 동시간대로 발전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김희정_ 우리는 아직도 공부할 때 원서를 번역해야 하는데, 일본은 자국어 문헌들이 나와 있어서 외국어를 몰라도 고음악을 공부할 수 있다. 유학도 많이 안 간다. 페스티벌이나 콩쿠르도, 고음악을 위한 공연장도 많이 발전되어 있다.

조진희_ 바로크뿐 아니라 그보다 더 이전인 15~16세기 르네상스 시대의 음악을 하는 팀들도 있다. 당대연주를 위한 악기 제작도 굉장히 빨리 시작했다. 1910년대 촬영된 사진을 봤는데, 기모노를 입은 여자가 목관 리코더를 들고 찍었더라. 쳄발로도 이미 50년 전부터 제작하고 있었다고 알고 있다. 유럽 고음악 현장과의 시차가 거의 없다. 하지만 연주 역량을 놓고 보면 한국 연주자들이 절대 뒤지지 않는다. 시스템과 지원이 잘 갖춰지면 일본은 금방 따라잡을 거다.

김지영_ 유학가지 않아도 고음악을 공부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부러운지 모른다. 이미 모던 악기에서는 소위 ‘토종’ 연주자들이 국제 콩쿠르에서 우승하고 있지 않나. 당대연주 분야에서도 한국에서 공부한 학생이 국제 콩쿠르에서 우승할 수 있을 정도의 시스템이 갖춰지길 바란다.

우리나라에는 현재 한예종 음악원 기악과 산하에 하프시코드와 리코더 등의 악기 전공이 소속되어 있는데.

조진희_ 우리나라에 학부에 고음악 악기 전공이 적극적으로 개설된 곳이 한예종 말고 또 있나?

김지영·김희정_ 학부에는 없다고 알고 있다.

조진희_ 당대연주를 위한 대학교육 시스템이 아직 부족하다. 많은 당대악기 연주자들이 유학을 마치고 국내로 들어와 있는데, 이들이 나서서 가르칠 수 있는 환경은 아직 무르익지 않았다. 부분적으로 개설되는 수업을 넘어, 대학교 학부 과정에 고음악 전공이 활성화되길 바란다.

김지영_ 미국도 사실 고음악 영역에서는 후발주자인데, 현재 이 분야의 인재를 끌어오기 위해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 당대연주 전공생들에게 전액장학금을 주는 학교들이 줄리어드를 포함해 늘어나는 추세다. 많은 분야가 그렇겠지만, 특히 고음악에서는 재정적 지원이 굉장히 중요하다. 악기 마련을 위해 드는 비용이 엄청나다. 각 시대의 양식과 기준에 맞는 악기들을 그때그때 구비해야 하기 때문이다. 현대 악기는 기준 음고가 ‘A음=440Hz’로 통일되어 있지만, 고전시대 음악은 A음이 430Hz이고 바로크시대 음악은 415Hz 전후로 연주된다. 그렇기 때문에 각 음고별로 악기를 구비해야만 연주가 가능하다. 외국 단체들은 국가나 기업에서 재정을 지원 받아서 필요한 악기들을 보유한다. 덕분에 현재 해외 고음악계는 프란츠 리스트 등 초기 낭만시대까지도 당대악기를 사용하는 추세다. 우리나라는 아직까지 연주단체에 소속한 개인이 개별적으로 악기를 마련해야 하는 상황이다. 음악회를 수십 번 해도 악기값을 벌기 어렵다.(웃음)

조진희_ 이상적인 이야기일수도 있겠지만, 각 시·도 예술단이나 문화재단에 현대악기 단체뿐 아니라 고음악 연주단체도 생기면 당대연주가 정말 크게 활성화될 것이다.

김지영_ 맞다. 당대연주를 해외에서 공부하고 들어오는 학생들도 계속해서 늘고 있는데, 안정적인 직장을 잡을 수 있다면 연주자들도 동기부여가 되어 더 열심히 할 거다. 우리 세대가 터전을 잘 닦아놓아야 다음 세대 연주자들이 한국에서 더 활발하게 활동할 수 있을 것 같다.

 

이야기는 과거·현재·미래의 시간을 씨줄 삼아, 교육·인식·환경 등의 요소들이 날줄로 교차했다. 좌담에 함께한 세 명 모두 때로는 공감을, 때로는 탄식을 주고받으며 대화를 이어나갔다. 한국 당대연주의 활성화를 위해 각자의 자리에서 더욱 노력하겠다는 다짐을 끝으로 이날의 대담을 마무리했다.

이정은 기자 사진 심규태(HAR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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