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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8년 10월 15일 9:00 오전

1920년, 야나기 가네코의 경성 방문과 음악회 풍경

 

동아일보 1920년 5월 1일자

1920년, 서양식 관람예절이 자리 잡지 못한 조선의 음악회장은 시끄러웠다.

신문은 ‘음악회에서 광태를 짓는 형제들에게’라는 기사를 발표하기도 했다.

 

1920년, 조선의 수도 경성은 일본의 성악가 야나기 가네코(류경자(柳兼子), 1892~1984)의 방문 공연으로 떠들썩했다. 1920년 4월 30일자 동아일보에는 야나기 가네코의 사진과 함께 동아일보사 주최의 독창회 광고가 실렸다. 이후 동아일보에는 5월 23일까지 야나기 가네코와 그의 남편 야나기 무네요시(류종열(柳宗悅), 1889~1961)의 경성 방문과 공연소식, 곡목 해설 등의 다양한 소개가 이어졌다. 야나기 가네코는 도쿄 출신으로 1910년에 도쿄음악학교 성악과를 졸업 후 1914년에 야나기 무네요시와 결혼했고, 1928년 독일에 유학하여 베를린에서 리사이틀을 개최하기도 했다.

공연이 열린 때는 5월 4일 오후 7시, 경성 종로에 위치한 중앙기독교청년회관이었다.

음악회의 총책임자는 시인 남궁벽(1895~1921)이었고, 동아일보 기자인 염상섭(1897~1963)이 개회사 후 야나기 무네요시와 가네코 부부를 소개했다. 수용인원이 1300명인 회관에 사람들이 몰려 공연은 예정 시간이었던 7시에서 한 시간 늦은 오후 8시에 시작되었다. 피아노 반주는 공연을 위해 입국한 도쿄음악학교 출신 피아니스트 신원직이 맡았다.

공연은 1부와 2부로 구성되었다. 독창회였지만 중간에 피아노 독주도 포함되었다. 1부는 토마의 오페라 ‘미뇽’ 중 ‘그대는 아는가, 저 남쪽 나라를’ ‘불쌍한 아가, 너에게 무슨 일이 있는 거냐’, 슈베르트의 가곡 ‘저녁노을에’ ‘죽음과 소녀’ ‘봄의 신앙’, 신원직의 피아노 독주, 마이어베어의 오페라 ‘예언자’ 중의 ‘아아, 내 아이야’ ‘은혜를 베푸소서’를 선보였다. 2부는 베버의 오페라 ‘마탄의 사수’, 베르디 ‘일 트로바토레’의 아리아를 부른 뒤, 슈만, 차이콥스키, 슈트라우스의 가곡과 신원직의 피아노 독주가 이어졌고, 비제의 오페라 ‘카르멘’ 중 ‘하바네라’로 마무리를 지었다.

 

조선의 예술을 살리기 위한 일본인의 서양음악회

오늘날 이 공연이 ‘최초의 서양음악회’로 기록되고 회자되는 이유는 레퍼토리가 모두 클래식음악으로 선곡되었기 때문이다. 그해 12월 19일에 베토벤 탄생 150주년을 기념하는 음악회가 경성공회당에 있었는데 1부와 2부로 진행된 이 음악회는 베토벤의 피아노·바이올린 독주곡, 가곡 등으로 구성되었다. 하지만 제목과 달리 차이콥스키, 글룩, 로시니, 베르디의 작품들이 그 사이를 메웠다. 공연도 여러 성악가와 연주자들이 출연했기에 가능했을 정도로 당시 조선의 서양음악문화는 지반이 약했다. 그런 점에서 한 명의 독창자가 1부와 2부를 책임지며 유럽 오페라와 가곡을 선사한 야나기 가네코의 공연은 똑같은 서양예술 수입국이던 일본과 조선의 간극을 보여준 사례였다. 이후 이 ‘간극’은 향후 조선이 일본을 끊임없이 따라가게 되는 자의적·타의적 원동력이 되었다.

경성의 서양식 공연장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공간이었지만, 누구나 갈 수 있는 곳도 아니었다. 고가의 입장료를 지불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 공연의 일등석은 2원, 이등석은 1원 오십전, 삼등석은 1원. 당시 1원은 금 0.5돈의 값어치를 했다. 입장권은 독창회가 열리기 전에 청년회관 현관에서 구입가능했지만 매진이 우려될 정도였다.

무엇보다 이 공연이 이슈가 된 것은 야나기 무네요시 덕분이었다. 야나기는 동아일보가 창간되던 1920년에 ‘조선인을 상(想)함’이라는 글을 6회에 걸쳐 연재했다. 식민지인 조선의 예술에 담긴 아름다움을 칭송한 일본인 야나기 무네요시에 대한 조선 엘리트 청년들의 관심은 다대했다. 동아일보(1920년 5월 1일자)는 야나기 부부를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일전부터 본보에 ‘조선인을 생각하노라’는 글과 ‘조선의 벗에게 주는 글’이라는 논문을 게재하다가 혹은 발매금지를 당하고 혹은 게재중지를 당한 일본 동양대학 교수 류종열(柳宗悅) 씨의 부부가 이번에 유람차로 조선에 도래하여 사일 하오 칠시에 종로중앙청년회에서 본사 주최로 동씨의 부인 류겸자(柳兼子) 씨의 대독창연주회(大獨唱演奏會)를 개최함은 이미 사고(社告)한 바 같거니와 그 부인은 방년이 이십 팔세의 재용이 겸전한 동경음악계의 명성이라 부인이 동경상야 공원 안에 있는 음악학교를 졸업한 후 금 십년 동안의 분투는 오늘 부인이 음악가로 어떠한 지위를 점하고 있는가를 보면 알지니 실로 부인의 ‘앨토’는 적어도 동양 음악계의 일대 권위라 해도 결코 과한 말이 아니라 할지며 또 그 양인되는 종열 씨는 동경제국대학 철학과를 마친 후 동양대학에서 종교학을 가르치는 청년 철학가로 일본사상계의 중심인물 중의 한 사람이라 하겠으니 씨가 특히 조선을 사랑하고 조선 민족의 슬픈 운명에 대하여 깊은 동정을 가지게 됨은 조선의 옛 예술(古藝術) 더구나 그 미술을 열정으로 사고하는 동시에 그 예술에 나타난 조선 사람의 온화한 성징과 예술적 천재가 많은 민족임을 깨닫고 장래에 적어도 정신적으로는 세계와 인류를 위하여 위대한 사업을 할 민족이라는 큰 기대를 가진 까닭이라 그리함으로 이번에 자기 부인과 같이 거액의 로비를 자당하고 멀리와사 조선의 예술계를 위하여 다대히 노력할 뿐이니라. 장래에는 조선에 와서 살며 철학 문학 미술 음악 종교 등 방면에 일생을 바치겠다는 희망이 있다는데 (…)’

 

1920년 5월 4일 중앙기독교청년회관에서의 공연을 기점으로, 17일까지 총 6회의 음악회가 열렸다. 이 가운데 숙명여학교에서 개최된 가네코의 음악회에는 후에 조선최고의 무용가가 되는 최승희(1911~1969)도 참석해 가네코의 음악에 깊이 감동했다고 한다. 도쿄에서 현대무용가 이시이 바쿠(石井漠)의 무용발표회를 관람한 것이 계기가 되어 무용계에 입문한 그녀는 이시이의 문하에서 일본 각지로 공연을 다닐 때, 야나기 가네코를 찾아가기도 했다. 가네코와 최승희는 오랫동안 친분을 쌓았다. 야나기 가네코는 이후에도 1934년까지 8회에 걸친 조선방문을 통해 총 22회의 공연을 조선 각지에서 개최했다.

 

음악이 들리지 않는 음악회

이듬해에 민태원(1894~1935)은 ‘음악회’라는 제목의 단편소설을 발표한다. 이 소설은 1920년에 야나기 무네요시와 가네코 부부의 초청을 주관했던 동인지 ‘폐허’ 2호에 게재되었다. 내용은 1년 전 야나기 가네코의 독창회를 그리고 있는데, 당시의 음악회장을 이루는 관객의 풍경을 만날 수 있는 미시사적 자료로서의 가치를 지녔다.

당시 음악회는 개인의 고급한 취향을 계발할 수 있는 특별한 공간이었다. 소설 ‘음악회’는 이러한 음악회를 “도처에서 이야깃거리가 되었으며 경성의 유식계급 그 중에서도 청년 사회에서 다대한 호기심과 반가운 맘을 가지고 기다리는” 것으로 적고 있다. 그렇다면 1920년대, 경성에 방문한 일본 소프라노를 맞이한 음악회의 풍경은 어떠했을까? 음악회에 다녀온 여주인공 하경자와 심숙정이 나누는 대화의 일부다.

 

경자의 침방(寢房)에 마주 앉은 두 사람은 역시 음악회 이야기를 하였다. 심숙정은 먼저 입을 열어서

심 “어떻든지 잘하기는 잘하지”

하 “잘 하고말고. 첫째 목소리가 어쩌면 그렇게 큰가”

심 “글쎄 말이야 여자의 성량으로는 썩 굉장한 성량이야”

하 “일본서도 제일이라는 걸” 심 “그만하면 그렇고말고”

하 “그런데 오늘 저녁에는 너무들 떠들어서 하는 사람도 자미 (滋味)가 적었을 터이야”

심 “애 참 왜 그리들 떠드는지 좀 조용히 있었으면 좋겠더고만.”

하 “아직 정도들이 유치하고 음악의 취미를 모르니까 그렇지”

심 “그런데 좀 조용히 하여달라고 그 말을 이르러 나왔던 사람이 누구야”

(···)

하 “글세 머리 길은 것하고 음악학교에 다니는 사람이 아닐까 그렇지 않으면 미술학교나”

(···)

심 “외양으로 보기에도 무슨 자신을 가진 사람 같아···”

 

이 소설을 통해 두 개의 사실을 유추할 수 있다.

첫 번째는 음악회장의 관객들이 “너무들 떠들어서” 무대 위의 음악가도 “자미(재미)가 적었을” 것이라는 점. 이는 곧 침묵을 수반하는 예의범절의 관람 태도가 자리 잡히지 않은 당대의 현실을 보여준다.

두 번째는 “정도들이 유치하고 음악의 취미를 모르니까 그렇지”라는 말에서처럼 ‘취미’라는 단어의 등장이다. 지금이야 ‘취미’라는 말이 평범하게 사용하지만, 당시에는 일본에서 건너온 신조어 중 하나였다. 자신의 취향과 가치관을 드러내는 이 용어의 사용이 유행하면서 당시 예술품과 작품 감상, 운동 등의 근대적 문화를 소비하는 유행이 돌았다.

어쨌든 경성의 고급음악회는 앞서 살펴보았듯 입장료가 고가였고, 그래서 아무나 볼 수 없었다. 또한 당시 유입되기 시작한 서양음악에 대한 ‘취미’가 없는 이라면 더더욱 관람하기 힘든 공연이었다.

당시 식민지 조선의 경성에는 음악문화를 둘러싼 문화들이 부분적으로 수입되고 있었다. 공연장이 지어졌고, 유학을 떠난 이들이 귀국해 여러 작곡가와 작품을 선보였다. 공연이 성행하자 연주자로서의 무대 매너도 갖추어 나갔다. 하지만 관객의 입장은 좀 달랐다. 음악 문화가 부분적으로만 수용되던 당시에, 음악은 수용되고 있었지만 관람하는 매너와 태도는 아니었던 것이다.

조용하고 예의범절을 수반한 감상태도와 문화는 본거지인 서양에서도 자리 잡는 데에 오랜 시간이 걸렸다. 예를 들어 1784년 독일작곡가 라이하르트(1752~1814)가 주재한 연주회에서는 청중에게 가사를 인쇄한 목록을 배포했는데, 그렇게 하지 않으면 성악곡을 들을 때 “손님들이 하도 시끄러워서 가사 대부분을 들을 수 없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또한 같은 해에 에르푸르트에서의 연주회 기록을 보면 맥주와 담배가 용인되었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은 기분 전환을 위해 카드놀이를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즉, 음악은 심혈을 기울여 감상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성립되지 않았던 것이다.

 

연주자가 고함치지 말라고 하자, 관객은 나갔다

1920년대에 경성의 공연장과 음악회가 점차 성행하자 관람문화에 대한 지적 기사도 많이 나왔다. 기사거리로도 단골이 되었다. ‘어린 아기가 빽빽하고 울 때에 ‘아이고 요 녀석아!’하고 엉덩이를 찰싹찰싹 때리는 부인네’(동아일보 1926년 9월 26일자)가 있었는가 하면, 러시아 슬라비안스카야의 합창단 공연을 알리는 기사에서 주최측인 동아일보는 곡이 끝나면 박수를 치는 것과 금연까지 요구하기도 했다. 하지만 후속 기사를 보면 ‘담배를 피우는 사람이 많았고 소리 지르는 사람까지 있었다’고 한다(동아일보 1927년 9월 23·25일자).

당시 조선 최고의 피아니스트였던 김영환(1893~1978)은 ‘아무 이유도 없이 고함을 벽력 치듯 하고 마루를 구르며 (…) 사회자나 연주자에게 욕설’(동아일보 1928년 3월 7일자)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며 공연 관람의 예의범절을 호소하기도 했다. 서울대 음대 교수를 역임한 이혜구(1909~2010)의 구술집 ‘만당음악편력’에도 이와 비슷한 사례가 나온다. 중앙기독교청년회관에서 열린 음악회에서 김영환은 연주전에 피아노 건반을 앞에 두고 묵념을 하듯 감정과 자세를 가다듬고 있었다. 그런데 2층 객석에서 빨리 연주를 시작하라고 재촉했다. 이에 김영환은 객석을 노려보았고 청중은 노려본다며 고함을 쳤다. 화가 난 김영환은 연주를 하지 않은 채 퇴장했고 청중들은 입장료를 환불해 달라 소리쳤다. 김영환은 이날의 수치감 때문에 이후 음악회에 거의 출연하지 않았다.

관객석이 떠들썩했던 또 다른 이유 중 하나는 음악회장이 남녀학생이 만나는 연애의 장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가부장적 질서가 뿌리내린 사회에서 여성들이 외출한다는 것은 종래의 질서를 거부하는 불온한 행위로 치부되어 곱지 않은 시선을 감내해야 했다. 하지만 근대화한 거리 위의 젊은 여성으로서 유일하게 인정받을 수 있는 존재는 배움에 뜻을 둔 여학생뿐이었다. 특히, 1920년대는 여학생들이 공론의 장에 등장하여 근대 문화의 아이콘으로 자리 잡기 시작한 때이다. 사람들의 시선은 온통 새롭게 거리에 출현한 여학생들에게로 향했다. 새로운 외양으로 공적 공간에 진입한 여학생들은 학교뿐만 아니라 음악회와 강연회, 극장 그리고 산책길에서 누구와도 자유롭게 마주치는 근대적 주체, 곧 신여성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있는 곳은 음악회를 비롯하여 연애의 장으로 이용되기도 했다.

현진건의 소설 ‘까막잡기’(1924)를 보면, 전문학교에 다니는 상춘은 학수에게 여학교 주최로 열리는 청년회관 춘기 대음악회에 가기를 권한다. 하지만 학수는 음악을 모르니 가지 않겠다고 하고, 상춘은 학수에게 하이칼라 여학생은 다 올 것이니 여학생 구경이라도 하자고 한다. 당시의 음악회가 시끄러울 수밖에 없었던 이유 중 하나였다. 송현민(음악평론가)

 

‘음악회에서 광태를 짓는 형제들에게’

(동아일보 1928년 3월 7일)

요사이 빈번히 개최되는 음악적 집회에는 의식이 있는 사람으로는 차마 볼 수 없는 해괴망측한 광태를 지어내는 일부청중을 흔히 볼 수 있다. 아무 이유도 없이 고함을 벼락치듯하고 마루를 구르며, 심한 자는 사회자나 연주자에게 욕설을 방송하는 것을 음악회에서는 예사로 아는 듯싶다. 이게 무슨 만행이며 부끄러운 일이냐! 자기의 인권을 유린하고 생존까지도 위협하는 자를 만날 때에는 찍 소리 한마디를 변변히 못하는 그들이 극도의 정숙을 요구하는 이런 집회석에서는 어떻게 그렇게 용맹스럽고 다변인지 알 수가 없다.

형제들이여. 그대들은 연주자나 청중 가운데는 외국인이 있다는 것을 왜 생각지 못하는가. 우리는 타국인과 다른 처지에 있다는 것을 항상 기억하자. 우리가 그런 행동을 하지 않을지라도 우리가 외인(外人)에게 주는 인상이란 그리 시원치 못한 것인데 하물며 그들의 목전에서 연출되는 이와 같은 만행이랴! 이런 일을 하는 형제들아, 외인이 우리더러 “○국인”이라고 욕을 할 때 내밀만한 깨끗한 주먹이 그대들에게도 있는가.

예의지국 민족이란 것을 자랑할 줄 아는 형제들아. 왜 그리 무례하고 경박한가? 절대의 침묵을 요구하는 음악연주 시에도 조금만 무엇이 이상하면 격정폭소(擊掌爆笑)하며 조금만 무엇이 비위에 틀리면 질성노호(疾聲怒呼)를 연발한다. 우리는 감각이 있고 입이 있는 동물인 동시에 의식과 예의가 있는 사람이니 감각되는 대로 함부로 반응하며 외래의 구속이 없다고 무제한의 행동을 한다면 사람인 특징을 어디서 찾겠는가? 형제들아, 우리들은 동물 중에도 사람이오, 사람 중에도 조선사람인 것을 잊지 말자, 언제든지!

형제들아. 우리의 집회는 우리의 삶의 표징(表徵)인 동시에 우리는 이 표징까지도 마음대로 볼 수가 없는 것이다. 세계의 조선인의 집회처럼 귀한 것이 없으리라. 이렇듯 귀한 것을 좀 더 의미있고 좀 더 효과있게 가질 수 없는가. 무슨 심사로 요것까지 망치려고 들며 요것까지 망치려고 들며 요것까지 이용하여 외인에게 수치를 공개하려고 서두는가. (박경호 1898~1979, 피아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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