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너드 번스타인의 오페레타 ‘캔디드’

탄생 100주년을 맞은 번스타인은 그 자신이 곧 캉디드였고, 곧 볼테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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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8년 10월 9일 11:50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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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너드 번스타인 ©Allan Warren

레너드 번스타인(1918~1990)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그의 작품이 세계 방방곡곡에서 연주되고 있다. 국내에서는 서울시향이 오페레타 ‘캔디드’를 무대에 올려 번스타인에 대한 갈증을 해소시킬 예정이다.

 

거침없는 정치적 행보를 보인 번스타인

20세기 최고의 지휘자 중 한 사람으로 추앙받는 번스타인은 젊은 시절부터 유럽 출신 거장들의 전폭적인 지지에 힘입어 스포트라이트를 받았으며, (자신은 항상 부족하다고 생각했지만) 작곡가로서도 성공하여 큰 명성을 얻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을 음악에만 묶어두지 않았다. 2차 세계대전 직후 수용소 생존자 오케스트라 연주회에 나치 출신 음악가들의 참석을 독려하고, 1960년대 말~1970년대 초에 활동했던 극좌 흑인무장운동단체 ‘흑표범당’을 위해 음악회를 열었으며, 베트남 전쟁을 공개적으로 반대하고, 독일이 통일되자 베를린으로 달려가 동서 독일인이 함께 만든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등, 그의 정치적 활동은 끊이지 않았다.

이러한 행보는 이보다 이른 1950년대에도 있었다. 현대판 마녀사냥이라고 불리는 매카시즘의 광풍 속에서 미국 공산당과의 관계를 의심받았던 것이다. 번스타인은 공산당 가입을 부인하여 블랙리스트에 오르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FBI의 사찰 대상에 포함되어 있었다. 냉전이 첨예했던 당시 FBI의 사찰은 극심해서, 찰리 채플린은 1953년에 미국에 모든 것을 버려두고 스위스로 영구이주를 했을 정도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번스타인이 볼테르의 ‘캉디드’를 음악으로 만들자는 릴리안 허먼의 제안에 응한 것은 실로 과감한 결정이었다. 허먼은 브로드웨이에서 이름을 날리던 희곡작가였지만, 1930년대 말에 잠시 공산당에 가입한 전력이 있었던 요주의 인물이었다. 당국에 정면 대응하겠다는 제스처였을까? 아니면 단지 작품이 매력적이었기 때문이었을까? 어찌됐든, 감시와 제재 하에서 정치적 활동을 했던 번스타인은 ‘캉디드’와 볼테르에 강한 공감을 느꼈을 것이다.

 

볼테르, 행동하는 지식인

볼테르

“이탈리아에는 르네상스가 있었고 독일에는 종교개혁이 있었다면, 프랑스에는 볼테르가 있다.” 빅토르 위고의 이 문장은 볼테르가 인문주의자이자 개혁가이며, 합리주의자이자 행동하는 지식인이었음을 말해준다. 당시의 관점에서 다소 반항아적이라고 받아들여졌을 이러한 면모는 어린 시절부터 나타났다. 예수회 학교에서 공부할 때부터 문학에 비상한 재주를 보였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종교적 규율을 지키기보다는 깨뜨리는 데에 더 관심이 많은 악동이었다. 넘치는 지식으로 조리 있게 사회 체제를 비판하는 데에 거침이 없었던 그는 곧 유명인사가 되었다.

하지만 봉건체제에서 이러한 일은 받아들여질 수 없었다. 루이 14세가 세상을 떠나 섭정 중이었던 오를레앙 공이 왕이 되려고 한다는 글이 떠돌자, 단지 저자로 의심된다는 이유로 볼테르는 바스티유 감옥에 수감되었다. 이뿐이 아니었다. 귀족과 말다툼을 하다 하인들로부터 몰매를 맞자 귀족에게 결투를 신청한 일로 그는 재차 수감되고 말았다. 이러한 부당한 사건들은 볼테르에게 ‘이성적 사고’와 ‘관용’이라는 사상을 갖게 했다. 망명지 런던에서 뉴턴의 이성적인 과학과 합리적인 사고를 경험한 그는 자신의 생각에 더욱 강한 확신을 가졌다.

볼테르는 이렇게 계몽주의 사상가이자 행동하는 지식인이 되었다. 프랑스에 돌아온 이후에도 프랑스를 영국과 비교하여 비판하는 글을 출판했고, 프러시아의 프리드리히 2세의 초청을 받아 지내면서도 왕이 아닌 국민에 의한 개혁을 주장했다. 의혹만으로 사람을 처형한 ‘장 칼라스 사건’이 벌어지자 사회운동을 주도하여 억울한 누명을 벗기는 데 성공하기도 했다. 이외에도 수없이 벌어진 봉건체제와 종교재판의 일상화된 무자비함과 비합리성에 분노하며 파리로 돌아왔다. 당시 그의 나이는 83세로, 약 1년 후에 그는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위트와 통찰이 담긴 볼테르의 ‘캉디드’

‘캉디드’ 영어번역본(1762)의 권두삽화

볼테르가 지닌 사상이 그와 같은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데에는 천재적인 글 솜씨가 탄탄한 바탕이 되었다. 바스티유 감옥에 처음 수감되었을 때 쓴 희곡 ‘오이디푸스’를 출감 후 발표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는데, 이때 그는 ‘프랑수아 마리 아루에’라는 본명을 버리고 ‘볼테르’라는 필명을 사용했다. 이후 그는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어 큰 부를 누렸다. ‘장 칼라스 사건’에 힘을 쓸 수 있었던 것도 그의 명성뿐만 아니라 그가 내놓은 자금이 적지 않은 몫을 했다. 볼테르는 문학작품뿐만 아니라 철학·역사·과학 등 여러 분야의 책을 썼으며, 당시 지식인들 사이에 요즘의 아이돌 스타 못지않은 굉장한 인기를 얻었다. 볼테르의 가장 유명한 저서는 프러시아에서 나와 스위스에 체류했던 시절에 쓴 ‘캉디드(Candide, 1759)’였다. ‘순진하다’는 뜻의 이름을 가진 주인공 캉디드가 겪는 모험 이야기로, 볼테르는 당시 실제 있었던 사건들과 그가 겪었던 일들을 위트와 유머를 가미하여 엮었다. 악하고 부조리한 일들이 가득함에도, 그의 유쾌하고 뛰어난 필력은 매 순간 웃음을 짓게 했다. 이 책은 본래 “랄프 박사의 독일어를 번역”했다고 적혀있지만, 당시 사람들은 저자가 볼테르임을 단번에 알아보았다(볼테르가 금서 지정을 피하기 위해 사용한 필명이 160개쯤 된다).

캉디드는 독일 서부 베스트팔렌에 있는 툰더-텐-트롱크 남작의 집에서 자란다. 그는 이곳에서 남작의 자녀들과 함께 팡글로스 선생으로부터 교육을 받는다. 팡글로스는 ‘가능한 최선의 상태에 있는 세상에서 모든 것이 최선의 상태에 있다’는, 라이프니츠의 낙관론을 본뜬 듯한 낙관주의적 사고를 가르친다. 하지만 캉디드가 겪는 사건은 최악의 연속일 뿐이다. 남작의 딸인 퀴네공드를 좋아한다는 이유로 쫓겨나고, 밥 한 번 잘못 얻어먹어 불가리아 군대에 들어가며, 칼을 맞기도 한다. 대지진으로 황폐해진 리스본에서 낙관주의를 설파했다가 종교재판소에서 태형을 당하지만 판사를 죽이고 예수회 신부를 칼로 찌른다. 장난치는 원숭이를 공격으로 오인하여 죽이기도 한다. 그는 뭘 해도 사기를 당하고 일이 꼬이기만 한다.

그만이 고통을 당하는 것은 아니다. 퀴네공드는 전쟁 중에 부모를 잃고 집은 소실되며, 마지막엔 노예가 되어 추하게 변한다. 팡글로스는 리스본에서 사형을 언도받지만 탈출하고, 그 역시 노예 생활을 한다. 그리고 캉디드가 수리남에서 만난 흑인 노예는 오른팔과 왼쪽 다리가 잘려있다. 오른팔은 사고로, 다리는 도망치다 붙잡혔기 때문이다. 인생은 고통의 연속인 것일까? 비관주의자 마르탱이 등장하지만, 정작 캉디드는 비관론을 말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낙관주의가 옳은 것일까? 마지막에 여전히 낙관론을 설파하는 팡글로스의 말을 막아서는걸 보면 이것도 아닌 것 같다. 그러고는 캉디드는 “우리의 정원을 일궈야 한다”고 말한다. 세상이 부조리하더라도 이를 극복하는 방법은 자신의 삶에 충실하는 것임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 관용을 베푸는 창조자 아래서 모두의 삶이 가치가 있다는 볼테르의 신념이 캉디드의 이 마지막 문장에 함축되어있다.

 

볼테르의 지성을 음악으로 담아낸 번스타인의 ‘캔디드’

번스타인 ‘캔디드(캉디드의 영어 발음)’의 내레이션을 쓴 존 웰스는 번스타인에게 ‘캔디드’를 좋아하는 이유를 물었다. 번스타인은 여러 이유 중 볼테르의 지성이 빛나는 것이 가장 큰 이유라고 답했다. 그러고는 ‘세상은 가능한 최선의 상태에 있다’는 것을 매일 아침 ‘뉴욕타임스’지를 통해 배웠다고 덧붙였다. 번스타인이 정치적 활동을 한 진정한 이유는, 캉디드의 세상과 다를 바가 없는 오늘날의 세상에서 불관용에 의한 부당한 희생자들을 위로하고 모두가 관용의 마음으로 화해하는 볼테르의 이상을 실현하는 것이었다. 번스타인은 자신이 볼테르가 되어 이것을 ‘캔디드’에서 말하고자 했던 것이다.

허먼으로부터 제안받은 지 3년 후인 1956년, ‘캔디드’는 뮤지컬로서 브로드웨이에서 초연되었다. 결과는 대실패였다. 원작이 유명한 고전이라지만 셰익스피어만큼 친숙하지 않고, 위트와 유머가 가득하다지만 20세기 중반의 뉴요커가 쉽게 공감할 내용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래도 가능성은 있었다. 1973년에 휴 휠러의 책을 기반으로 해럴드 프린스가 만든 새로운 프로덕션은 매우 성공적이었다. 하지만 번스타인은 여전히 만족하지 못했다. 그는 처음부터 풍자적인 고전에는 오락적 특성이 강한 뮤지컬보다는 오페레타가 적합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볼테르의 원전을 최대한 살리고 싶었다. 이후 번스타인은 수차례 수정을 거쳐 1989년에 오페레타 최종판을 완성하고 스코틀랜드 오페라단에 의해 무대에 올리고 나서야 드디어 만족할 수 있었다. 그리고 1년 후 눈을 감았다.

글 송주호(음악 칼럼니스트) 사진 서울시향

 

번스타인 오페레타 ‘캔디드’

10월 12일 오후 8시, 13일 오후 5시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티에리 피셔(지휘)/서울시향/조나단 존슨(캔디드 역)/로렌 스누퍼(퀴네공드 역)/마이클 리(내레이터)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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