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너 이용훈

신을 향한 노래, 인간을 향한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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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9년 1월 21일 9:00 오전

COVER STORY

‘나부코’ ©Marty Sohl/Metropolitan Opera

홍혜경과 조수미로 대변되던 한국 대표 성악가의 계보에 이용훈이라는 인물이 등장하면서부터 그 지형은 크게 달라졌다. 많은 오페라 극장은 그를 자신들의 무대에 세우고 싶어 한다. 실제 이용훈은 1년 중 10개월가량을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를 비롯한 런던 코벤트 가든 로열 오페라·빈 국립 오페라·뮌헨 바바리안 국립 오페라·밀라노 라 스칼라 오페라·시카고 리릭 오페라·베를린 도이치 오페라·함부르크 국립 오페라·파리 바스티유 오페라 등 그야말로 전 세계의 주요 극장에서 노래하고 있다. 이미 확정된 스케줄만 하더라도 2023년까지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제작 일정이 짧은 한국에서는 그가 출연하는 오페라를 만나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는 개인 홈페이지나 소셜 미디어 계정도 없어 활동 내용을 접하기가 쉽지 않다. 게다가 언론 노출도 자제하는 편이라 명성에 비해 대중적인 인지도도 높지 않은 편이다. 공연이 없는 시기에 그는 평소에 영상을 통해 지도하던 제자들을 직접 만나기 위해 서울대학교로 향하고, 남은 시간은 뉴욕 집에서 가족들과 함께 보낸다.

그러나 이런 내용을 나열하는 것만으로는 그를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다. 수년 전 캐나다 토론토의 한 교회와의 약속 때문에 로린 마젤의 요청을 거절해 주변 사람들을 아연실색하게 만든 일이 있었다. 소속사의 다른 가수를 그 교회로 대신 보내줄 테니 반드시 마젤을 만나야 한다는 매니저의 애원에도 소용이 없었다. 회사의 눈 밖에 날 상황이었지만 이용훈의 연주 영상에 매료된 로린 마젤은 끝까지 그를 고집했고, 결국 토론토 일정을 마친 후 ‘돈 카를로’를 함께 연주했다. 이와 더불어 아테네에서 공연 도중 성대가 파열되어 치료와 회복에 5개월이 필요하다는 의사의 선고를 받았지만, 기도를 통해 회복되어 지금까지 노래하고 있다는 일화도 잘 알려져 있다. 이용훈은 현재 한 기독교 선교단체가 파송한 순회 선교사이다. 선교사는 종교적 교리를 전달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옳다고 믿는 신념과 가치를 위해 기꺼이 희생하고 큰 변화와 위험을 감수하기도 한다. 그는 오페라 가수나 서울대 교수라는 호칭보다 ‘선교사 이용훈’이 본인의 정체성에 더 부합된다고 말한다.

그를 더 알고 싶었다.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이하 메트)에서 작년 말부터 ‘카르멘’과 ‘아이다’를 공연하기 위해 뉴욕에 머물고 있는 이용훈을 만났다.

‘일 트로바토레’ ©Karen Almond/Metropolitan Opera

지난 11월 메트에서의 ‘카르멘’이 인상적이었다.

내가 맡은 돈 호세 역할은 매력적인 배역이다. 그래서 이미 메트를 비롯해 유럽의 여러 극장에서 노래하고 있다. 이번 역시 즐겁게 일할 수 있어서 좋았다.

이번 공연에서 특별히 기억 남는 점이 있다면 무엇인가?

마지막 날 공연에 갑자기 폭설이 내렸다. 뉴욕에서 주변 도시들을 잇는 버스터미널이 문을 닫았고 대중교통에 차질이 생기면서 큰 혼란이 빚어졌다. 이날 매니저의 전화를 받고 일찌감치 출발했는데 길이 너무 막혀 눈 속에 갇혀 있었다. 주인공이 늦는 것은 또 다른 대형 사고라 극장 근처에 와서는 일방통행 길을 역주행하면서 공연 30분 전에 겨우 도착할 수 있었다. 막이 오르기 5분 전 사색이 돼서 헐레벌떡 도착한 동료 가수 한 명은 4시간 30분이나 걸렸단다.

공연이 취소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많은 눈이 내렸다.

이날 학교에 갔던 아들 주안이가 눈 때문에 하교를 못 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사실 이렇게 눈이 많이 오면 공연이 취소되는 경우도 있다. 몇 년 전에 홍혜경 선생님이 출연하신 ‘나비부인’의 마지막 날 공연이 눈 때문에 취소된 적이 있다. 당시 롱아일랜드에 사시던 홍 선생님도 맨해튼으로 연결되는 기차가 운행을 중단하면서 극장으로 오실 수가 없었고, 일부 오케스트라 연주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결국 공연이 그렇게 취소됐었는데, 이번에도 그럴 수 있겠다고 생각했었다.

두 개의 중요한 오페라 작품에 연속으로 나서게 되었는데.

메트 같은 큰 극장은 몇 개의 작품들을 교차해서 매일 무대에 올리고, 토요일은 낮과 밤 다른 오페라가 연주된다. 1월 7일부터 12일까지를 예로 들면, 6일 동안 네 개의 작품이 일곱 번 공연되는데, ‘아이다’ ‘아드리아나 르쿠브뢰르’ 그리고 ‘카르멘’이 각 2회 공연이고 ‘오텔로’가 하루이다. ‘카르멘’에 출연했던 작년 말도 일정은 이와 비슷했다.

많은 공연의 일정을 소화하는 것이 체력적으로 힘들지는 않은가?

이번에 폭설 때문에 고생하긴 했지만, 사실 더 큰 사건이 하나 있었다. ‘카르멘’ 공연을 앞두고 오후에 리허설하고 있었는데, 극장장 피터 겔브가 급하게 연습장으로 나를 찾아왔다. 그날 저녁 ‘아이다’에 출연할 주역 테너가 목 상태가 좋지 않다고 오늘 저녁 무대에 대신 올라갈 수 있겠느냐는 부탁이었다. 라다메스 역의 커버 가수가 있었지만 극장장은 내가 나서 주기를 간곡히 요청했다. 그때가 공연 4시간 전이었다.

혹시 예전에 메트에서 ‘아이다’를 해본 적이 있었는지 궁금하다.

메트에서는 없었다. 그리고 여기는 내가 주로 해오던 프로덕션과 달라서 연기와 동선 자체가 완전히 새로웠다. 예전에도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 리허설 중에 ‘일 트로바토레’를 도와달라는 피터의 부탁을 거절했던 적이 있어서 이번에는 1시간 동안의 실랑이 끝에 그의 요청을 수락하게 되었다.

리허설은 커녕 공연 직전에 무대에 서기로 한 사실이 놀랍다.

하루 전에 부탁을 받는 경우는 종종 있다. 사실 테너에게 ‘아이다’ ‘오텔로’ ‘마농 레스코’는 제법 부담되는 배역이라 노래를 쉽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세 벌의 무대의상은 부랴부랴 맞춰 공연 직전에 완성되었고, 기다리는 동안 도서관에서 악보를 구해 다시 한번 가사를 확인하면서 이전 영상을 통해 연기와 동선을 익혔다. 마지막 한 시간은 지휘자와 꼭 필요한 음악적인 이야기를 나눴다.

연주는 어땠나?

마차를 타고 등장하는 장면에서 말 한 마리가 발차기를 심하게 했다. 나중에 들으니 그 말이 나를 찰까 봐 모든 배역이 가슴을 쓸어내렸다고 하더라. 다행히 공연은 성공적이었다. 그런데 이게 끝이 아니다. 급한 불을 끄고 다시 ‘카르멘’ 리허설로 복귀해 최종 리허설까지 마쳤다.

그런데 ‘아이다’ 테너 주역에 또 문제가 생겨서 이번에는 아예 뉴욕을 떠나버렸다는 소식이 들려왔고 다시 극장측의 요청을 받게 되었다. 미리 알았더라면 ‘카르멘’ 마지막 리허설에서 목을 아꼈을 텐데 하는 생각을 하면서 ‘아이다’ 마지막 공연에 올랐다. 같은 시기에 함께 돌아가던 ‘삼손과 델릴라’의 테너도 목 상태가 좋지 않았기 때문에 ‘카르멘’ 스태프들은 부탁이 들어와도 절대로 못 한다고 이야기해야 한다고 내게 볼멘소리로 신신당부하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1994년 부모님과 함께 찍은 서울대 입학사진

 

 

 

 

 

 

 

 

 

음악 선교사의 꿈

처음 음악을 시작하게 된 이야기는 많이 알려지지 않은 것 같다.

부모님 두 분이 다 신학을 하셨다. 이모와 이모부 역시 선교사이시다. 이런 환경 속에서 지내다 보니 생활의 중심이 교회가 된 것은 자연스러웠다. 그러다 중학생 시절에 신앙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게 되었고,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는 선교사의 길을 걷겠다고 결심했다. 그래서 신학교에 갔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다른 방법을 찾아 꿈을 이루기로 마음을 바꿨다. 당시 다니던 교회에서 찬양을 인도하는 역할을 맡았었는데, 좀 더 잘해보고 싶은 마음에 성악을 전공하던 교회 친구에게 도움을 청했다. 내 소리를 들은 그 친구는 자신이 2년 동안 가르쳤던 제자보다 낫다며 성악을 제대로 공부해 볼 것을 권유했다.

7살 피아노 학원 발표회에서

친구의 권유로 성악과 인연을 맺은 줄은 몰랐다.

노래하는 것을 좋아하긴 했지만 성악을 공부하게 되리라고는 생각해보지 않았다. 그렇게 지원한 입시에서 음악대학 실기 수석으로 서울대에 입학하게 되었는데, 이때 그 친구의 추천으로 만나게 된 분이 배종우 선생님이셨다. 당시 서울대에 출강하고 계셨는데 아무것도 모르는 나를 위해 최선을 다해 지도해주셨고, 바리톤에서 테너로 바꿀 것을 조언해주셨다. 배종우 선생님과 첫 인연을 맺은 것은 커다란 행운이다.

 

 

서울대 재학 중에도 배종우 선생님과의 인연이 이어졌나?

입학한 후로는 박인수 선생님과 공부했고, 이후 미국에 와서는 매네스 음대에서 아더 레비 선생님을 만났다.

성악을 공부하던 시절 이야기를 조금 더 해달라.

노래 공부가 즐거웠다. 내가 기쁘게 하면서도 잘할 수 있다는 것이 좋았다. 그렇지만 선교사가 되겠다는 생각은 음악을 공부하면서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런데 여러 가지 개인적인 일들이 겹치면서 성악을 더 이상 공부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그렇게 1년 반 정도는 성악가가 아닌 다른 모습으로 살았다. 노래를 했던 유일한 기회는 몸담고 있던 선교단에서 찬양하는 것이었다. 당시 이 선교단에서 내 반주를 도왔던, 오르간을 전공한 아내 이은영을 만났다. 그와 몇 년을 알고만 지내다가 시간이 흐른 후 결혼하게 되었다.

잘하고 좋아하는 일을 그만두면서 상심이 컸을 것 같은데.

하나님이 내가 선교사가 되기를 원하시는지 진지하게 기도해보고 싶었다. 하고 싶다고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기도원에 들어가 기도하며 응답을 기다렸고 하나님은 이렇게 이야기하셨다.

“용훈아, 나는 너를 노래하는 사람으로 만들었고 네가 노래하는 것이 참 기쁘다! 이제는 너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 노래해 줄 수 있겠니?”

다시는 노래하는 세계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응답은 당황스러웠다. 이 경험은 내가 무대에서 노래하는 이유가 무엇인가를 늘 돌아보게 만든 출발점이 되었다. 마음을 다시 추스르고 다시 노래를 시작해야겠다는 결심을 했고, 곧 미국 유학으로 이어졌다.

Cavalleria Rusticana

뉴욕에서 이용훈의 진가가 드러나기 시작한 셈인데, 유학 시절은 어땠나?

감사하게도 장학금 혜택을 받게 되긴 했지만 뉴욕의 살인적인 생활비는 감당하기 어려웠다. 밥 먹을 돈이 없어서 커다란 페트병에 물을 채워 다니며 배를 채우기도 했고, 내 방문 앞에 전자레인지용 즉석 음식들을 두고 가는 친구들도 있었다. 학생인데 내 전용 컴퓨터도 전화기도 없이 살았다. 잘되고 멋진 오페라 가수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꿈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레슨을 받고, 사람을 만나고, 필요에 따라 비행기를 타고 가서 오디션을 해야 하는데 당시 그럴만한 여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상금을 받아 생활비에 보태야 했기 때문에 많은 콩쿠르 도전을 했었다.

사람들이 말하는 이용훈의 독특한 발성법은 매네스에서 만난 선생님을 통해 완성된 것이라고 하던데.

성악을 공부하는 누구에게나 그렇듯 나 역시 발성에 대한 고민이 많았다. 매네스에서 아더 레비 선생님을 통해 나름의 방법을 만났고 이를 기초로 나의 길을 찾아갔다. 사람마다 성대의 구조도, 신체의 모습도 다르다. 노래하면서 느끼는 것은 발성을 깊이 연구한 사람이 줄 수 있는 도움과 실제로 무대에서 뛰는 사람이 깨닫는 노하우는 약간 다르다는 점이다. 아무리 좋은 선생님께 발성을 배우더라도 결국 내 몸에서 내 목소리로 구현해 낼 수 있어야 한다. 중요한 점은 이 둘 사이에는 괴리가 있다는 점이다. 클라리넷과 프렌치 호른은 모두 숨을 관으로 내보내 원하는 음정과 소리를 내지만, 악기의 생김새와 구조, 소재가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입술 모양이나 운지법, 바람의 세기와 속도 등과 같은 세부 테크닉도 전혀 달라져야 한다. 이처럼 발성은 내 신체적 조건이 어떠한지를 이해하고, 그에 따라 가장 적절한 방식으로 받아들여 잘 내면화시키는데 달려있다. 그래서 나 역시도 내가 노래하는 모습을 객관적으로 확인하고 점검한다.

훌륭한 성악가가 되기 위한 조건은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어려운 질문이다. 솔직히 잘 모르겠다. 피나는 노력을 기울이는 후배나 동료 중에는 나보다 출중한 실력과 조건을 갖춘 가수들이 많다. 내가 그들보다 뭔가 나은 구석이 있기 때문에 대극장에서 유명 가수들과 공연하는 것이 아니다. 소위 스타가 되는 데는 수많은 변수가 작용한다. 실력, 경험, 인품, 외모, 연기력, 친화력, 게다가 좋은 매니저까지 완벽히 갖춘 가수들 중에도 여전히 커리어 때문에 고민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은 정확한 해답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방증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종교적인 질문이다. 굳이 불편한 상황을 만들면서까지 자신의 신념을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이유는?

이미 많이 알려진 사실이지만 나는 어디를 가나 내가 믿는 가치를 드러내는 편이다. 그러다 보니 이를 이슈화 시키는 극장도 있었고, 불편하게 여기는 동료들도 만나는 것이 사실이다. 유럽의 한 극장은 나를 더 이상 찾지 않는다.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알만한 한 성악가는 팬들에게 직접 “Jesus Loves You”를 사인하는 내 모습을 보고서 면전에서 격노하기도 했다. 나는 성악가이지만 동시에 선교사이기도 하다. 기회가 될 때마다 내가 확신하고 믿는 것을 소개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만일 남에게 피해를 주거나 강제한다면 그것은 옳지 못한 일이기 때문에 늘 조심하는 편이다. 나와 만나고 일하는 사람들, 그리고 좋은 작품을 만들기 위해 늘 나의 최선을 쏟는다. 내게 주어진 역할에 충실히 하는 것이 내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신념에도 부합하기 때문이다.

아내와 함께 , 2001년 유럽 데뷔무대에서 마리아칼라스 재단 이사장과 함께,  가족사진

자기 관리는 어떻게 하는가?

당연한 이야기지만 건강을 챙기는 것이 중요하다. 노래를 잘하기 위해서는 육체적인 건강뿐 아니라 삶이 건강해야 한다. 그런데 오랜 시간 동안 집을 비우다 보니 가정이 건강하지 않으면 삶의 건강이 보장되기 어렵다는 사실을 알았다. 종종 커리어의 정점을 달리던 스타 성악가가 한순간의 실수로 연주가 끊기거나 불행하고 비참한 마지막을 맞는 경우들을 본다. 그래서 가족의 소중함을 피부로 느낀다. 유럽 데뷔 무대부터 아내가 늘 동행했다. 지금은 아들 주안이가 학교에 다니는 나이가 되어 엄마의 손길이 많이 필요하지만 방학 기간에는 내가 연주하는 곳으로 세 식구가 모여 최대한 함께 시간을 보내는 편이다.

세계 오페라 극장의 변화들

테너 이용훈이 보는 세계 오페라 시장의 미래가 궁금하다.

안타깝게도 미래가 밝다고 보기 어렵다. 중소 규모의 극장은 극도의 재정난에 빠져든 지 오래다. 단적인 예로, 극장이 가수를 초청할 때 여행 경비를 부담해주는 것이 기본이었지만 요즘은 그렇지 않은 극장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가수들이 어려워진다는 의미이다. 메트에서 ‘돈 카를로’로 데뷔했던 2010년만 하더라도 극 중 잠시 등장하는 난민들 역할을 했던 사람에게조차도 커버를 세웠다. 그러던 메트가 몇 년 전 심한 독감으로 노래할 할 수 없었던 나를 대신해서 커버를 무대에 올린 적이 있다. 공교롭게도 그날은 라이브로 생중계되는 중요한 공연이라 집에서 실황을 보고 있었는데, 내 역할을 하는 커버 가수의 연주가 너무 불안했다. 화면에서도 관객들의 심란한 반응이 느껴질 정도였고, 공연 중간에 지금이라도 그냥 와 줄 수 없겠냐는 전화까지 걸려왔었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메트는 보통 주역 가수가 공연을 못 할 경우에는 커버를 그냥 올리기보다는 비슷한 중량감의 다른 주역을 섭외하는 경우가 많다. 그만큼 투자를 하고 공연의 수준을 보장받겠다는 뜻이다.

극장의 재정난이 가져오는 또 다른 어려움은 무엇인가?

돈이 없다는 것은 극장의 제작 환경이 나빠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보다 더 큰 문제는 앞으로 오페라를 이끌 젊은 가수들의 기회가 위축된다는 점이다. 실제로 매년 엄청나게 쏟아져 나오는 젊은 성악가들 중에는 매우 뛰어난 역량과 조건을 갖춘 사람이 많은 반면, 무명의 신인을 쓰기보다 스타를 세워 흥행을 보장받으려는 극장들의 추세 때문에 어린 가수들이 설 무대가 줄어들고 있다.

악순환이 아닌가?

신인이 등장해 대박을 터뜨리면 좋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세계 어디를 가 봐도 관객들은 친숙한 사람들을 선호한다. 나조차도 매니저에게 후배나 동료들을 추천해도 돌아오는 말은 똑같다. “나도 너처럼 저 친구들을 스타로 만들어주고 싶다. 그런데 팔리지도 않는 가수들을 회사에서 데리고만 있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지 않겠는가.” 실제로 무명의 신인을 제대로 키워내기 위해서는 전략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여기에는 시간과 재정이 동반된다. 아무리 콩쿠르 입상을 통해 실력이 검증된 가수라고 하더라도 극장 측에서 “Who are you?”라고 말한다면 더 이상 손을 쓸 수가 없다.

유명 매니지먼트에서는 스타와 신인을 함께 세우려고 노력할 것 같은데.

지금 내가 속한 회사는 요나스 카우프만처럼 꽤 이름 있는 가수들이 모여 있는 회사라 그나마 사정이 좀 나은 편이다. 몇몇 스타들이 있어서 그나마 극장들과 싸울 수 있기 때문이다. 지난 11월 메트에서 ‘카르멘’을 함께 공연했던 카르멘 역의 클레멘틴도 같은 소속사 출신이었고, 최근 라 스칼라 극장에서의 공연에서는 거의 전 배역이 같은 회사 가수들로 구성되기도 했다.

어떤 회사에 소속되어 있는지가 중요한 것처럼 들린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한다면, 회사 이름이 아니라 역량 있는 매니저가 아티스트와 얼마나 잘 통하는가가 더 중요하다. 실제로 대형 회사에 속한 가수들 중에는 매니저와의 불화로 소속사를 옮기거나 독립해버리는 경우가 빈번하다. 매니저들 가운데는 가수를 키워내기 위해 큰 그림을 그려나가는 고수들이 있는데, 그들이 보는 아티스트의 가능성과 방향이 실제 가수 본인에게 잘 납득이 되지 않을 때 갈등이 생기기도 한다. 노래하는 사람은 본인이 원하고 잘 맞는다고 생각하는 배역이 있지만, 매니저는 극장장의 눈으로 가수를 평가하기 때문이다. 다행히 나와 함께 일하는 매니저는 거의 40년 경력의 베테랑인데 나를 잘 이해해주고 생각도 잘 통하는 편이다.

테너 이용훈의 10년 후를 예측해본다면 어떤 모습일까?

내년 시즌에 메트에서 ‘마농 레스코’를 함께 하기로 계약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 최근 내부 사정으로 이 프로덕션이 취소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테너에게는 아주 큰 작품이고 이번 계약이 롤 데뷔였기 때문에 오랫동안 꼼꼼하게 준비해왔다. 대신 메트 측에서 다른 날짜에 ‘토스카’를 제안했지만, 이미 약속된 다른 극장과 스케줄이 안 맞아 고사했다. 대신 같은 기간 메트 때문에 우선순위에서 밀렸던 바르셀로나 극장에서 ‘아이다’를 공연한다. 이번 ‘마농 레스코’의 경우처럼 내가 컨트롤할 수 없는 상황을 만났을 때, 이에 연연하지 않고 담담히 인정하고 최선을 다하려고 한다. 작년 이맘때 친구 드미트리 흐보로스토프스키를 잃었다. 겨우 55세밖에 안 된 나이였다. 비슷한 시기에 매니저 브루스 젬스키도 세상을 떠났다. 이런 상황을 만나면 인간이 얼마나 약한 존재인가를 생각하게 된다.

계획이나 희망은 따로 갖고 있지 않는다는 의미로 봐도 되는가?

희망하는 대로 실현되는 것을 마다하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그렇지만 내가 언제까지 오페라 무대에서 노래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고, 지금 서 있는 이 자리를 유지하고 싶다고 해서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래도 굳이 말한다면, 20년 후에 지금처럼 무대에 서지 못하더라도 후배나 동료들에게 도움이 되는 역할을 하고 있으면 좋겠다. 지금 나는 현역으로 노래하고 있고, 대학에서 가르치면서 선교를 하는 사람이다. 오늘 내 앞에 놓인 일에 최선을 다하며 왜 노래하는지 그 이유를 잘 붙들며 살아가려고 한다. 크고 화려한 무대가 아니더라도 음악가로서, 신앙인으로서 변질하지 않고 내 몫의 일들을 끝까지 해나갈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한다.

‘카르멘’ ©Marty Sohl/Metropolitan Opera

에필로그

마지막으로 다음 시즌 일정에 관해 물었다. 그는 잠시 생각을 하더니 전화기를 뒤척이며 스케줄을 찾았다. 런던 코벤트 가든에서 ‘토스카’와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 취리히에서 ‘운명의 힘’, 마드리드에서 ‘돈 카를로’, 바이에른 슈타츠오퍼, 이미 오랜 단골이 된 메트, 그리고 2023년 시드니 극장에서 예정된 ‘오텔로’까지 수많은 일정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그러나 그의 관심은 이보다 훨씬 나중에 만나게 될 것들에 있는 듯했다.

2010년 칸 영화제 심사위원 그랑프리 수상에 빛나는 프랑스 영화 ‘신과 인간’은 1996년 알제리 한 수도원의 수도사들에게 닥칠 죽음의 순간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를 그린 수작이다. 그들은 죽음을 택했고 오랫동안 가져왔던 신념을 끝까지 지켰다. 더 먼 곳으로 인생의 목적을 정하는 순간 오늘은 사뭇 달라진다. 이용훈이 향한 방향을 마주한 순간, 종교를 초월한 뭉클함이 느껴졌다. 마치 곧 녹아버릴 1월의 눈꽃처럼 혼신을 다해 자신을 태우며 노래하는 그의 진정성이 겨울 철쭉 빛처럼 반갑게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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