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올리니스트 피에르 아모얄 Pierre Amoyal

음악을 경외하는 마음에서 위대한 음악가가 탄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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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8년 12월 17일 9:00 오전

The Great Mentor_9 클래식 음악계를 뜨겁게 달군 젊은 음악가들의 스승을 만나다  이미라 기자

©Cedric Widmer 2011 couleur

지난 9월, 루마니아 부쿠레슈티는 젊은 연주자들의 열기로 가득했다. 동유럽권에서 가장 큰 규모로 개최되는 조르지 에네스쿠 페스티벌과 그 일환으로 진행되는 콩쿠르가 함께 열린 것. 세계 각국의 젊은 음악가들에게 더 넓은 무대로의 발판이 되고 있는 조르지 에네스쿠 콩쿠르는 루마니아 출생의 작곡가 겸 바이올리니스트인 조르지 에네스쿠를 기념하기 위해 1958년에 시작되었다. 그리고 올해, 바로 이 콩쿠르의 바이올린 부문에 명교수 시리즈의 아홉 번째 주인공, 바이올리니스트 피에르 아모얄(1949~)이 심사위원장으로 참석했다. 열다섯의 나이에 조르지 에네스쿠 콩쿠르 무대에 올라 우승까지 거머쥐었던 그가 이번에는 심사위원장의 자리에 선 것이다. 그는 결선 무대를 앞두고 한 인터뷰에서 콩쿠르에서 수상할 젊은 음악가들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이번에 참 운이 좋았군요! 만약 다른 날, 다른 레퍼토리로, 다른 심사위원 앞이었다면 어떤 결과가 나왔을지는 모르겠지만.”

프랑스 파리의 한 의사 집안에서 태어난 피에르 아모얄은 12세에 파리 음악원을 1등으로 졸업하는 등 어린 나이부터 뛰어난 음악성을 보였다. 그로부터 5년 뒤인 1966년, 전설적인 바이올리니스트 야샤 하이페츠에게 재능을 인정받으며 미국 로스앤젤레스로 간 그는 하이페츠와 함께 5년간 공부하며 첼리스트 그레고르 퍄티고르스키 등 스승을 포함한 세계적인 음악가들과 함께 많은 연주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이후 다시 파리로 돌아온 아모얄은 게오르그 솔티가 지휘하는 파리 오케스트라와 협연하며 유럽 무대에 데뷔했다. 이 연주를 시작으로 1985년, 미국 카네기홀에서 성공적인 리사이틀 데뷔를 치른 그는 유럽의 주요 악단은 물론 전 세계를 오가며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오자와 세이지, 피에르 불레즈, 로린 마젤, 사이먼 래틀, 정명훈 등의 거장 지휘자들과 함께 무대에 올랐다.

교육자의 길에 서다

교육자로서 피에르 아모얄의 명성은 파리 음악원에 최연소 교수(1977~1986)로 초빙되며 시작되었다. 스승이자 바이올린계의 전설인 하이페츠의 가르침을 비롯해 자신이 가진 것을 더 많은 이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그는 파리 음악원을 시작으로 스위스 로잔 음악원을 거쳐 현재 잘츠부르크 모차르테움 음악원에서 후학을 양성하고 있다. 이 외에도 로잔 여름 음악학교를 설립하고, 전 세계에서 모인 14명의 젊은 연주자들과 함께 카메라타 로잔(Camerata de Lausanne) 앙상블을 창단하는 등 다양한 형태로 젊은 음악가들과 만남을 이어가고 있다.

 

가장 먼저, 당신의 교육철학에 대해 듣고 싶다. 내가 배우고 가진 것을 가능한 한 많이 전해주는 것이다. 내 스승인 야사 하이페츠로부터 일일이 다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귀중한 것들을 받았다. 그래서 이런 귀중한 정보들을 재능 음악가들과 나누는 것에 더 큰 책임감을 느끼고 있다.

파리 음악원에 최연소 교수로 발탁된 것을 시작으로 로잔 음악원을 거쳐, 현재는 모차르테움에서 후학을 양성하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피아니스트 파벨 길리로브(Pavel Gililov)와 함께 스위스에 아카데미를 설립하는 등 여러 곳에서 교육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데, 이처럼 교육에 열정을 갖게 된 이유가 무엇인가? 교육에 대한 열정은 하이페츠와 함께 공부한 이후부터 생겨났다. 하이페츠 앞에서 생상스 론도 카프리치오를 연주한 적이 있었는데, 그 앞에서 이 곡을 연주하는 일은 내게 매우 중요했다. 그의 연주만큼 이 작품을 잘 나타내고 훌륭하게 소화하는 연주는 들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연주를 마치자 하이페츠가 나를 보며 “난 이 연주가 마음에 들지 않네. 하지만 어느 음 하나도 바꾸지 않기를 바라네. 그럼 성공할 수 있을 걸세”라고 말했다. 그의 말은 아주 현명했다. 그리고 이 순간, 나도 그와 같은 방식으로 교육에 임하기로 결심했다.

모차르테움에 재직하며 수많은 학생을 만나보았을 것 같다. 유학생의 경우, 유럽에서는 특히 어린 학생들을 선호하는 편이라 들었는데. 때로는 12세 정도의 어린 나이에도 쉽게 배우는 학생이 있다. 또, 서른 살이 되었다 해도 아직 늦은 나이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배우는 것에는 너무 이른 것도 너무 늦은 것도 없다. 다시 말해 시기가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한국 학생들도 많이 만나왔을 것 같다. 일반적으로 한국 학생에게서는 어떤 인상을 받았나? 최근에도 양정윤을 비롯한 한국 학생들을 가르쳤다. 많은 한국 학생들과 함께할 수 있어 기쁘다. 이런 말이 있다. ‘일본 음악가들은 재능있고 순종적이지만 때때로 조금 차갑고 감정 표현이 충분하지 않다. 중국인들 또한 재능있고 표현력도 풍부하지만 체계적이진 않다. 한국인은 딱 그 중간이다. 다시 말해 완벽하다.’ 조금 단순한 말처럼 보이지만, 아닐 이유는 없지 않나? 여기에 대해 충분한 확신을 가질 수 있도록 기다리고 있다.

학생들에게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이 있다면? 너무 많아서 일일이 열거하려면 책 한 권으로도 모자랄 것 같다.

그렇다면 반대로 학생에게 가장 많이 하는 질문은 무엇인가? 엄마에게 아직도 얼마나 영향을 받고 있는가?

얼마 전 조르지 에네스쿠 콩쿠르의 심사위원장으로 참가하기도 했다. 어린 시절 우승을 안겨주었던 콩쿠르에 심사위원으로 참가한 것 또한 의미 있었을 것 같은데, 이런 콩쿠르에 대한 당신의 생각이 궁금하다. 내 스승인 하이페츠는 콩쿠르를 반대했었다. 그는 콩쿠르가 음악적 자질을 높여주지는 않는다고 생각했다. 이런 경쟁은 스포츠나 과학에 더 어울린다고 말했다. 나도 하이페츠와 같이 콩쿠르가 반드시 더 좋은 음악을 만들어준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콩쿠르가 어린 학생들에게 더 열심히 연습할 수 있도록 하는 동기부여가 된다는 점에서는 중요하다 볼 수 있다. 또한 콩쿠르를 통해 새로운 곡을 배우고, 오케스트라와 연주하고, 새로운 나라와 문화, 그리고 무대를 경험하며 다양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는 점에 있어서도 긍정적이다. 때로는 콩쿠르 결과에 실망하기도 하지만, 다양한 배경을 지닌 심사위원과 참가자가 모인 자리이기 때문에 그 결과가 반드시 옳다고 볼 수도 없다.

내 최고의 제자 중 하나인 안드레이 바라노프(Andrey Baranov)는 2012년에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서 우승했다. 그가 여기에 이르기까지는 무려 33번의 도전이 있었다. 만약 그가 32번째에서 멈췄다면, 아마 그의 커리어가 지금과 같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Foto Paolo Battaglia – montebellofestival 2009

두 가지 길에서 바라본 음악

연주자로서 가장 기억에 남는 무대는 무엇이었나? 내가 가장 좋아하는 레퍼토리 중 하나인 알반 베르크 바이올린 협주곡을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과 함께 연주한 것.

음악가로서의 터닝 포인트는 언제였는지. 바이올린에 손을 올리고 5분이 지난 순간부터가 내 터닝 포인트다.

자신에게 잘 맞는 좋은 악기를 찾는 것이 연주자에게 매우 중요한 일 중 하나일 텐데. 좋은 악기를 찾아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신의 악기가 아닌 다른 사람의 악기를 연주하는 것은 될 수 있으면 피해야 한다.

지금 사용하고 있는 악기에 여러 사연이 담겨있다고 들었다. 현재 1717년산 스트라디바리우스 ‘코찬스키(Kochanski)’로 연주하고 있다. 세계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바이올린이라고 생각할 만큼 아주 훌륭하다. 이 바이올린은 내가 두 번이나 구입한 악기다. 처음 구입한 후 1987년에 한번 도난당했는데, 4년 후인 1991년에 이탈리아에서 극적으로 되찾을 수 있었다.

연주자이자 교육자로서 두 가지를 병행하며 가졌던 가장 큰 고민은 무엇인가? 모든 연주가 도전이다. 새로운 레퍼토리와 새로운 파트너, 새로운 음향 등. 그래서 연주자들은 저마다의 꿈에 도달하기 위한 방법을 찾아야 하고, 거의 불가능한 일일지라도 자신이 찾는 완벽함에 다가가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리고 그에 따른 결과에 대한 책임감도 지닐 수 있어야 한다. 가르치는 것은 이보다 더 복잡하다. 모든 상황을 완벽하게 통제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지식과 문화, 취향은 전달할 수 있지만, 재능은 전해줄 수 없다. 또한 가족의 습관이나 결정을 바꿀 수 없으므로 우리의 행동영역이 어떻게든 제한된다.

저마다 다른 교육방법으로 제자들을 키우고 있다. 그렇다면 무엇이 당신의 교육을 특별하게 만드는가? 음악은 삶의 모든 부분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이 둘을 분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나는 제자들과 함께 인간이 느끼는 모든 감정의 측면에 대해 자주 논의하고 토론한다.

앞으로 클래식 음악의 미래는 어떨 것으로 생각하는가?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질문이다. 이미 하이페츠는 1970년대에 앞으로 음악계에 진출한 많은 젊은 음악가들이 음악이 지닌 아름다움에 감사하며 깊이 있는 음악을 나타내기보다 자신을 드러내기 위한 수단으로 음악을 사용할 것을 걱정했다. 지금 이 시대는 겉으로 보이는 이미지가 안의 내용보다 더 중요시되는 것 같다. 물론 무대 위에서 보이는 모습도 분명 필요한 부분이지만, 베토벤과 모차르트, 차이콥스키와 같은 음악이 없다면 아무 의미가 없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음악가로서의 길을 걸어갈 젊은 음악가들에게 해주고 싶은 조언이 있다면.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이 연주하는 음악에 깊은 존경심을 갖는 것이다. 당신이 아무리 좋은 테크닉과 열정, 성공을 향한 열망을 가지고 있더라도 바흐와 모차르트, 그리고 멘델스존 앞에서는 작은 존재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음악 앞에서 항상 겸손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훌륭한 음악가의 연주에서는 첫 음에서부터 그 음악과 작곡가에 대한 존경과 겸손함을 느낄 수 있다. 내가 하이페츠와 공부를 마쳤을 때, 그가 내게 해준 말이 있다. “자신이 원하는 자리에 가기까지 얼마나 오래 걸리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곳에서 얼마나 오래 머물 수 있느냐가 중요하다.” 그는 자신이 하는 음악에 대한 존경심, 진실함, 그리고 열정, 이 세 가지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결국 재능과 인격이 위대한 음악가를 만든다고 생각한다.

양정윤이 전하는 나의 스승, 피에르 아모얄

첫만남 잘츠부르크 여름 아카데미에서 처음 뵈었는데, 그 때 선생님께서 이듬해 스위스의 로잔에서 개최할 예정이던 브루노 카니노와의 듀오 캠프에 초청해주셨다. 그것을 인연으로 모차르테움에서도 배우게 되었다. 특별한 추억 바흐부터 현대곡까지, 모든 수업이 기억에 남는다. 선생님의 레슨은 냉정하면서도 이성적이다. 말씀을 하실 때 가장 정확한 표현을 하기 위해 어휘에 신경을 쓰셨고, 학생이 조금이라도 잘못된 방향으로 준비해오는 것에 대해 대단히 엄격하셨다. 그래서 제자들도 정말 열심히 연습했고, 선생님이 해외나 콩쿠르 심사에 가실 때를 제외하고는 크리스마스·부활절·여름 방학에도 쉬지 않았다. 해를 더해갈 수록 선생님께 더욱 심도 있게 배울 수 있었고, 서로 이해하고 교감하는 속도가 빨라질수록 한마디 한마디가 더욱 와 닿았다. 리피처 콩쿠르에서 우승을 했을 당시 선생님을 제일 먼저 찾아갔는데, 너무 좋아해 주시며 모차르테움에도 소식을 전해주셔서, 바로 독주회로 연결될 수 있었다. 독주회를 마치고 선생님께서 예쁜 목걸이를 선물해주셔서 깜짝 놀랐던 기억이 난다. 기억에 남은 가르침 홀 연습이 기억에 남는다. 귀의 앞부분을 가리고 홀에서 울리는 소리를 들어보게 하셨는데, 앞으로도 잊지 못할 것 같다. 선생님께 모차르트를 정말 긴 시간동안 많이 혼나면서 배웠는데, 모차르테움 오케스트라 악장시험에서 파이널까지 올라갔을 때와 리피처 콩쿠르에서 모차르트로 호평을 들었을 때, 선생님께 너무나 감사했다. 내가 기억하는 스승의 모습 선생님은 제자들의 행복을 바라는 분이다. 좋은 음악과 취향을 늘 제자들과 함께 공유하신다. 아무리 혹독한 지도를 받고 때때로 매정한 말을 들었어도 선생님께 배웠던 4년의 시간이 아름답게 기억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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