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니 토드: 어느 잔혹한 이발사 이야기’

인생은 나에게 친절하지 않았지

우수 컨텐츠 잡지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8년 9월 17일 12:01 오전

MOVIE
영화

깨진 거울 조각은 그 자신이 반영하는 것뿐 아니라 반영하지 않는 파편 때문에 표현력이 강해지는 법이다. 팀 버튼은 지금까지 깨진 거울을 들이밀고 관객들에게 자신의 모습을 살펴보라고 말해왔다. 깨진 거울의 표면에 흥행 감독으로서의 그의 대중적 인기가 있다면, 그사이 갈라진 틈새로 비집고 나오는 그의 이야기는 분명 다른 것을 말하고 있다. 그것은 어린 시절 우연히 들여다본 만화경에서 떠오르는 이미지처럼 선명하면서 아득하게 깊고 몽환적이다. 이죽거리는 미소를 걷어낸 조니 뎁이 복수에 불타는 스위니 토드가 되었다. 잔혹한 고어적 화면에 낄낄거리는 장난과 기묘하게 비틀린 유머를 섞었던 ‘슬리피 할로우’ 이후 가장 잔혹한 영화다.

 

뮤지컬과 영화 ‘스위니 토드’

영화 ‘스위니 토드: 어느 잔혹한 이발사 이야기’의 원작인 스티븐 손드하임의 뮤지컬은 화려한 볼거리와 낙천적인 이야기로 대중들의 인기를 끌었던 브로드웨이 뮤지컬계에 나타난 변종이었다. 19세기 런던을 배경으로 이발사 스위니 토드의 핏빛 복수를 그린, 어둡고 잔인한 뮤지컬이었다. 무대에 선혈이 낭자하게 뿌려지는 모습은 당시 관객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지만, 그 작품성을 인정받아 1979년 초연 당시 토니상 8개 부문을 휩쓸었다. 손드하임은 각각의 스코어가 이어지는 이전의 뮤지컬과 달리 공연 전체가 하나의 교향곡처럼 보이게 만들어 노래와 대사의 통일성을 높였다. 팀 버튼의 영화가 개봉한 2007년에 한국 초연되었다.

그로테스크하지만 어쩐지 섬뜩한 아름다움을 간직한 이 작품에 매료된 워너브라더스는 1990년대에 판권을 구매했지만 제작에 난항을 겪다가, 팀 버튼이 준비하던 영화와 조니 뎁이 준비하던 영화가 무산되면서 두 사람에게 기회가 돌아갔다. 까다롭기로 유명한 원작자 손드하임도 두 콤비의 만남을 기뻐하며, 세 시간이 넘는 원작의 분량을 두 시간으로 삭제하는 것까지 기꺼이 동의했다고 한다.

알려진 것처럼 ‘스위니 토드’는 복수의 이야기다. 70% 이상이 노래로 진행되는 뮤지컬과 달리, 팀 버튼은 노래를 많이 줄이고 영화를 무성 흑백영화처럼 만들어낸다. 마치 흑백필름에 색을 입힌 것처럼 흐리고 희미한 화면은 음울함을 더한다. 그래서 스위니 토드가 면도칼을 휘두를 때 화면을 가득 채우는 핏빛을 더욱 강렬한 원색으로 부각한다. 조니 뎁이 남성으로서 팀 버튼의 페르소나의 역할을 했다면, 헬레나 본햄 카터는 기묘하게 비틀린 여성성 혹은 모성의 페르소나로 그 역할을 해 왔다. 헬레나 본햄 카터는 스위니 토드에게 살해당한 사람들로 만든 파이를 파는 러빗 부인이 되었다. 그녀의 등장으로 ‘스위니 토드’는 잿빛이지만 묘한 감정의 기운이 오가는 짝사랑 로맨스가 된다.

 

 

삶은 진창이라는 선언

팀 버튼의 다른 작품들처럼 ‘스위니 토드’ 역시 가해자와 피해자, 복수와 배반이 이어지는 순환의 연결고리에서 선악의 경계와 빛과 그림자의 경계가 모호하게 그려진다. 마치 배트맨이 온전한 영웅이 아닌 것처럼, 복수심에 불타는 스위니 토드는 연쇄살인자지만 앞서 슬픔에 빠진 가장이다. 악인에 대한 복수를 하지만 그는 영웅이 될 수 없다. 익명의 사람들을 향해 칼날을 휘두르는 무자비한 복수를 하는 동안, 그는 순진한 피해자의 자격을 잃는다. 팀 버튼은 이 모호한 경계 속으로 관객을 끌어오면서, 예술영화와 상업영화 사이의 경계에 대한 질문도 이끌어 낸다.

‘스위니 토드’에는 잠시 러빗 부인이 꿈꾸는 장면이 등장한다. 자신과 스위니, 그리고 고아가 하나의 가족이 되어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상상이다. 하지만 혈연으로 엮이지 않은 유사 가족의 이야기는 또 다른 낙관적 전망을 품지 않는다. 살인자와 조력자, 순진하지 않은 소년의 결합은 희망이 아니다. ‘처연하지만 홀로 살아남기 힘든 사람들이 마주 잡은 손끝에선 결국 피비린내가 나는 법’이란 염세주의가 영화의 전반을 뒤덮고 있다.

앞서 팀 버튼 영화 속 인물들이 죽음을 통해 새롭게 태어난 유령 혹은 영웅, 또는 불멸의 악당인 것과 달리 ‘스위니 토드’의 스위니는 이미 죽은 것과 다름이 아닌, 지옥에 가도 상관이 없다는, 살았어도 이미 죽은 유령 같은 인물이다. 팀 버튼은 색을 날려버린 영상 속에 유독 도드라지는 피의 이미지를 통해 삶보다는 죽음을 더욱 부각한다. ‘스위니 토드’ 속을 가득 채우는 피는 무겁고 눅진하다. 고독에 빠진 소년에게 조금은 나은 삶이 있을 거라는 미약한 희망의 끝자락을 보여주는 법 없이, 깃털처럼 가벼운 희망의 끝을 점액질 가득한 피의 바닥에 담가 날아갈 수 없게 만드는 것 같다.

팀 버튼이 ‘스위니 토드’는 철저한 상업영화라고 선언했던 것과 달리, 이 영화는 그다지 상업적이지 않다. 풍자는 있지만 유머가 줄었고, 염세적이지만 캐릭터에는 동정할 여지도 감정이입을 할 여유도 없다. 오히려 그가 블록버스터 속에 작가주의 영화에 대한 욕심을 묘하게 숨겨왔던 것과 달리, 대놓고 자신의 염세적 관점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세월이 흘렀고, 한 아이의 아비가 되고서야 깨달은 또 다른 인생의 무게, 그리고 그 무게만큼이나 예술가로서 살아야 하는 존재론적 고민을 이제는 꾸미거나 숨기지 않는 법을 터득한 것처럼 보인다.

영화 속 스위니 토드는 살인을 통해 복수를 완성하고자 하지만, 산업혁명 시절 빈곤계층 사람들의 눅진거리는 삶, 사회에서 소외된 인물들이 살아가는 삶 자체가 죽음에 가까운 삶이라는 것을 역설한다. 앞서 배트맨이 추함과 자연스러움을 추방했던 시민사회의 미학을 옹호하고 이를 통해 비합리성을 은폐하는 자본주의의 옹호자라 한다면, 스위니 토드처럼 악당도 아니고 영웅도 아닌 인물을 통해 팀 버튼이 보여주고 싶은 것은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의 모순이다. ‘스위니 토드’ 속 공간은 과거 시민사회 혹은 현재 자본주의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는 사회이며, 복수는 성공하지 못했다. 이는 마치 꿈꾸던 미래를 담은 동화의 세계에서, 치열하고 잔인한 현실의 세상으로 마침 발을 디뎠는데, 그곳이 진창이라 두 발이 꽉 묶인 것처럼 보인다.

※ 칼럼의 제목은 ‘스위니 토드’의 대사 ‘인생은 네게 친절했겠지’를 응용하였습니다.

글 최재훈(영화평론가)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졸업. 국립오페라단 공연기획팀장을 거쳐 서울문화재단에서 근무하고 있다. 37회 영평상 신인평론상 수상 후 각종 매체에 영화·문화예술 관련 칼럼니스트로 활동 중이다.

Leave a reply

Back to site top
Translat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