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객석’ 기자들이 꼽은화제의 무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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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8년 12월 31일 12:00 오전

REVIEW

쾌하게 휘몰아친 춤
마르쿠스 슈텐츠/서울시향 연주회
(협연 안드레아스 오텐자머)
2018년 12월 14·15일 | 롯데콘서트홀

서울시향이 수석객원지휘자 마르쿠스 슈텐츠와 함께 12월을 맞아 선보인 공연은 춤의 향연이었다. 춤을 기반으로 한 작품들을 프로그래밍하여 한 편의 휘황한 파티를 펼쳤다. 슈텐츠가 수석객원지휘를 하는 또 다른 악단인 미국 볼티모어 심포니의 악장 조너선 카니가 이번 공연의 객원악장을 맡아 남다른 호흡을 자랑했다.  흥겨운 무대의 포문을 여는 첫 곡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교향시 ‘틸 오일렌슈피겔의 유쾌한 장난’이었다. 슈텐츠가 선보이는 특유의 속도감은 유속이 빠른 강물을 연상케 했다. 서울시향의 장기인 풍성하고 일체감 있는 현악기군의 사운드가 에너제틱하면서도 세련되게 흘렀다.
이번 공연의 협연자인 클라리네티스트 안드레아스 오텐자머는 짧은 두 작품을 나란히 선보였다. 슈타미츠 클라리넷 협주곡 7번은 트릴과 스케일 등 클라리넷의 쉼 없는 기교가 요구되는 곡인데, 오텐자머는 테크닉과 유머를 버무리며 고전적 우아함을 한껏 드러냈다. 루토스와프스키의 ‘클라리넷과 챔버 오케스트라를 위한 댄스 전주곡’은 한국 초연으로, 오텐자머 본인도 피아노와 연주해본 경험만 있었고 오케스트라와는 처음 연주하는 기회였다고 한다. 5개 악장이 총 10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는 짧은 곡이지만 폴란드 민속춤을 기반으로 한 리듬이 인상적이었다.
오케스트라의 ‘춤판’은 2부에서도 계속됐다. 2부의 첫 곡은 버르토크의 ‘춤 모음곡’으로, 버르토크 특유의 쿵쿵거리는 투박한 리듬과 독특한 강세가 강렬하게 표현됐다. 슈텐츠는 거의 춤을 추듯이 머리와 몸을 흔들며 악단을 지휘했다.
마지막 곡인 라벨의 ‘볼레로’는 대중적으로는 유명하지만 연주가 까다로워, 막상 실연으로는 자주 만나기 어려운 작품이다. 스네어 드럼이 곡의 처음부터 끝까지 일정한 리듬을 연주하는 가운데, 관악기가 한 대씩 돌아가며 조용하게 주제 선율을 연주하며 점층적으로 쌓아올리는 것이 이 곡의 묘미다.
곡의 시작부터 중반까지 슈텐츠와 서울시향은 아주 조심스럽게 악상을 다져나갔다. 피치카토로 리듬을 잡아가던 현악기군이 중반 이후로 활을 잡고 주선율을 함께 연주하면서부터는 본격적인 관능의 소용돌이가 시작됐다. 계속해서 적극적인 사운드를 요구하는 슈텐츠의 모습은 사뭇 도발적이라고까지 느껴졌다. ‘볼레로’는 화려한 폭발을 향해 점점 더 달려갔고, 현·관·타악기가 총동원돼 포효하며 격정의 춤은 막을 내렸다.  이정은

 

예술을 함께 하는 여정
김대진 피아노 독주회
2018년 11월 25일 오후 5시 |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음악사에 등장하는 작곡가 중 연주자들이나 감상자들에게 가장 친근한 음악가는 단연 베토벤일 것이다. 그는 모차르트처럼 어린 시절 신동이었던 것도 아니었고 바흐처럼 경건한 신앙인으로서의 삶을 살았던 사람도 아니었으며 쇼팽의 모성애를 자극하는 매력과 리스트의 화려한 인기와도 무관했던 무뚝뚝하고 투박한, 때로는 강박증에 시달리기도 하고 말년에는 귀까지 안 들려 고통받던, 지극히 인간적인 음악가였다.  그런데도 그의 음악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우리의 마음을 세차게 두드리는 것은 무슨 이유 때문일까?
피아니스트 김대진은 그 이유에 대한 대답을 이번 연주로 또렷이 들려주었다. 그의 음악 인생은 베토벤과 아주 인연이 깊었다. 그는 인터뷰에서 돌아보니 스스로 인생의 새로운 장을 열거나 남겨야 할 때 언제나 베토벤 음악이 함께 있었다고 고백한 바 있다. 베토벤이 고통과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그것을 초월해 구원과 평화, 사랑의 메시지를 담아냈던 후기 소나타들은 이날 김대진의 손끝에서 진실한 감동을 전하며 마음을 울렸다. 감성과 지성이 조화를 이루고 다이내믹함과 부드러움이 하나를 이루었던 이날 연주는 뛰어난 테크닉과 연륜만으로 다다르기 힘든 고뇌에 찬, 한 음악가의 초상이 엿보여 마음 한켠이 뭉클했다. 베토벤 후기 피아노 소나타는 도전만으로는 이루기 힘든, 결이 깊고 넓은 음악이다. 그것은 베토벤 자신이 직접 겪은 인간적인 고통과 음악가로서의 사명, 인간으로서의 구원에 대한 갈망이 담긴 처절한 고백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아름다움에 대한 갈망은 우리가 추구해야 할 가치가 무엇인지 생각하게 한다.  피아니스트 김대진은 인터미션 없이 각 작품의 메시지를 자신의 모든 것을 담은 뜨거운 에너지로 하나의 이야기 속에 담아냈다. 30번에서의 자유로운 상상력, 31번에서의 강한 의지, 32번에서의 고요한 평화까지, 베토벤이 토해낸 이 고귀한 음악을 또다시 뜨거운 불길에서 담금질해 피아노 선율로 담아내는 그 엄청난 열정. 그리고 그 음악을 온몸으로 집중해서 듣고 있는 청중. 마지막 한 음이 긴 여운을 남기며 사라질 때 모두는 어느덧 하나가 되었다. 이 삶의 넓은 바다에서 변하지 않는 가치를 찾고 표현하고 들으며 서로가 서로의 상처를 껴안는 모습. 이 과정이야말로 우리가 그토록 찾고 있는 ‘예술’의 진짜 모습이 아닐까. 국지연

 

나의 이야기에 당신을 초대합니다 
국립현대무용단 ‘댄서 하우스’
2018년 12월 7~9일 |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

©목진우

강렬한 감정은 반드시 강한 자극을 통해서만 느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아주 작은 것에서도 나타날 수 있으며 아주 서서히 느껴지기도 한다. 김주원과 서일영, 안남근이 이번 ‘댄서 하우스’를 통해 전한 강렬함은 바로 이런 것이었다. 국립현대무용단의 레퍼토리 공연인 ‘댄서 하우스’는 춤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고, 현대무용 관객의 확대에 기여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하지만 그 안에 담긴 내용은 지극히 개인적이다. 무용수들이 자신이 살아온 지극히 개인적인 삶의 이야기를 무대에서 진솔하게 풀어내고, 그 이야기를 공유한 관객들은 그것이 마치 자신의 삶인 양 빠져든다. 발레리나 김주원과 스트리트 댄서 서일영, 현대무용수 안남근이 참여한 이번 ‘댄서 하우스’는 무대 안팎의 치열한 움직임과 교차하는 조건들 사이에 무용수가 홀로 감당해야만 하는 고독에 집중하고 있었다.
김주원은 시작부터 숨 막히는 아름다움을 선사했다. 달빛처럼 은은하게 내리는 조명과 뿌옇게 흩어지는 연기, 그 사이로 비치는 섬세한 움직임은 환상적인 이미지를 만들어 냈다.
김주원은 무용수를 줄곧 ‘달’에 비유했다. 태양이 있어야 보이는 달처럼, 무용수도 안무가 있어야 빛난다고. 그녀는 이번 공연을 위해 현대 무용수 최수진과 발레리나 김세연, 이정윤(국립무용단 전 수석무용수)을 불러 모았고, 이 세 명의 무용수가 ‘달과 김주원’을 모티브로 만든 안무는 그녀를 통해 새롭게 탄생했다. 그리고 각기 다른 장르의 안무는 배우 임수정의 내레이션과 함께 하나로 연결됐다.
서일영의 무대에는 날 것에서 느껴지는 독특한 매력이 있었다. ‘춤’과의 첫 만남에서부터 시작된 그의 이야기는 마침내 ‘나는 춤이다’라는 문장으로 귀결되었다. 그의 안과 밖, 그리고 주변까지 서일영을 구성하는 모든 것이 춤으로 설명되었다. 마지막으로 안남근은 멈춰있지 않고, 끊임없이 변신하고 변환되고 변주하는 자신의 몸에 대해 이야기했다. 편안하고 자유롭게 무대를 활주하며 자신을 드러내다 지드래곤의 ‘삐딱하게’를 부르며 예상치 못한 마무리를 선사한 안남근. “영원한 건 절대 없다”며 “오늘 밤은 삐딱하게!”를 외치던 그의 다음이 무척이나 궁금해진다.  이미라

 

영웅의 이야기만을 기대하는 것은 아니다 
뮤지컬 ‘엘리자벳’
2018년 11월 17일~2월 10일|블루스퀘어 인터파크홀

역사적인 인물을 그린 극은 예상 가능하다는 점에서 식상하기 쉽다. 오스트리아 제국의 가장 아름다웠던 황후 엘리자벳의 비극적인 삶을 다룬 뮤지컬 ‘엘리자벳’은 독특한 주변 캐릭터들을 등장시키며 극을 뻔하지 않게 만드는 데 성공했다. 가장 큰 역할을 한 건 엘리자벳 주변을 맴돌며 그녀를 죽음으로 이끌려는, ‘죽음’이다. ‘죽음’이 등장할 때마다 흘러나오는 몽환적인 멜로디와 그를 비추는 음울한 조명은 추상적인 관념을 효과적으로 인격화했다. ‘죽음’ 역의 배우 박형식은 보다 성숙한 발성을 선보였고, 엘리자벳을 유혹하는 손길을 매혹적인 안무로 표현했다. 그를 따르는 ‘죽음의 천사들’의 검은 날갯짓 또한 판타지적 요소를 더했다. 엘리자벳의 일대기를 시대상과 결부시켜 설명하는 해설자이자 그녀를 죽인 인물이기도 한 루케니 역시 작품 안팎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신선함을 입혔다. 극한의 고음과 광기 어린 연기가 필요한 역할을 배우 박강현은 마치 자신의 옷을 입은 듯 소화했다.
엘리자벳을 연기한 배우 신영숙은 순진무구한 시씨(엘리자벳의 아명)에서부터 무너져 내리는 엘리자벳을 뛰어난 가창력과 연기력으로 표현했다. 아쉬웠던 것은 넘버 ‘나는 나만의 것’ ‘내가 춤추고 싶을 때’를 열창하며 자신의 삶은 스스로 결정하겠다는 주체적인 엘리자벳을 극 중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웠다는 점이다. 그녀는 자신이 선택한 삶을 책임지지 못하고 회피할 뿐 아니라 부적응자가 되어 곳곳을 떠돈다. ‘죽음’이 처음 말을 걸어왔을 때부터 평생 그의 영향력 아래에서 벗어나지 못하기도 한다. 넘버를 통해 치솟은 에너지가 연기적으로도 발산되었더라면 더욱 강인한 엘리자벳을 만날 수 있지 않았을까.
너무도 쉽게 꺾여버리는 엘리자벳의 감정선을 따라가기가 쉽지는 않지만, 자유로운 영혼을 가졌던 그녀가 혼란스러운 현실에서 시들어가는 모습은 동정심을 자아냈다. ‘죽음’에게 저항하려는 엘리자벳의 모습은 자신과 힘겨운 사투를 벌이고 있는 우리 모두를 대변하는 듯했다. 특히 많은 넘버와 등장 신도 없는 ‘죽음’으로 인해 엘리자벳과 황태자 루돌프, 그리고 루케니까지 죽음에 이르고야 마는 설정은 극의 완성도를 높였다. 몽환적인 분위기에 녹아든 화려한 음악 또한 귀를 즐겁게 했다. 권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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